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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조나단 에드워드 후편

by 【고동엽】 2022. 8. 22.

 

 

부흥 신학으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론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조지 윗필드와 함께 제 일차 대각성의 주역이었다. 그는 1740년대 초 대각성이 일어나기 전인 1730년대 중반 설교를 통해 자기 목회지인 노샘프턴에서 부흥을 주도했고 그것은 뉴 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대각성 중에는 부흥 신학을 정립함으로 대각성을 뒷받침했다. 그의 신학의 어떤 점들이 대각성을 낳을 수 있었는가? 부흥을 일으키는 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2007년 평양 대부흥 100 주년을 앞두고 이 땅에 다시 한번 그러한 대부흥의 도래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던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바로 그 질문, 즉 “에드워즈의 신학 중 무엇이 대각성을 가능하게 했던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한 시도이다. 동시에 그것은 에드워즈의 신학들 중 가장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측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에드워즈의 통찰들 중 어떤 부분을 이제 1907년 평양의 대부흥 100 주년 기념을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 교회의 또 한번의 부흥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자 한다.

두 가지 전도 방식


제임스 패커에 따르면 전도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대의 전도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청교도 전도 방식이다. 전자는 “구도자의 좌석들” (anxious seats), “제단의 부름”(altar call), “질의자의 방” (enquiry room) 등으로 상징된다. 거기서는 새로운 회심자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결단에 대한 공적 증언의 행위”로 앞으로 나오거나 손을 들거나 결신 카드를 작성함으로써 자기들의 “결정” (decision)을 분명히 표시한다. 현대의 전도자들은 자신의 교파적 소속과 상관없이 거의 누구나 전도 설교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요청함으로 구원이 개인의 결단이나 결심에 달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현대의 전도 집회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의식적, 결정적 믿음의 행위 (immediate, conscious, decisive act of faith)를 회심하지 않은 자들로부터 확보하는 데 직접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현대적 전도 방식의 원조는, 패커에 의하면, 19세기 초의 찰스 피니다. 현대의 복음 전도는 피니의 방식을 따른 것이요 피니의 인간론의 산물이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 전도를 특징짓는 것은 수정되고 응용된 피니의 방법이다.” 그런데 패커는 피니가 “명백한 펠라기안주의자”라고 단언한다. 피니는 “일단 사람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되기만 하면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힘주어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니는 어거스틴-개혁주의-청교도적 전적 무능력 (total inability)의 교리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패커의 지적에 의하면, 청교도들에게는 “복음전도”(evangelism)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것은 20세기에 만들어진 단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도는 청교도들의 “주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뿐 아니라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설교자들로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리차드 백스터는 대표적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설교자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청교도 교리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회개하거나 믿을 수 없다고 패커는 지적한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없이 인간은 영적으로 선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때에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때 받을 수 있을 뿐 스스로 가지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로이드 존즈가 지적했듯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패커는 청교도들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하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찾을” 의무를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죄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설교의 말미에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신다”고 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믿기로 “결심”할 수 없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나 로이드 존즈 같은 칼빈주의자들은 찰스 피니의 전도 방식을 비판한다. 피니가 구원을 인간 의지의 결단에 달린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회심과 관련해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도덕적 설득”뿐이라는 피니의 주장은 교리적 오류이며 회심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단지 도덕적 설득만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 아래에서 행사되는 물리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적 구원론에서의 딜레마


칼빈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 만사와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죄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시작된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는 어떤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능력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첫 번째 작업은 “예정”이었다. 창세 전에 택정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때가 되면 복음으로 부르시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주신다. 인간 스스로는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즉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청교도들은 “회심” 혹은 “신생/중생”이라는 단어를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는 기술적 용어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으나 구원에 관심있는 죄인들은

자신들을 회심시키려 몸부림친다. 자기들의 마음을 믿는 상태로
만들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얻는 신뢰를 발휘하
려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의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를 믿겠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자들에게서 이런 일이 아주 흔히 발견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인간 스스로는 믿을 수 없다. 단 자신이 택정된 자라면 하나님이 “자기 때”에 “자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완전히 일임하고 인간은 각자 자기 할 일이나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난센스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전도의 여지는 사라질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도론 (the doctrine of seeking)


그러면 전도자는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어떤 권면을 주어야 하는가? 믿으라고 말하거나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면 그들에게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에드워즈는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즉 각성된 구도자들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찾으라(seek)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기까지 추구하고(seek) 몸부림칠(strive) 수는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힘은 자연인에게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심령이 죽어 있고 태만하다 해서 [구원을 위해] 노력할(take pains)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할 능력은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받기가] 어렵다고 해서 사람이 이러한 일들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일들]을 하면서 몸부림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견해에 의하면 “추구함 없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히려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추구한다는 것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추구하는 방법”(The Manner in Which Salvation Is to Be Sought)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착수해서 성취해야만 하는 일(work) 혹은 과제(business)가 있다”는 교리를 제시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에서 지시하시는 모든 의무(duty)를 중단없이 수행하는 것”이었다("It is the work of seeking salvation in a way of constant observance of all the duty to which God directs in His Word").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은혜의 방편을 성실히 사용할 힘은 그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모든 규례를 지키는”(attend all ordinances) 일, “공사간에”(public and private) 모든 “종교적 의무” (duties of religion)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항해 싸우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는 일을 아주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행할 수 있다.

구도론의 성경적 근거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노아의 경우를 제시한다. 노아는 수백 년동안 방주를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그는 인정한다. 노아가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자비의 한 예”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노아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구원을 얻도록 한 가지 일을 지정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 일에 착수해서 그것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게 정하셨다”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에드워즈가 구도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구절은 누가복음 16장 16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구절이었다. 이 본문의 “천국으로 침입한다”(Pressing into the Kingdom) 이라는 귀절을 에드워즈는 “대단한 노력”(greatness of endeavor) 혹은 “갈망의 힘”(strength of desire)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엄숙하고도 단호한 결단”(an earnestness and firmness of resolution)으로 “반대와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한 마디로 그 구절의 의미는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또 신약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본문을 준비론의 근거로 제시했다.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인간이 행위에 의해 구원얻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함이 없이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yet they are not saved without works)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들(good wokrs)을 함이 없이는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셨다"는 것이었다.

윤리적 의무의 수행도 구도의 일환


에드워즈는 은혜의 수단의 범위를 아주 광범위하게 잡는다. 이를테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기에 포함시킨다. 그는 회심의 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그러한 일들을 모두 수행하면서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종교적 도덕적 모든 의무가 포함되었다. “구원얻는 회심을 획득하는 길은 당신의 삶을 철저히 개혁하고 율법의 두 돌판에 나타난 모든 의무를 다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 앞에 나오라거나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식의 전도 집회식 초청은 발견되지 않는다. 회심의 은혜를 받으려면 심지어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까지 다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자칫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우려될 정도이다.

만일 당신이 회심하고자 한다면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의무들을 다 수행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의무들, 당신의
남편, 아내, 자녀들에 대한 책임, 이웃들에 대한 온유, 정의
그리고 자비의 의무들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악의, 분쟁, 시기, 그리고 험담을 피해야 하며
사랑의 행위에 있어 풍성해야 하며 여러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려 애써야 합니다.

한 마디로,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으려면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은 단지 몇몇 계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즉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지정된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도, 성경 읽기, 예배 참석 등의 일을 “공로”나 “행위”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도 역시 은혜를 받는 통로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평가들에 의해 행위 구원적 요소를 더욱 더 많이 가진 가르침이라고 지적당할 소지가 있는 교리이다.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배, 기도 등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속한 계명들 뿐 아니라 두 번째 돌판, 즉 인간들에 대한 의무에 관한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도 일종의 “은혜의 수단”에 해당한다는 것은 철저한 개혁주의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서 평생을 보냈던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대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건 에드워즈는 자신이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에 아랑곳없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하신 모든 명령들을 충실히 지키는 중에 신령한 은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에드워즈에 의하면, 실제로 열심히 추구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었다. 추구하는 모든 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고 에드워즈는 첨언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열심히 찾는 자는 대부분 구원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최선을 다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단호한 결단으로 목표를 추구한 자들은 다 “회심의 은혜”를 얻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한 구도자적 노력은 한 인간의 생에 있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영원한 구원의 문제는 세상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문제에 최우선적인, 그리고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용의가 있어야 했다. “단지 능력, 힘, 그리고 재산만이 아니라 시간, 그리고 생명까지도 이 일에 바쳐야 한다. 실로 우리는 전 생애를 그 일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도 에드워즈는 외쳤다. “당신의 남은 생애동안 그 일에 온전히 전념하시오.”

그들은 종교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수적인 문제로 여기는 자들
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그 문제와 경쟁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유일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
어야 합니다. 즐거움, 명예,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conviction of sins)의 필수성


일반적으로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많은 청교도들은 회개와 관련하여 죄에 대한 깊고도 확실한 깨달음, 즉 통회를 회심 과정의 필수적 요소로 강조했다. 패커가 잘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 회심론이 현대의 견해와 구별되는 결정적 지점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믿음(fatih)에 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죄책(guilt), 그것의 오염, 그 추악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해하심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 죄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conviction)이 믿음(faith) 앞에 와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슨 죄들로부터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알기까지는 아무도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을 위한 청교도적 “준비론”(preparationism)으로 알려진 이 견해는 종종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길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오해되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고 패커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정확히 중세적 의미의 통회(contrition)가 절대필요함을 알았다. 그것은 자기의 죄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미워하여 그것들로부터 구조받기를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통회가 없이는 아무도 “죄의 형벌로부터만이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기 위해 참으로, 신실하게, 그리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의 회심론에 의하면 “준비” 단계는 “필수적”이었다. 패커는 현명한 청교도 설교자들과 상담자들이 절대로 그 과정을 생략하거나 단축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들은 구도자들이 참으로 죄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린 것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구도자의 양심에 그의 죄들의 죄악됨과 아울러 그들에게 단지 사죄뿐 아니라 거룩하게 될 필요성을 집요하게 제시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획득하기 전에 원칙적으로--이 말은 예외도 있다는 의미다!-- 통과해야 하는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전에 그는 자신의 죄와 비참, 혹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전에 인간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evil)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sense)을 주셔야만(should)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 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sensibly) 있어야만 한다(should)
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woeful calamity and dreadful misery)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sensibly) 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sensible)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ordinary)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
한 후 다정하게 (comfortably)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한 순서는 그들이 고뇌에 빠진 후 그들 자신의 무력과
하나님의 능력 및 은혜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보게 된 다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정말 회심하기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리고 신속히 이 일에 착수해야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가 제시한 구절은 레위기 26:40-45이었다. 이 본문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굉장한 은혜를 주시기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을 쓰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특별히 제공된다는 본문을 지적한다. 그 말씀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죄책과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를 깨달아야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자기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자기가 지옥에 합당한 존재임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죄책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기가 속수무책임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비참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좀 더 리얼하게,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즈는 확신했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복음은 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


구도자는 언제까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소망과 위로를 얻기까지”라고 대답한다. 혹은 좀 더 막연한 표현으로 그는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열심히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것에 여러분은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믿음”이 주어질 때까지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심으로 그에게 와서 그를 자신의 구주로 취하며 자신을 그에게 드림으로써 그의 백성들 중 하나가 되며 행복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truly)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구원얻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안다”(know)고 그는 주장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선하고 사랑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실들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도리의 탁월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온전히 확신합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가련한 피조물들임을 보며 이 비참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봅니다.”


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단지 교리--유일신 교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의 구주라는 교리들--에 대한 지식과 동의다. 일종의 고백주의적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런 믿음은 있지만 예수를 “참으로” 믿지는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가짜 믿음만 가진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를 인정하고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죄인들의 구주임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처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즉 “참” 믿음이 아닌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겉으로는 훌륭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주일을 지키고 주초를 삼가며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믿음이란 것이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검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자기에게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성찰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보아야 합니다.”

신적 초자연적 빛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신앙에 있어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취어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의 사역을 가르치는 말씀의 탁월성을 보게 된 적이 있습니까?” 1734년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Immediately Imparted to the Soul by the Spirit of God, Shown to be Both a Scriptural, Rational Doctrine")라는 중요한 설교를 한다. 이 설교에는 그의 회심론과 관련된 핵심적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인데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곧바로 전달된 것으로 자연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 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지론인 영적 신적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a conviction of the truth and reality of them)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얻는 확신들”(spiritual and saving conviction)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 (a sight of their divine excellency and glory)이 생겨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쳐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할”(sense)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sense)이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선(good)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인(notional)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idea)이 떠오를 때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서는 단지 사변적 기능 혹은 이해력(understanding)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 혹은 성향(inclination), 혹은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 에드워즈는 견해(opinion)로서의 지식과 감각(sense)으로서의 지식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스러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스러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꿀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전자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에 꿀맛에 대한 관념(idea)이 없으면 후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믿음의 전제 조건으로서 영적 빛


《종교적 정서》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에드워즈는 인간은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의 발동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현대에 흔히 발견되는 복음전도자들의 방식과 중요한 견해 차이를 드러낸다. “아무 영적 빛이나 시각 없이(without any spiritual light or sight)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밀어 붙이거나 촉구하는(press and urge)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현대 전도 집회에서는 믿음을 촉구하고 재촉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presumption)이다.” 아마 에드워즈는 현대 전도 집회에서 결신했다고 주장하는 많은 이들이 “주제넘은 상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 같다.


신령한 초자연적 빛을 비췸받아 영적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즈는 은혜의 체험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생생한 은혜의 역사”(lively excercise of grace),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sensible Christian experiences) 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living by faith)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무조건 믿는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세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has faith)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believes)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persons so qualified as he is)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convinced of the varacity of God)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spiritual enlightening)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offer)를 “영적으로 적용”(spiritual application)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offer)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 및 자기가 제안(offer)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혹은 미각(relish)”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offer)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title)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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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
-The Religious Affections 중심으로-


나 용화 박사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카톨릭교회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신학교와 교회마다 영성이나 영성신학과 영성훈련에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부류에서는 영성을 정신성과 혼동을 하고 있고, 또 다른 부류에서는 신비한 체험과 혼동하고 있으며, 참된 영성과 거짓된 영성간에 구분이 안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사적으로 정평이 있는 죠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The Religious Affections)를 중심으로 참된 영성의 두드러진 표증들을 거짓된 경우와 대조하여 살피게 되면 성경적으로 건전한 영성이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A. 참 종교의 정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은 전도서가 밝히 말하고 있는대로 그 마음이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이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사는 인간은 허무의 바다에서 표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므로서 가슴이 벅차 오르는 신앙 뿐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도록 우리가 부르심 받았는가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감동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깊이 체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순종의 원동력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갇힌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바 사랑의 실천을 결과시킨다. 그리고 이 복음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발휘되는 것이다.

 

참 종교의 핵심 정서(master affection)는 사랑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영적 지식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참된 변화를 경험하며, 예수의 온유한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덕을 베푸는데 열심도 내야 하는 것이다.

 

 

1.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정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사도 베드로의 이 말씀은 믿음의 시련을 극렬하게 겪으며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근심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말씀이다. 믿음의 시련은 거짓 종교로부터 참 종교를 구별시켜주고 참종교의 진리가 드러나게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어도 영적으로 믿은 까닭에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외적인 육체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큰 기쁨을 얻게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으므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원망해야 할 것 같으나,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렇듯 참종교에는 큰 환란과 핍박과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love to Christ)과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기쁨(joy in Christ) 등 거룩하고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가 있다. 이 종교적 정서는 우리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성령의 감동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보다 더 힘차게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감정적 표현이다(the more vigorous and practical exercises of the inclination and will of the soul).

 

이 종교적 정서에는 열심(fervent in spirit) 또는 열정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되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을 품고 섬기지 아니하면(신 6:4, 5 ; 10:12 ; 롬 12:11 ; 마 22:37) 우리의 의지와 성향이 제대로 표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이 없는 종교적 정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열심을 품고 힘을 다하여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여 그를 사랑하고 즐거워해야 그것이 참된 중생의 증거이며, 경건의 능력인 것이다. 열심이 없는 신앙, 미지근한 상태의 종교는 미숙한 것이든지 아니면 괴이하거나 거짓된 것이기 쉽다. 경건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 속에서 성령은 강렬하고 거룩한 정서를 주신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다(눅 24:32, 참고, 딤후 1:7). 그러기에 종교적 열심과 같은 정서가 없으면 신앙의 활동이 멈추게 되고 만다. 즉, 종교적 정서가 없이 교리적인 지식이나 관념적 사변적 생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종교의 일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이나 행실에 변화도 없고 자기의 구원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열심을 품고 기도하는 일도 힘써 하지 않는다.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의 삶에 아무것도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죠나단 에드워즈가 소개하는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정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여호와에 대한 경외(godly fear)이다. 참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떨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몸도 떨며,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인하여 그를 경외하는 것이다. 이 경외는 소망과 함께 있다. 소망이 없는 경외는 성도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소망하는) 자를 살피사"(시 33:18)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인자하심을 소망하는 자이다(참고, 시 147: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자가 복이 있고(시 146:5)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시 31:24). 그리고 이 소망은 사랑과 함께 있다(고전 13:13).

 

둘째, 죄와 악에 대한 미움(증오)도 종교적 정서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악을 미워한다(잠 8:13, 시 97:10, 119:104). 미움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죄이지만, 죄를 미워하는 정서는 중요한 종교적 정서인 것이다.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longings, hungerings, and thirstings after God and holiness)이다.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참고, 사 26:8, 시 42:1-2, 63:1-2, 84:1-2).

 

넷째, 거룩한 기쁨(holy joy)이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시 97:1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3:1, 4:4, 살전 5:16).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희락이 있다(갈 5:22). 다섯째, 종교적인 슬픔이나 상한 마음(religious sorrow, mourning, and brokenness of heart)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참고, 사 61:1-2, 마 5:4).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참고, 사 57:15, 66:2).

 

여섯째, 감사하는 마음(gratitude)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살전 5:18)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기에 여호와께 감사함이 마땅하다(시 117:1-2, 118: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에 속할 뿐 아니라 창조사역과 구원 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는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참고, 시 136편).
일곱째, 긍휼 또는 인애(compassion or mercy)이다. "의인은 은혜(긍휼)를 베풀고 주는도다"(시 37:21)(참조, 시 37:26, 잠 14:31).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 여덟째, 열심(zeal)이다. 열심은 참된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정서이다. 이 열심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기대하신 정서이기도 하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래서 열심이 부족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크게 책망하신 바 있다(계 3:15, 16, 19).

 

아홉째, 참된 종교의 원천되는 정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모든 정서들 중의 으뜸이요, 다른 정서들의 원천이다(the chief of the affections and fountain of all other affections). 어떤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주신 대답에 보면, 첫째는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40).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이렇듯 사랑은 종교의 진수요 영혼의 생명의 요소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모든 은혜로운 정서들을 내는 원천이다. 이 사랑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기뻐하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을 때는 슬퍼하며, 내세를 기대할 때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열렬한 열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에 이러한 정서들이 잘 집합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2. 바울의 정서


성경적 정서가 가장 탁월한 모델로는 구약에서는 다윗이요, 신약에서는 바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고 그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미쳤다고 사람들이 내놓을 정도였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바울은 이처럼 무엇보다 영광스런 주님께 대해 열정적 사랑으로 가슴이 뜨겁고 벅차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대해 사랑이 넘쳤다. 그것은 정감 어린 부드러운 사랑이요(살전 2:7, 8) 애끓는 사랑이며(빌 1:8, 몬 12, 20), 진실하게 보살피는 사랑이요(고후 8:16), 근심하는 사랑이다(고후 9:2, 11:28).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사랑이다(고후 12:19).

 

바울에게는 하나님과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성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환난과 핍박과 고통 중에도 늘 기쁨이 넘쳤다(고후 1:12, 7:13, 빌 3:3, 4:10, 살후 1:4).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랄 뿐 아니라,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었다(빌 1:20-23). 그는 경건한 열심의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바울은 넘치는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들과 교회를 위하여 근심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후 2:4, 행 20:19, 31). 그는 주님께 대한 헌신적 사랑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려 갈 정도로 철저하게 순종하였으며(행 23:11, 25:10-12) 그는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과 몸까지도 다 내어줄 만큼 순종의 사람이었다(참조, 행 20:24).

 

사랑과 눈물의 사람 바울은 정서적으로 또한 온유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바울은 불의를 당하고 속는다 해도 참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걸지 아니했다(고전 6:6-7).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아내와 함께 동거하면서 사역을 해도 자기는 혼자서 사는 것을 잘 감당했다(고전 9:4-5). 그는 온유의 사람인지라 자기의 유익 대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했다(고전 10:24). 그리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온유하라고 강조했다(딤전 6:11, 딤후 2:24). 또한 바울에게는 겸손(고전 2:2, 3 ; 4:9-13 ; 딤전 1:15)과, 인내(딤후 4:7, 고후 11:23-27 ; 12:12)와 담대함(행 28:31)이 있었다. 주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면 겸손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담대함으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B. 참된 종교적 정서의 거짓된 표증

 

1. 강렬한 정서


종교적 정서가 강렬하다 하여 항상 참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기쁨의 경우 크게 기뻐해야 하고(마 5:12, 벧전 1:8, 빌 4:4, 시 71:23), 사랑의 경우 힘써 사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정서는 성격상 강렬하다. 그러나 강렬한 정서도 신령하지 않거나 구원의 은혜와 무관할 수 있다. 예컨대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 줄 것처럼 사랑이 강렬한 듯했고(갈 4:15),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으나 곧 시들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다(시 106:9-14).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를 위해 호산나 찬송하던 사람들이 며칠 안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크게 소리질렀다(마 21:9-10, 27:22-23).

 

 

2. 강렬한 신체적 반응


강렬한 신체적 반응들은 종교적 정서와 관련되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일이나 마귀의 역사에 의해 신체적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육체적으로 크게 떨거나(합 3:16, 시 119:120) 힘이 갑자기 빠지거나(단 10:8) 죽은 자처럼 되며(계 1:17) 소리를 크게 지르는 일이 있을 수 있다(시 84:2)(주의 : 성령으로 말미암으나 아직 도덕적 삶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악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몸이 상할 수도 있고(행 19:16),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막 1:26, 5:6, 9:26). 어떤 사람들은 충격적인 교통사고를 보고서도 기절하며 최면술에 걸려 쉽게 넘어지기도 한다.

 

 

3. 열정적 열변과 뜨거운 감정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신앙을 열변하다 하여 항상 신앙적으로 참된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마 23:2-3), 개종하기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대표적인 경우였다(행 22:3).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반드시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성령의 감동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할 수 있다(엡 1:17-20).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경험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한다(고전 1:27-29).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경험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일이 있다(히 6:4, 5, 9).

 

 

4. 성경에 대한 감정적 반응


성경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이 은혜로운 정서의 증거가 아닐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두려움, 소망, 기쁨, 슬픔 등을 체험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고 마귀의 속임수일 수 있다.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일 수 있다(벧후 3:16).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같은 마음도 처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므로 그 기쁨은 참된 것이 아니다(마 13:20, 21).

 

 

5. 멋진 사랑


사랑을 베푼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참된 종교적 정서의 증거는 결코 아니다. 마귀는 가장 좋은 성령의 은사를 위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랑을 베푸는 것은 종교적 정서들이 성령의 거룩케 하며 구원하는 은혜의 역사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여긴다. 이것은 사탄이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 본성이 원수 맺는 것과 사악 등으로 되어 있는 사탄의 경우,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랑은 참으로 기독교적임에 틀림없다고 속단한다. 물론 사랑은 성령의 은혜들 가운데 으뜸이요, 모든 참된 종교의 생명이자 본질이며 총합이다.

 

그러나 사탄은 사랑을 위조한다. 성령의 은혜들 가운데서 사랑과 겸손만큼 가짜가 많은 것은 없다. 종말에는 사랑이 식는다. 사랑하되 오래 지속적으로 하지 못한다. 사랑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마 24:12, 13).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바울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 같으나(갈 4:15), 그들을 위한 바울의 수고가 헛될 뻔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갈 4:10),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도 가짜가 있을 수 있다. 가짜 사랑이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일 수 있다.

 

 

6. 회심 체험


영적 각성과 양심의 뉘우침에 이어서,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누린다고 해서 다 성령으로부터 온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며 기쁨을 주시기 전에 광야의 고통을 당하게도 하시고(출 14:10-13, 신 8:2), 사망선고를 받은 것처럼 절망적이 되게 하기도 하신다(고후 1:8, 9). 아브라함의 경우, 큰 어두움으로 두려움에 떨게한 다음 달콤한 약속을 주셨다(창 15:12, 13).

 

그러나 양심의 가책과 공포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양심이 뉘우침을 갖게 될 때 지옥의 공포감을 갖기보다는 마음이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수가 있다(요 4:16-19, 28-29).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기질상 두려움과 공포감을 갖기도 한다. 또한 사탄도 하나님의 성령의 모든 구원활동과 은혜들을 위조할 수가 있다(예 : 사울왕의 경우, 삼상 24:16-17, 26:21). 회심 체험들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려면 시간이 경과되면서 좀더 지켜보아야 한다.

 

 

7. 헌신적 노력


참된 종교적 정서들은 그것을 위해 사용된 시간이나 노력에 반드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경 읽기, 기도, 찬송, 설교듣기 등에 시간을 많이 사용할수록 종교적 정서가 활발해진다. 예로 안나 여선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다(눅 2:37).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그렇게 했다(행 2:46, 47). 다윗도 아침, 낮, 저녁으로 힘써 기도했다(시 55:1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있는 제물이 하나님께 가증되기도 했다(사 1:12-15).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으며(눅 18:12), 거짓된 종교는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지키는데 열심을 내게 하기도 한다(사 58:2, 갤 33:31, 32).

 

 

8. 외형적 증거


외형적 증거들은 참된 종교적 정서들을 입증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사람의 눈에 보이는 대로, 또는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해서도 안된다(사 11:3). 누가 정말로 경건한 성도인지를 확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실루아노가 그리스도의 빼어난 종이었을 것이지만 '신실한 형제로 생각되는(supposed)'(벧전 5:12) 사람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된 정서와 거짓된 정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양과 염소, 즉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C. 거룩한 정서들의 두드러진 표증들

 

1. 정서의 원천 (성령)


'영성'이란 용어는 육체 또는 물질적 요소와 구별되는 사람의 영이나 혼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여 거룩하게 영향을 행사하여 감동 감화 인도 주장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들로 불리운다. 그리고 신령한 것으로 불리우는 일들은 성령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고전 2:13, 14, 롬 8:6, 9).

 

그리고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란 성령의 통상적인 감화를 가끔 경험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을 좇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체질화된 사람 곧 성령으로 그 생각과 삶이 항상 인도되고 주장되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갈 5:16, 25).

 

 

2. 정서의 표증 (성령의 내주와 거룩한 삶)


거룩한 정서의 첫 번째 표증은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참 성도에게 임하여 자기의 영구적인 거처로 삼아 그 안에 거하신다. 성령은 활동적이시어 성도들을 감동하시며 또한 그들을 성전 곧 거처로 삼아 그들 안에 내주하신다(고전 3:16, 고후 6:16, 요 14:17). 그러므로 성도들이란 그들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다(갈 2:20). 그리스도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사시는 것이다. 즉,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성령이 그들 안에서 생수의 강이 되어 넘쳐 흘러 영생을 누리게 한다(요 4:14, 7:38-39).

 

그리고 그들 안에 생명의 원리 곧 생수의 원천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 자신의 본성을 따라 거룩을 열매 맺는다. 즉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케 한다(히 12:10, 요일 1:3). 그러기에 성도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고후 5:15-17, 빌 3:3, 벧후 1:4).

 

 

3. 정서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


은혜의 정서의 기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령의 거룩하고 참된 은혜의 정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으뜸되는 목적으로 하며, 인간의 자아 중심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복으로 삼아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우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좋아한다(요일 4:19-21). 그리고 범사에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한다(살전 5:18, 참조 ; 롬 1:21-23).

 

 

4. 정서의 기초 (하나님을 즐거워함)


거룩한 정서의 기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즐거워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과 선하심은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으로 표현될 수 있고, 그의 권능과 지식과 지혜는 그의 위대하심으로 표현될 수 있는바, 그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즐거워하는데 거룩한 정서가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사 6:3, 요 12:41, 계 4:8, 15:4).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좋아한다(요 12:43).

 

 

5. 정서의 형성 (성경 말씀을 깨달음으로)


거룩한 종교적 정서는 마음이 성령으로 깨달음을 얻어 생겨난다. 거룩한 정서는 빛이 없는 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실제적인 지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에 정서가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의 정서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전에 이해하고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계시되어 있는 영광스런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되는 까닭이다. 더 확실하고 깊은 지식을 얻게 될 때 종교적 정서가 뜨거워진다. 신령한 지식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열어주고, 정서를 뜨겁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며(요일 4:7), 지식과 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더 풍성해진다(빌 1:9). 지식이 없는 열심은 헛된 것이다(롬 10:2).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하여 줄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듯이(눅 24:32), 거룩한 정서는 성령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비추어 줄 때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마 11:27).
그런데 신령한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데 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한다(벧전 1:15-16, 살전 4:3, 7-8). 한편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신비한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할 줄 알면서도 구원의 은혜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전 13:2).

 


성경을 바르게 그리고 신령하게 이해하려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뿐 아니라 성경의 깊은 의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참되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성령으로 마음 깊숙히 터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롬 10:10).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 얻는 지식은 성령의 비추임을 통하여 마음을 감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이 말한대로, 우리의 신앙은 지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기독교강요」Ⅲ.ⅱ.8).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첫째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그 다음에는 그 의무를 충실히 실천하도록 강력하게 이끄신다.

 

 

6. 정서의 확실성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함으로)


종교의 정서는 역사적 증거와 참된 확신에 있다.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확실하고도 충분하게 확신하는 자들이다(요 6:68-69).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데서 종교적 정서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참되고 신령한 믿음에서 난 정서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그 신령한 믿음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임재를 체험한다(요 16:27, 요일 4:15).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방도와,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예비해 놓으신 영광의 세계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데에서 오는 정서가 아니면 그것은 환각이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서 온다(고후 3:18, 4:3-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신적 영광을 보고 즐거워함으로써 우리의 정서가 뜨거워진다(요 1:14).


그러나 종교를 이해관계 때문에 믿는 자들은 아무리 뜨겁게 경험하고,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찬동하는 것 같을지라도 마침내는 불신앙과 무신론으로 빠지게 되기 때문에 참된 정서가 아니다.

 

 

7. 정서의 겸비성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보고서)


종교적 정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데 있다. 종교적 정서는 복음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의 궁핍을 인하여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까이하며 의지하는 겸손이 은혜로운 정서이다. 복음적 겸손은 외식적인 것과는 달리, 성령의 특별한 감화로부터 오는데,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어주고 단련시킴으로써 온다.

 

외식적인 겸손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율법의 엄격성 앞에서 압도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적 겸손은 거룩한 하나님을 높이고 추악한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다. 겸손은 자기를 부인하고(눅 18:9-14) 대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빌 2:3).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자기 자신이 더욱 작게 보이고 하나님은 크게 보인다. 자신의 겸손을 큰 소리로 자랑하지 않는다(참조, 슥 13:4, 사 58:5, 마 6:16).

 

 

8. 거룩한 정서의 특이점 : 성품의 변화 (그리스도를 닮음)


거룩한 정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거룩한 종교적 정서는 우리의 성품의 변화를 수반한다.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후 3:18).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품이 변화되는 회심을 경험한다(롬 12:1-2, 엡 4:22-24). 특별히,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양이나 비둘기처럼, 사랑과 온유와 고요함과 용서와 긍휼을 함양해야 한다(골 3:12-13, 갈 5:22-23, 마 11:28-29). 또한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견고하며 흔들림이 없이 인내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안다(딤후 2:3-4).

 

 

9. 균형있는 성장 (거룩한 불꽃처럼)


은혜로운 정서는 균형 감각을 갖되 활발하게 성장한다. 그리스도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처럼(요 1:14-16),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뒤집지 않은 호떡(빈대떡, 전병)과 같지 않다(호 7:8). 성도들에게는 거룩한 소망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 있으며(시 33:18, 147:11), 무서움과 기쁨이 함께 있으며(마 28:8), 성도들은 종교적인 교제와 담소를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 홀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한다(창 24:63, 요 6:15).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슬퍼할 줄 알 뿐 아니라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거짓된 사람들은 편애하며(마 5:46),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해 비판적이고,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실망하거나 포기한다(유 12, 13).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경건과 의 등 신령한 것들을 더욱더 사모하며 즐거워한다(사 33:6, 딤전 6:6).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들로는 삶이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벧전 2:2-3).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탈수록 더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것과 같다. 종교적 정서는 거룩한 불꽃처럼 한번 타오르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

 

 

10. 실천적 생활 영성 (거룩한 삶과 열심)

 

종교적 정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실천적이게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행실이 기독교적 원리들에 전적으로 일치한다. 둘째 거룩한 삶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셋째 죽을 때까지 꾸준하게 일관성 있게 거룩한 삶을 지속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정결케 하며 죄를 범하지 않고 의를 행한다(요일 3:3-8, 5:18).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선한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열심을 내야 한다(단 2:14, 빌 3:13, 히 6:11-12).

 

종교적 정서는 실제적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살아 계시고 성령이 내주하여 영혼의 기능들과 연합하여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은혜는 삶을 힘있게 하고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역사하며(고전 2:4) 그러기에 우리의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된다(살전 1:5).

 

우선 종교적 정서는 경건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딤후 3:5). 즉 세상을 이기며 사람의 정욕과 부패한 마음을 억제하고 많은 유혹과 난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길로 정진한다. 따라서 모든 거룩한 정서의 초석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아름다운 거룩성이다.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종교적 정서가 거룩성을 지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종교적 정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가 확실함을 확신하기 때문에 역경 중에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인내하며 경건하게 살기를 힘쓴다. 그리고 종교적 정서로 말미암아 심령이 변화된 까닭에 실제적인 삶에서도 철저한 변화가 따른다. 그래서 겸비하여진다. 그리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린다(살전 5:22).

 

종교적 정서는 그 자체가 열성과 활동성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체험하면 거룩한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이 은혜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것이요 참된 고백이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마 7:16-20).

 

 

11. 구원의 진실성을 위한 증거 : 실천


종교적 정서에서 나온 실천은 참된 종교에 있어서 구원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이다. 실천은 갑작스런 회심이나 신비한 경험, 감정적 위로보다 더 나은 구원의 증거이다. 첫째 참된 종교는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최우선 순위를 둔다. 즉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하나님 제일주의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나님이 좋아서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행동은 마음의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악한 삶을 살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갈 6:7, 욥 34:22).

 

둘째 참된 신앙의 진실성은 시련을 통해서 검증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을 낮추시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셨다(신 8:2).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인내케하고, 그 믿음이 정금처럼 단련되게 하신다(약 1:2-3, 벧전 1:6-7).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순종함으로 그의 참된 신앙을 입증하였다(창 22:12).

 

셋째 참된 종교는 실천을 통해 성숙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최상의 증거는 거룩한 실천이다. 신앙은 그 실천과 더불어 나타나고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온전케 된다(약 2:22).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실천하여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요일 2:4-5).
넷째 참된 종교의 최상의 시금석은 실천이다. 거룩한 실천이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진실성을 가늠하는데 제일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되고(요일 3:14) 이로써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확증되고 우리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게 서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은혜는 실천에서 증거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이다(요 14:15, 23, 요일 2:3-5, 3:24, 4:8, 12-13, 5:3).
여섯째 심판 날에 실천이 증거가 된다. 거룩한 실천의 증거가 심판날에 상급의 기준이 된다(롬 2:5). 실천은 회개의 증거요(마 3:8) 구원 얻는 믿음의 증거이며(약 2:21-24, 요삼 3) 그리스도의 임재의 증거이고(딤후 1:11)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며(시 116:12, 50:2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purpose)이다(행 20:35, 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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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귀중성과 그것을 아끼는 것의 중요성-조나단 에드워드

 


에베소서 5장 6절 “시간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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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유익함과

다른 사람들을 악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의 기회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대단한 가치를 가지며,

지혜로서 활용되어야만 한다.

 

 

1.왜 시간이 귀중한가

 

(i)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복락이

그것의 올바른 사용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귀중성은 그것의 중요성에 의존한다.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원한 불행을 피할수 있거나,

영원한 행복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

 

(ii)왜냐하면 시간은 짧기 때문이다

일용품은 부족할때에 가치가 올라간다.

시간은 적고, 짧다.

 

(iii)왜냐하면 시간이 계속 주어질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모른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여행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면

그는 그것들을 가치있게 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곧 끝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iv)왜냐하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찾을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은 잃은후에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한번 가면 다시 찾을수 없다.

회개해도 그것을 다시 얻을수 없다.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뒤로 지나가 버린다.

죽음이 오면 시간은 끝난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이다.

 


2.지나간 시간 사용에 대한 회상

 

  당신은 많은 것을 잃어왔다.

아마도 당신의 모레시계 속에는

몇 개의 모레 알갱이만 남아 있을수도 있다.

당신의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다.

 

어떻게 당신은 시간을 활용해 왔는가?

당신은 순간들, 날들을 해들을 헛되이 보내왔는가?

당신 인생의 날들을 판단해 보라.

매 순간이 귀중하다.

그러한 날들이 헛된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시간을 주셨다.

만약 그가 그것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당신의 젊음, 여가, 주일날들에 무엇을 해 왔는가?

당신의 양심이 답하게 하라.

 


3.시간 남용자를 향한 질책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시간은 솔로몬의 은과 같이 가치가 없다.

돈을 하찮은 것이라 하여 던져 버리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돈보다 더 귀중한 시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낭비된다.

당신이 가진 것을 낭비하면

줄 것을 아무 것도 가질수 없을 것이다.

 

(i)게으른 자들

 

  나태한 자들은

몸이나 영혼, 가족들, 이웃들,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선도 행치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은 술과 사회생활,

무익한 잡담을 위하여 허비하는 장애물이다.

 

(ii)악인들

 

  그들은 악한 목적,

즉 그들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헐뜯으면서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마시고 흥청거리며, 잡담하고 깨끗지 못한 일을 행하며,

나쁜 동무를 사귀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으로 이끌며,

영혼들에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킨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허비한 시간들을 후회할 것이고,

행하였던 나쁜 일들을 되돌리기 위하여 크게 힘 쓰야만 할 것이다.

시간을 잘못 사용하여 후회하면서 사는 것보다

어떠한 시간도 가지지 않는 것이 더 낫다.

 

(iii)세상적인 사람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이윤을 얻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혼을 잃으면, 시간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이기적인 사용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다면 당신이 얻은 어떠한 것도

당신에게 유익되지 못할 것이다.

 


4.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가. 

 

(i)시간에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시간은 달란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끝날에 그는 우리를 불러서 회계하라고 할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시간을 사용했는지를 물을 것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사용해 왔는지를 생각하라.

 

(ii)당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라

 

  남아 있는 시간들을 올바로 사용하라.

잃어버린 시간들을 구속하라(redeem).

허비한 시간에 비추어보아,

그것의 사용에 더욱 근면하라.

 

왜냐하면,

   (a)당신의 기회는 더욱 더 짧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당신이 잃어버린 해들을 생각할때에,

인생은 더욱 짧다.

그리고 기회들은 더욱 없다.

 

   (b)당신의 일은 더욱 더 크다.

      당신은 더 적은 시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회개의 그 일은 동일하다.

시간을 허비함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을 도모해 왔다.

모든 힘을 다하여 이제 회개하라.

 

   (c)당신은 당신의 시간중에서 최상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지나간 어린 시절들이 가장 최상의 것들이다.

젊음을 죄악가운데 살아온 것은

일생의 가장 최상의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말라.

사단은 젊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그들에게 여전히 시간이 있음을 말하고,

말년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늦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만약에 당신이 진지하다면 회개하게 하실 것이다.

 

(iii)몇 몇 사람들은 죽을때에 시간을 귀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있는 죄인들은

시간의 귀중성을 보며,

일초의 시간을 위하여 부르짖는다.

당신이 눈이 멀었고,

속고 있기에 그들이 죽음의 때에

깨닫게 되는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iv)이미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시간에 두는 가치를 생각해 보라

 

   저주받은 자들은 영생 얻을수 있는 기회를

다시 가지는 시간을 갈망한다.

당신은 동일한 갈망을 가지는가?

                       

 

 

        적용

1.지체없이 귀중한 시간을 활용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당신에게 시간이 어떠한 가치도 없음을 증명한다.

 

2.가장 귀중한 시간의 부분들을 활용하라

  일반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에 거룩한 시간도 있다.

당신의 주일을 활용하라.

특별히 공예배를 활용하라.

거룩한 의식아래서 부주의 하지 말라.

당신의 젊음을 올바로 사용하라.

당신과 함께 애쓰시는 성령의 시간을 가치있게 하라.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가까우시며,

그 시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3.당신의 여가시간을 활용하라

  모든 사람은 얼마간의 여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당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라.

여가는 세속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종속된다.

시간이 더 이상 없을 그 날을 생각하며,

당신의 모든 달란트와 장점

그리고 기회들을 최대로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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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 -죠나단 에드워드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Edwards)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편만하면서도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이 문을 통해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심히 바라는

신자의 마음에 들어 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이 통로를 통해 마음을 검게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 손잡이를 이용해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끔 만든다.

 

 

이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너무나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다.

 

 

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린다는 것이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층을 마음 속에 이룬다

- 한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영적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궁구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의 비꼬는 태도이며,

수많은 신자들의 거룩함에 반대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한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됨과 천함에 대해 압도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하고

표정과 행동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비록 자신의 세상에서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지만

홀로 천국을 향해 걸어 간다.

온 세상이 그를 저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

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나중이 되려하며,

양보하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는다.

 

--- '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대한 소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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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부흥과 대각성 관련 저술 강독회

출처:http://jonathanedwards.cyworld.com                            

 

                
      에드워즈가 부흥과 영적 대각성에 대하여 쓴 글들 강독회를 시작하면서

 

   양낙흥 교수의 지적처럼 1737년에서 1746년에 출판된 에드워즈의 저술들은 주로 부흥과 대각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술들을 통하여서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참된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를 배울수가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실로 개혁교회가 배출한 최상의 체험신학자요 부흥신학자였습니다. 어차피 누군가의 어깨위에 서서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이왕에 소인보다는 대인의 어깨위에 올라서는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꺼이 에드워즈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겸손히 배우고자 합니다.

 2002년 아뻘도른 신학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연구로 박사를 받은 W. 판 플라스따윈(W. Vlastuin)박사는 부흥과 영적 대각성에 관련된 에드워즈의 저술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분석을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주제에 관련된 저서들을 다음과 같습니다.

1.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 대각성의 모델

2. [사랑과 그 열매] - 대각성에 머무르기(het blijven bij opwekking)

3. [구속 사역의 역사] - 대각성의 기대

4.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 대각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

5. [균형잡힌 부흥론] - 대각성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분석

6. [신앙감정론] - 개인적인 대각성분석(de persoonlijke opwekkings-         analyse)

7. [기도합주회] - 대각성을 위한 기도

8.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 대각성의 표본

9. [겸허한 질의] - 대각성속에서 하나의 개혁(een reformatie in

   opwekking)

 우리는 이상의 저서들 중에서 이미 6번 [신앙감정론]은 강독했고, 그리고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3번과 9번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같이 다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상의 저서들 외에도 에드워즈가 부흥 기간 동안에 강론했던 내용인 [이신칭의론]도 읽고자 합니다.

 


                      2005년 8월 22(월)

                                    박사리에서 이상웅 목사 씁니다.

                    * 코네티컷 밸리 주요 마을

 

 

● 2005년 8월 29일(월) 오전 10시 박사교회당

 


1.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양낙흥역(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2)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WY. 4:9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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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본서의 역사적인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매사추세츠주의 궁벽진 마을 노샘프턴에서 목회한 기간은 1727년에서 1750년까지 총 23년간이다. 노샘프턴 사역 기간 동안 에드워즈와 그의 교회는 두 번에 걸쳐서 성령의 부어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을 체험하였다. 에드워즈 이전에도 부흥(revival)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어주심 혹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1734년에 시작되어 1735년에 이르기까지 노샘프턴 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서 이 성령의 역사는 요원의 불길처럼 코네티컷 강 계곡에 소재한 마을들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성령의 부어주심은 1740년에 시작하여 1742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이른바 <1차 대각성 운동>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영국의 순회 설교자 조지 윗필드의 뉴잉글랜드 순회 설교가 큰 도구 역할을 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에드워즈가 사역하던 노샘프턴 교회는 영적 메마름과 둔감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청교도적 영성과 도덕성이 해이해져가고 있었다. 솔로몬 스토다드 시절에도 다섯 차례나 영혼의 추수기(스토다드는 영혼의 추수 the harvest of souls라는 표현을 즐겨 씀)를 가졌지만, 에드워즈 부임 초기에는 아른한 옛 추억이 되고 있었다. 청년들은 밤에 술집에 모여들고 음담패설을 즐기고 있었다. 교회에 성도들이 참석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열정이 없었다. 그와 같은 영적인 황무지에 갑자기 성령의 부어주심, 부흥이 임한 것이다. 1734년 봄에 젊은 청년과 갓 결혼한 여자 성도가 요절한 것이 마을 청년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734년에서 1735년에 걸쳐 진행된 노샘프턴 부흥 기간 동안 에드워즈는 반 알미니안주의적인 설교들을 강단에서 선포하였다. “이신칭의론”(WY19:143-242), “하나님 나라에로 침노해 들어감”(WY19:302-320), “룻의 결단”(WY19:336-378),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WY19:339-378),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WY19:563-594)등이 노샘프턴 강단에서 선포된 대표적 대각성 설교이다.1)

   노샘프턴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자 부흥은 노샘프턴을 넘어 햄프셔 군 전체로 확산되어갔고,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의 다른 지역들로 번져나갔다. 그것이 주로 코네티컷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사가들은 “코네티컷 강 골짜기 부흥”이라고 불렀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한 부흥을 교회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라고 불렀다. 보스턴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코네티컷 강 골짜기에 소재한 교회들에서 이어난 이 부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설왕설래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보고서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한글 번역본으로 읽는 것은 에드워즈가 작성한 보고서의 최종 형태이지만, 에드워즈는 이미 1735년 5월 30일자로 첫 보고서를 쓰고 있다.   

  C. C. Goen 교수가 편집한 The Great Awakening,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vol.4(New Haven and London:Yale University Press,1972)에는 에드워즈가 쓴 여러 형태의 보고서와 추천인들의 글을 시기순으로 모아놓고 있다:

  1) 에드워즈가 1735년 5월 30일자로 보스턴의 벤자민 콜맨 목사에게 쓴 최초의 보고서(WY4: 99-110). 이 서신의 추기는 6월 3일자로 되어있는데, 에드워즈는 이모부 조셉 홀리의 자살에 대한 소식을 쓰고 있다. 

  2) 1736년 11월에 벤자민 콜맨 목사가 요약한 것(WY4:112-127). 에드워즈는 벤자민 콜맨 목사의 요청으로 1736년 11월 6일자로 이전의 편지보다 확장된 형태의 부흥 보고서를 작성하게된다. 콜맨 목사는 에드워즈의 보고서를 요약(abridgment) 형태로 윌리엄 윌리엄스의 The Duty and Interest of a People의 부록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쓴 노샘프턴 부흥보고서의 첫 인쇄본인 셈이다.   

  3) 1737년 런던에서 간행된 초판 서문(WY4:130-137). 에드워즈의 보고서는 영국 런던의 아이작 왓츠 목사(I. Watts)와 존 가이즈(John Gyuse) 목사의 주목을 끌었다. 이 두 사람의 후원하에 에드워즈의 글은 런던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된다. 1737년 10월 12일자로 왓츠와 가이wm는 서문을 쓰는 가운데 1737년 3월 19일자로 쓴 에드워즈의 편지를 삽입하고 있다. 런던에서 간행된 이 판본으로 인하여 뉴잉글랜드 변방 노샘프턴에서 목회하고 있던 에드워즈 목사는 영국에 까지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그러나 문제는 이 판본의 경우 두 편집자가 자유자재로 편집을 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4) 1738년 보스턴에서 간행된 제삼판 교정본. 왓츠와 가이즈판은 오류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1738년에 이르러 2판을 발행하게 된다.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서 교정본(a corrected version)을 출간하게 된다. 앞서 간행된 것을 포함해서 제3판이 되는 이 인쇄본 서문에는 네 사람의 보스턴 목사들(Josheph Sewall, Thomas Prince, John Webb, William Cooper)등이 쓴 서문(WY4:138-142)과 햄프셔 주에서 목회하는 여섯 명의 목회자들의 증언(WY4:143)이 수록되어있다.

   에드워즈가 쓴 부흥 보고서의 타이틀도 약간의 변화를 겪는 것을 보게 된다. 1736년 11월에 간행된 콜맨 목사의 요약본의 경우 Part of a large Letter of from the Rev. Mr. Jonathan Edwards of Northampton. Giving and Account of the late wonderful Work of God in those Parts(WY4:110에 복사된 표지)인데, 1737년 런던에서 간행된 초판의 경우와 1738년 보스턴에서 간행된 삼판의 경우에는 제목이 다음과 같이 확정되어 나타난다.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hampton and the Neighbouring Towns and Villages of Hampshire in New-England(WY4:128. 보스턴판의 경우 부제의 뒷부분이 약간 다르다. . .and Villages of the County of Hampshire, in the Province of the Massachusetts-Bay in New England. WY:129표지 복사본).

   앞서 말한대로 왓츠 목사와 가이wm 목사가 이 보고서를 런던에서 출판해주는 바람에 에드워즈의 명성은 대서양을 넘어 영국에 까지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은 책자는 에드워즈와 같은 해에 출생하여 후일 영국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 목사의 손에도 들어가게 된다. 존 웨슬리 목사는 1738년 10월 9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옥스퍼드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회심들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서술을 읽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노샘프턴과 그 인근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참으로 이는 주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Surely this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양낙흥 교수는 본서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는데, 본문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기에 앞서 눈여겨 보고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2)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에는 단 몇 개월 사이에 영적 각성이 온 마을을 뒤덮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결과 약 300명의 사람들이 회심의 은헤를 체험하게 되었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에드워즈의 현미경적 관찰력이다. 이미 젊은 시절에 거미의 생태를 관찰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었던 꼼꼼한 주의력의 소유자답게 에드워즈는 자기 교구에서 일어난 그 각성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과정을 무서울 만큼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정신이 얼마나 맑고 안정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강독 텍스트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부흥 보고서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I. 새 각성이 시작되다, II. 각성된 자들의 반응, III. 두 특기할 만한 회심자들의 반응, IV. 결론적 고찰. 이와 같은 구분은 에드워즈가 직접 한 것은 아니고, WY4의 편집자인 C. C. Goen 교수가 한 것이다. I. A New Awakening Begins, II. Responses of the Awakened, III. Two Notable Converts, IV. Concluding Observations.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유익한 구조 분석을 기본 틀로 하고서 에드워즈의 본문을 살펴 보고자 한다.

 


시작하는 글(43-44)

 


   에드워즈는 최근에 일어난 부흥의 사건을 “경이로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요청과 제안에 의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공정하고 신실하게” 부흥 보고서를 작성하고자 펜을 들었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속한 햄프셔 군민들은 대체로 건실하고 규모있고 선량한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군민들의 신앙심과 기강, 교리적 순수성은 하나님 아래 외조부 스토다드 목사의 뛰어난 역량과 탁월한 경건덕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는 60여년이나 노샘프턴의 목회자로 시무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코네티컷 골짜기의 교황’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에드워즈의 말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군(county)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자신의 목회지인 노샘프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노샘프턴은 약 82년된 동네이고, 주민은 약 200가구쯤 되며 밀집해서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보다 더 이성적이고 이해력있는 집단이다. 그들은 본디부터 신앙심으로 유명했고, 마음의 종교 및 기독교 체험에 관계된 지식으로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에드워즈 앞서 두 사람의 목회자가 시무했다. 노샘프턴의 최초 목사는 엘르아자르 매더(Eleazar Mather 1661년 7월 임직-1669년 7월 소천) 이다. 요절한 매더를 이어서 2대 목사가 된 사람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69-1729시무)목사이다. 스토다드는 매더 목사의 미망인 에스더와 결혼하였다. 스토다드 목사의 60여년 목회 기간 동안에 노샘프턴은 다섯 차례나 영혼의 추수기를 경험하였다(에드워즈가 글쓰는 시점에서 57년전, 53년전, 40년전, 24년전, 18년전). 에드워즈가 외조부의 사역을 돕는 부목사로 부임한 1727년 경에도 약간의 은혜의 역사는 있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각성의 수준에는 못 미치고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 어느때 보다도 방만해지는 시기였다.

 

 

 

I. 새 각성이 시작되다(45-57)  

 


1. 발단          

  1733년 말경 에드워즈는 젊은이들에게 저녁 강의후에 자기들끼리 어울려 떠들고 즐기는 관례에 대해서 자제하라고 권면한적이 있는데, 보통 때와는 달리 고분고분하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교구에 속한 패스코막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얼마간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노샘프턴의 본격적인 영적 각성은 1734년 4월에 시작된다. 한 청년이 꽃다운 나이에 급성 늑막염으로 죽고 한 젊은 기혼 여성이 사망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영적으로 심각해졌고, 종교적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46). 그리고 1734년 가을 에드워즈는 젊은이들에게 목요강좌가 마친후에 몇 그룹으로 나누어 모일 것을 권했고 젊은이들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2. Arminius주의와 이신칭의 설교

  그 무렵 그 지역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인하여 잡음이 일어났다. 우려와는 달리 그 문제는 신앙의 증진을 위해 역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 택해야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문의하는 노샘프턴 주민들에게 에드워즈는 목요강좌 시간에 이신칭의 강론을 하였다.3) 이 강론은 시의적절한 가르침으로 판명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영혼에 아주 괄목할만한 하늘의 축복이 명백히 임했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으로 인해 그들은 논쟁중인 문제의 핵심에 관해 전체적인 만족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고 복음의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더욱 진지하게 찾게 되었다(47).

 


3. 회심의 시작

  1734년 12월 후반에 하나님의 영이 더 비상하게 임하셔서 그들 중에 역사하기 시작했다. 아주 갑자기 한 사람 한 사람씩 대여섯 사람이 어느모로 보나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얻었다. 그들 중에 한 사교성이 풍부한 한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임하여 새로운 마음, 참으로 깨어지고 거룩해진 마음을 주셨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4. 다른 교인들에 대한 파급

  앞서 말한 역사는 영광스러웠지만 에드워즈는 미칠 나쁜 영향에 대한 우려를 가졌다. 하지만 결과는 경이로울 만큼 정반대로 판명되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을에서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중 가장 큰 각성의 계기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온 마을에 걸쳐 젊은이들과 기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의 전광석화처럼 퍼졌다. 진지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크게 각성했다(48).

 


5. 부흥

  그 일이 있은 직후 마을 전체에서 남녀 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종교의 위대한 일들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크고도 엄숙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나기만 하면 주민들은 종교적인 일외에는 대화거리를 삼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신기할 만큼 멀어져서 세상일은 아주 사소하게 여기고 의무감에 의해서 했을 뿐이다. 그들의 염두에는 오직 하늘 나라를 얻는 것이었다. 모두가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 자기 영혼을 위한 기회를 열심히 포착하려 했다. 종교적 목적을 위해 개인 집에서 아주 자주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영원한 세계의 위대한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남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허영심이 많고 허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체험적이고 생명력있는 신앙에 대해 가장 함부로 생각하고 말하던 자들이 이제 일반적으로 가장 커다란 각성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혼들이 집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몰려왔고 그들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찬양하였다(49).

  에드워즈에 의하면 1735년 봄과 여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온 동네에 가득해 보였다. 마을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그러면서도 고뇌로 가득찬 적은 없었다고 한다. 거의 집집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놀라운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임한 구원으로 인한 기쁨의 시기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주의 날 모이기를 힘쓰고, 공중 예배는 아름다웠고 회중은 예배드릴때 생기로 넘쳤다. 성도들은 목사의 전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해서 들었고, 고뇌로 울기도 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울기도 했다. 공중 찬양도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전에 없던 넘치는 마음과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찬양은 실로 즐거운 일이 되었다”(50). 평일에도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영적인 일에 대해서 대화했다. 심지어 먹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예사인던 결혼식에 모여서 조차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6. 주변 마을의 반응

  1734년 겨울 동안 주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비웃거나 조롱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양심에 찔림을 받고 각성되어 상한 심령을 안고 돌아갔다. 방문이나 사업차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분명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이곳에 내려주신 신적 축복의 소나기에 참여했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군 내의 다른 여러 마을들에도 같은 역사가 뚜렷하게 일어나 가득하게 되었다(51).

 


7. 군(cointy)내 다른 마을들로의 파급.

  에드워즈는 여러 마을들이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웃 마을들에 불을 지핀 것이다. 노샘프턴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일에 쓰임받는 것을 보고 더욱더 힘을 얻고 열심을 내게 되었다.

 


8. 코네티컷 주 전체로 파급

  성령의 부으심은 에드워즈가 속한 햄프셔 군 뿐 아니라 코네티컷 주의 많은 지역에도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시무하고 있던 이스트 윈저에도 역사가 일어났다(52-4).


9. 뉴저지의 부흥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는 뉴잉글랜드 지역을 벗어나 남쪽에 있던 뉴저지 지역에도 임하였다. 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넨트가 목회하던 뉴저지 지역에도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10. 여러모로 보나 비범한 부흥

  에드워즈는 앞서 기술한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비범성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였다(54-57).

첫째, 보편성에 있어 비상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전의 부흥들이 주로 젊은이들과 여자들 사이에 국한되었던 반면, 노샘프턴 교회의 부흥에서는 마을의 16세 이상의 젊은이들 절대 다수가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중년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변화되었다.

둘째, 회심자들의 수에 있어서 비상했다. 부흥 후 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수는 620명에 달하게 되었다. 600명이라는 수는 노샘프턴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부흥시기에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떼를 지어 교회에 몰려왔다. 반년 동안에 약 300명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얻었다고 보고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속도에 있어서 비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안에서 성령은 아주 신속하게 역사하셨다. 성령의 역사가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 이번 부흥에서 사람들은 아주 빨리, 크게 변화되었다.

넷째, 성령의 영향의 정도가 비상했다. 즉 각성의 깨달음, 구원의 체험의 정도와 범위가 비상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보고에 따르면 노샘프턴 부흥의 절정은 1735년 3월과 4월이다. “이 마을에서 성령의 역사의 절정은 이른 봄 즉 삼월과 사월이었다. 이 무렵에는 우리 중에서 대개 하루에 네 영혼, 일 주일에 거의 삼십명이 회심하는 일이 대여섯 주간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그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는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축복을 다 사용해서 일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역이 단 하루 이틀만에 완수되었다”(57).  

 

 

 

II. 각성된 자들의 반응(58-97)  

 


  에드워즈는 두 번째 부분에서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상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있음과 동시에 많은 점에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음도 인정한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번역자 양낙흥 교수의 요약문을 거의 대부분 옮겨적는다.4)

 


1. 회심의 과정에 대한 관찰

  회심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각성이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비차만 존재인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각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이 멸망할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멸망을 피해 신속히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 현상이다. 각성의 속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갑작스럽게, 어떤 이들은 서서히 각성되었다. 양심에 갑작스런 찔림을 얻은 자들은 마치 심장을 화살이 꿰뚫은 것처럼 되었다. 점진적인 각성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먼저 이전보다 신중해지고 그 후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 후 각성이 심화되면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각성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즉각 죄악과 방종을 jfl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툼, 중상,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일을 즉시 중지했다. 술집은 비고 대신 목사관이 붐비게 되었다. 또 다른 결과는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경 읽기, 기도, 묵상, 예배 참석, 소그룹 모임에 큰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처음 구원을 찾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는지, 죄악 중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2. 준비 과정의 다양성

  각성 상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괴로움의 정도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진행했고, 어떤 이들은 저주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그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점점 더 증가되었다. 에드워즈는 각성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회심과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아주 신속히 회심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회심의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함에 있어 그는 그 전의 청교도들 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매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보였다. 심지어 청교도들에 의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거의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라 여겨졌던 죄에 대한 개달음 조차도 에드워즈는 그것이 회심 전에 그리 깊지 않다 하더라도 회심 후에 훨씬 더 깊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들이 체험하는 구원의 은헤의 크기가 그들이 회심전에 경험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꼭 비례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지적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그리 분명치 않았던 어떤 사람들이 후에 누구 못지 않게 분명한 은혜를 체험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죄에 대한 율법적 깨달음 아래 있는 동안 가장 큰 두려움을 가졌던 자들이 항상 가장 큰 빛과 위로를 얻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그런 사람들이 항상 갑작스러운 빛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회심의 때에 관한 한은 그러한 자들이 대개 가장 잘 인지하고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사람들이 고통 아래 있는 시간, 즉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는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어떤이들은 불과 며칠이 소요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렸으며 심지어 수십년이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철저히 각성되지는 못했지만 자기 영혼의 상태가 양호한 것이라는 아무런 위안되는 증거를 얻지 못해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구원에 대해 염려하면서 그것을 위해 상당한 수고를 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정당한 이유를 가진 두려움들 외에 때로는 불필요한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것은 사탄이 그들을 혼란시킨 결과였다. 때로는 병적인 우울증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그것만큼 사탄이 즐겨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고 에드워즈는 탄식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비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부흥들에 비하면 1735년의 부흥시에는 사탄의 역사가 훨씬 적었다고 에드워즈는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는 크게 각성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각성되지 않은 강퍅한 심령이라고 자책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그것은 그들의 각성이 깊어질수록 더했다. 때로 위험한 절망의 언저리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하에서 죄책감으로 울부짖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에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 전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극단에 속한 경우들이었고 보편적으로는 공포가 그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3.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각성된 죄인들은 점차 자신의 죄를 확실히 그리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의 사악함과 죄악됨, 그들의 불충분한 의와 오염,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죄악들에 집중되었지만, 그 후에는 내적 죄, 즉 마음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더 강해졌다. 그들의 부패한 본성, 교만, 불신등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오염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깨끗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각성의 초기 단계, 즉 옛날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흔히 자기 힘으로 의를 세우려는 율법적 노력에 호소했다. 엄격한 생활, 죄의 자백, 종교적 의무 이행등으로 하나님을 달래고 자기 죄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패가 거듭되는 만큼 실망도 거듭된다. 때로 그들은 그러한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위로가 주어지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반감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죄에 대한 깨달음의 상태는 계속되었다. 때로, 그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여 절망 중에 자포자기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때에 도움이 된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해 과거에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복음적 내용이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메시지도 처음부터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만일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낳기 위해 처음에는 복음의 선포를 미루고 단지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메시지만을 전한다면, 절망에 빠질 죄인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성아래 놓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완전 충족하신 자비에 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주 격려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었다. 결국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는 율법의 말씀과 은혜의 말씀이 골고루 섞인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각성과 격려, 두려움과 소망이 적절히 혼합되어야 해이와 태만, 그리고 결국에는 무관심을 낳는 두 극단인 자만심과 낙심 사이에 중요이 유지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단계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자신들이 너무 사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들을 용납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신들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보려는 율법적 시도를 거듭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당신은 자기 힘과 의를 너무 의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포장만 바꾼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자기 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무 긍정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한밤중처럼 캄캄해 보인다. 마침내, 그들은 힘이 진하고 상한 마음이 되며 율법적 겸비함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전적 무능과 불춘붕성을 확실히 깨우쳐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노력을 쏟는 시행 착오를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에드워즈는 주목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구원의 서정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반복되는 무익한 시도들의 끝에 자신들의 율법적 노력의 무가치함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 후에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없이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허망한 자기 신뢰를 극복하고 진토에까지 낮아져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길이라는 말이다.

 


4. 겸비해짐

  각성이 구원의 체험으로 연결되는 경우 율법적 고통 후에 죄인들이 깨닫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청교도적 용어로 소위 겸비해짐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눈물이 그들의 가장 작은 죄조차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음과 생활이 너무나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을 본다고 말했다. 그들은 설령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이며, 그의 정의로우심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저주받고자 하는 마음(a willingness to be damned) 이라고 불렀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대개 값었고 충족한 은혜를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님의 정당성을 발견하기 직전까지 대개 아주 초조해 하던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에 고요와 평안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은혜를 받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발 아래 누워 그의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청교도들의 용어로 소위 준비된 마음(prepared heart)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고요함이 얼마간 계속되다가 드디어 어떤 특별하고 즐거운 현현이 그들의 영혼에 이루어진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하고 있다. 아주 종종 자비하신 하나님, 충족하신 구속자, 혹은 복음의 이 위대하고 즐거운 일들에 대한 어떤 위로를 주는 달콤한 전망이 즉각, 혹은 금방 뒤따랐다.

 


5. 드디어 은혜를 체험함

  율법적으로 겸비해진 사람들에게 은혜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은 아주 다양했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자기 앞 시대의 청교도들과 견해가 달랐다. 앞 시대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어떤 특정한 단계나 방법들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의 규범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무한한 다양성 중 일부를 소개한다. 어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갈망은 신적인 것들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그것을 자신의 최고의 행복과 최선의 분깃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선한 것을 영원히 추구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러한 체험이 시작될 때는 대개 다른 경험들과 발견들이 즉시 뒤따라왔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한다. 그것은 아주 다양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 그리스도가 마음에 부각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그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을 줄 곧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충족성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또 어떤 이들은 그 분의 진실하심과 신실성을 보았다. 어떤 이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은 복음이 전체적으로 진리이며 확실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약속의 진실성이 그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진실한 초청이 그들 마음에 나타나는 체험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특별한 성구가 마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위로했고 때로는 은혜로운 초청과 약속에 관한 여러 성구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씩 떠올라 영혼에 점점 더 큰 만족을 주었다. 그러한 성구들은 그들의 처지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위로는 어떤 때는 성경을 읽고 있는 중에,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일반 서적을 읽고 있는 중이나 묵상중에 주어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목숨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사랑 혹은 속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보혈의 충족성과 귀중함이 부딪혀왔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우심의 가치와 영광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에 사로잡혔다. 혹자는 그리스도가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법이 탁월하다는 것과 그것의 적합성에 대한 생각이 다가왔다. 그러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항상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6.  은혜 받은 자들의 반응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다. 어떤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큰 감사를 표현했다. 이들은 가지들이 누리게 된 영혼의 그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의 탁월성에 경탄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상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잡되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동안 그들은 식사도 잊어버렸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즐거워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탁월성에 대해 가장 주의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황홀한 감각이 거기에 동반되었다. 이러한 은혜 체험을 묘사하는 단어들도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았다(sight)고 했고, 어떤 이들은 발견했다(discovery)고 표현했다. 어떤이들은 그것을 실감케 하는 확실한 깨달음(realizing conviction) 혹은 마음의 생생한 혹은 느껴지는 감각(lively or feeling sense of heart)이라고 묘사했다.

 


7. 회심되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자들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의 거룩한 평정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아직 회심되었다고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영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영접임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한 구원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달콤한 만족이야말로 그 자비를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비를 추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 발 아래서 그의 자비를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겨울 나무 혹은 딱딱한 흙 밑에 눌려있는 봄의 씨앗이라고 비유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애처롭게도 자신들의 마음에 생겨난 위로와 은혜로운 감정들을 억누르고 제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자기 마음 속에 생겨난 그러한 감정들이 보편적 조명이나 순간적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그들은 자기들이 혹 그릇된 소망을 품고 있다가 영원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지도를 받아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은혜로운 성향이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띠었다. 마치 따뜻한 봄볕이 씨앗을 움틔우는 것처럼 이제 자유롭게 된 은혜가 넘쳐 흘러나와 그들에게 풍성한 만족의 원천으로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심체험에 관련된 다양성은 회심의 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났다. 은혜의 최초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정확한 시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각을 쉽게 식별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 정확한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회심 날짜를 잘못 알고 있다. 그 이유는 회심의 체험의 양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최초로 체험할 때 그것은 자주 빛의 비췸으로 나타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어떤 사람을 회심시키는 빛은 그의 주위를 온통 갑자기 비추는 영광스러운 광채와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침이 밝아오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약간의 빛만 나타나지만 점점 더 그 빛이 증가한다. 이따금 어두움이 드리우지만 결국은 구름을 뚫고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에 대한 에드워즈의 묘사는 문자 그대로 극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주목하게 한다.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한 극단적 공포 후에 죄인들이 감지하는 최초의 변화는 종종 고요함이었다. 그런 다음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칠흑같은 어두움 후에 처음에는 가물거리는 빛이, 그리고 한두 마디의 위로의 말씀이 부드럽게 그들에게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달콤함과 구주의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지각을 가지게 된다. 그 때 공포와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무가치함에 대한 겸손하고 온유한 감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성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에는 빛이 더욱 강력하고 분명하게 들어온다”(81).

  청교도 목회하에서 회심의 은혜 체험은 대개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확신을 가져왔다고 에드워즈는 기억한다. 기독교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사람들 앞에 제시되는 순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시각과 미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때의 그들은 복음의 교리들의 진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마치 그들이 환한 대낮에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볼때 그 강한 햇살로 인해 태양의 존재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아주 분명한 성령의 역사들과 신성의 강력한 증거들을 직관적으로 보고 직접적으로 느꼈다. 이 직관적 시각과 감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체험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머리 지식 혹은 관념적 사변적 지식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이제 복음의 진실성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남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이상해했다.

 


8. 은혜 체험후의 변화된 모습들

  회심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이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설교가 새롭게 들린다. 성경이 새로운 책인 것 같다. 거기서 새로운 빛을 보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같은 이야기에 대해 읽을 때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제야 비로서 그것을 실재적인 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느라고 몰두한다. 어떤 이들은 무모와 세상 전부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가련하고 비참하며 무가치한 존재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식에 압도당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과거에는 모두 너무나 냉정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던 식으로든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충만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겼다. 그들은 대개 하나님 앞에 낮게 엎드려 재 속에 처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표현했다. 그들이 진토 속에서 낮아져 자신을 비웠을 때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을 그들은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켰을 때 그들은 만족스러운 안식을 가장 많이 즐겼다.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성경만큼 즐거워한 책은 없었다. 그리고 주일만큼 귀히 여김을 받는 시간도 없었다. 예배당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곳도 없었다. 회심자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놀라운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그들에게 가장 불친절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러해??. 사람들은 남에게 끼친 해악을 고백하고 보상하는 데 열심이었다. 회심자들은 다른 영혼들의 회심에 대해 지극한 소원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가장 미미한 동료 인간이나 가장 악한 원수들의 회심을 위해 자기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9. 회심된 자들에게 남아있는 부패

  이처럼 놀라운 영적 변화와 감격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심된 자들 중에 구원의 확신이 너무 강해서 자기 점검이 불필요할 정도였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회심된 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진 가장 큰 원인은 그들 마음 속에 남아있는 너무나 많은 부패 때문이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할 때 온통 생기로 가득했던 영혼이 차츰 둔감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교만, 시기, 원한, 복수심 등 아직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세상적 성향을 발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모두 헛것이며 자기들은 위선자일 뿐 이라고 결론 짓게 한다. 그들은 자기의 강퍅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성령의 영향이 회복되어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이 되살아나면 의심과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사람들이 영적 무기력과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종종 종교적 대화였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신앙적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영혼이 넘치는 기쁨으로 거룩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다.5)   

 


10. 에드워즈 교회의 부흥에 대한 주변의 반응

  이러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노샘프턴 교회 신자들과 에드워즈는 외부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는 뉴잉글랜드 대부분 지역들이 노샘프턴을 비롯한 코네테컷 골짜기 부흥에 대해 비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 부흥에 대해 시기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불평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퀘이커 교도들과 유사하다고 비난했고, 어떤 경우에는 종말론과 관련해 오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샘프턴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영적 체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에드워즈의 변명에 의하면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의 결과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일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그 문제를 대화의 소재로 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진술하는 이 역사가 과거의 부흥들의 연장 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부흥은 자신의 전임자인 스토다드의 목회아래서도 몇 번 일어났다. 그때 역사했던 것과 동일한 영이 이번에도 역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의 비범성 뿐이라는 것이었다. “전에 회심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에 같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의 갱신시키고 강화하고 세워주시는 영향을 받았다(And God's people that were formerly converted, have now partook of the same shower of divine blessing in the renewing, strengthening, edifying influences of the Spirit of God)”(96).

 

 

 

III. 두 특기할만한 회심자들의 예(98-115)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부흥중의 성령의 역사의 성격과 방법을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두 특별한 예를 상술한다. 성인으로 아비가일 허친슨(Abigail Hutchinson)과 네 살바기 소녀 피비 바틀릿(Phebe Bartlet)의 경우이다.6)

 


1. 아비가일 허친슨(Abigail Hutchinson)[98-107]7)

  아비가일은 노샘프턴 부흥 기간 중에 영적으로 각성하고 요절한 성도이다. 그녀는 지적인 집안에서 출생하고 교육받았기에 열광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주 차분하고 얌전하며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우울증 증세를 보인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1734년 겨울 중생의 은혜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오빠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어떤 젊은 여인의 회심이야기는 아비가일의 시기심을 발동시켰다. 그녀는 성경을 철저히 읽기 위해 매달렸다. 처음에는 공포의 체험이 왔다. 원죄, 하나님을 불평한 죄, 그리고 효도를 다 못한 죄가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죄성에 대한 감각은 몇일 간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월요일 아침 자기 마음 속에 느껴지는 평안함과 고요함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한 생생한 감각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그가 층분한 속죄물이 된다는 인식을 동반했다. 그리스를 묵상하고 조망하면서 커다란 기쁨과 감미로움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수요일 아침 그녀의 영혼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고뇌로 가득찼다. 그녀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증거하고 싶었으나 건강상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러날 동안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달콤한 감각을 느꼈다. 신적 속성들 각각의 영광에 대한 감각으로 충만해지기도 했다. 그녀는 종종 나무들, 들판의 변화 및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사역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표현했다. 그녀는 성경을 읽고 있는 중 자기 영혼위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한 숨결을 느끼고 성경이 어떤 진리와 신성에 대한 느낀 소감(sense)을 표현하곤했다. 그녀는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긴 가운데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상에서 천국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목구멍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파리하게 말라갔다. 그러다가 1735년 6얼 27일 금요일 정오 마치 잠드는 사람처럼 어떤 몸부림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만다. 에드워즈는 아비가일이 자주 자지러지고 은혜스러운 감정에 압도당했던 이유의 일부는 몸이 약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녀는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를 체험했던 것이다.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약한 몸 때문에 방해받는 일없이 강한 은혜가 더 자유로이 역사할 수 있는 곳에 그녀는 있고 싶었고, 그녀의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에드워즈는 아비가일 허친슨의 예를 참으로 두드러진 기독교적 체험의 한 사례(a very eminent instance of Christian experience)라고 말한다.

 


2. 피비 바틀릿(Phebe Bartlet)[108-115]

  피비 바틀릿은 1731년 3월에 태어나서, 1735년 4월 - 5월 사이에 11세이던 오빠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신앙의 감화를 받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 지각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벽장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모습이 마침내 엄마의 눈에 발견되기에 이른다.  6월의 마지막 날 목요일 피비의 엄마는 벽장 소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된다: "찬양을 받으실 주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게도 구원을 주세요! 제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 영혼을 쥐어짜는 기도를 마치고 나온 피비는 엄마 곁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봐서, 그리고 지옥에 갈까봐 무서워서 그렇게 울었다. 엄마는 아무리 딸애를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더욱 간절히 울부짖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피비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미소 띤 얼굴로 "엄마, 천국이 내게 왔어요"라고 말했다. 피비는 이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엄마, 아빠보다 더 사랑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에, 어느 누구보다도요"라고 대답했다.

  천국을 발견한 피비는 사촌 동생이라든지 언니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곳에 가려면 자신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였다. "천국은 이 세상 보다 좋은 곳이야", "하나님 네비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유니스 언니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피비는 또한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조바심 내는 피비를 보고 왜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 묻는 사람에게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요"라고 피비는 대답했다. 자기 집에 방문해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저분들께서 또 오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비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아주 커보이고 그 분에 대해 범죄하는 것에 대해 비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자두 서리 사건-p.112).

  피비는 때로 자기 마음에 떠오른 성경 구절들에 의해 크게 감동을 받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1735년 11월 초순 피비는 계3장 20절 말씀으로 인하여 큰 기쁨을 경험하하게 된다. 그 해 겨울 아이의 엄마는 어린 딸이 한밤중에 깨어 흐느끼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딸 아이는 영적인 열정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간밤의 일에 대해서 묻자, 피비는 "예, 조금 울었어요. 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분들은 저를 사랑하셔요"라고 대답했다. 피비는 신앙적 각성이 없는 언니 네이비와 유니스에 대해서 계속 영적 관심을 나타냈다. "언니들이 기도해야 하고, 죽을 준비를 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얼마 밖에 살지 못했지만 준비는 항상 해야 한다고 했어요". 또한 피비는 불쌍한 이웃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도 나타냈다. 피비는 흔치 않은 정도의 사랑의 영을 드러냈다(114). 피비는 자신의 목사에 대해서도 커다란 사랑을 나타냈다.

  피비는 은밀한 기도 생활을 계속했고, 피비는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요리 문답서를 읽고 자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가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듯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음녀 약간 의심스러운 말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의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질문을 받으면 주저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IV. 결론적 고찰(116-121)  

 


1. 대각성의 퇴조

  1734년-1735년에 걸쳐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 성도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 시기는 가장 건강한 시기였다. 하지만 특별한 부흥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커다란 영적 고통 속에서 자기 목을 따려는 격렬한 충동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거치는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1735년 5월 하순경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서 물러가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탄이 더 자유로이 역사하고 있으며 무섭게 날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조짐의 첫 사례는 다름 아닌 에드워즈의 이모부인 조셉 홀리의 자살이다. 홀리의 집안은 우우증을 병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고민으로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고 밤중에도 지옥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의 목을 찌름으로서 생을 종결하였다. 후일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해임당할 때 반대편 선두에 섰던 사람이 바로 이 홀리의 아들이다. 그도 후일에 에드워즈에 대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자살하고 만다.8) 아무튼 조셉 홀리의 자살 소식은 사람들의 마음에 비상한 영향을 미쳤다. 여러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상한 광신적 망상에 빠져 들어간 두 사람의 사례가 발생했다(서필드와 사우스 해들리 사람). 한 사람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이 비상한 역사가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그 영광스러운 시기이 시작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117-8).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노샘프턴 지역에서는 회심이 더물게 일어났다(피비 바틀릿의 경우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리고 얼마 안 되어 하나님의 영은 이 군에서 아주 현저히 떠나시는 것 같았다. 노샘프턴과 주변 지역 사람들은 여러 달 동안 하나님의 일이 다시 소생될 것처럼 소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세는 그 일반적이고 집중적이며 생기있는 신앙적 혼이 서서히 시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마는 일들이 발생했다. 사람들의 대화 소재는 총독의 방문, 인디언들과의 조약에 관한 의회의 위원회, 스코필드 논쟁등으로 쏠렸고, 곧 마을 사람들은 새러운 meeting house를 짓는 일에 몰두하고 말게 된다(119).9)       

 


2. 대각성의 결과들

  그러나 에드워즈의 관찰에 의하면 대각성 기간 동안 회심되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그후에도 지속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 하나님과 신적 속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및 복음의 위대한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 주제들의 진리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기질과 태도가 과거에 아주 거칠었던 어떤 이들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졌다. 어떤 이들의 영혼은 빛, 사랑, 그리고 위로로 충만했다. 보고서를 쓰던 시점(1736년 11월)의 노샘프턴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인 주제로 대화를 즐겨했다. 젊은이들 가운데 과거의 해이하고 방종한 생활로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변화된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셨다“(120).

  “하나님은 여러모로 이 일의 방식을 주관하셔서 그것이 그 분 자신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일임을 분명하고도 경이롭게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그 영광을 전적으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에 돌리셨다. 그 부수적 상황과 수단이 어떠했건 간에,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아주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들이다! 여기 세계의 이 구석에 하나님이 거하시면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God has so ordered the manner of the work in many respects, as very signally and remarkably to show it to be His own peculiar and immediate work; and to secure the glory of it wholly to His almighty power, and sovereign grace. And whatever the circumstances and means have been, and though we are so unworthy, yet so hath it pleased God to work! And we are evidently a people blessed of the Lord! For here, in this corner of the world, God dwells, and manifests His glory)”(121).

   양낙흥 교수는 번역을 빠트렸지만 에드워즈의 부흥 보고서의 끝 부분은 다음과 같다.

Thus, Reverend Sir, 1 have given a large and particular account of this remarkable affair; and yet, considering how manifold God's works have been amongst us, it is but a very brief one. I should have sent it much sooner, had I not been greatly hindered by illness in my family, and also in my own person. It is probably much larger than you expected, and, it may be, than you would have chosen. I thought that the extraordinary nature of the thing, and the innumerable misrepresentations which have gone abroad of it, many of which, doubtless, have reached your ears, made it necessary that I should be particular. But I would leave it entirely with your wisdom to make what use of it you think best, to send a part of it to England, or all, or none, if you think it not worthy; or otherwise to dispose of it as you may think most for God's glory, and the interest of religion. If you are pleased to send any thing to the Rev. Dr. Guyse, I should be glad to have it signified to him, as my humble desire, that since he and the congregation to which he preached, have been pleased to take so much notice of us, as they have, that they would also think of us at the throne of grace, and seek there for us, that God would not forsake us, but enable us to bring forth fruit answerable to our profession, and our mercies; and that our "light may so shine before men, that others seeing our good works, may glorify 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When I first heard of the notice the Rev. Dr. Watts and Dr. Guyse took of God's mercies to us, I took occasion to inform our congregation of it in a discourse from these words-A city that set upon a hill cannot be hid. And having since seen a particular account of the notice which the Rev. Dr. Guyse and his congregation took of it, in a letter you wrote to my honored uncle Williams, I read that part of your letter to the congregation, and labored as much as in me lay to enforce their duty from it. The congregation were very sensibly moved and affected at both times.

I humbly request of you, Reverend Sir, your prayers for this county, in its present melancholy circumstances, into which it is brought by the Springfield quarrel; which, doubtless, above all things that have happened, has tended to put a stop to the glorious work here, and to prejudice this country against it, and hinder the propagation of it. I also ask your prayers for this town, and would particularly beg an interest in them for him who is,

Honored Sir, With humble respect,

Your obedient Son and Servant,

Jonathan Edwards.

Northampton,

November 6, 17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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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주도홍 교수(기독신학대학원)

 

가장 바울을 닮은 사람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사표가 될 만한 교회사의 인물은 없을까? 순간 우리는 바울의 음성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를 떠올리게 된다. 역사적 인물을 우리가 따라가야할 구체적 표상으로 삼는 일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 힘이 있어지기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감히 미국 대각성운동의 기수였던 18세기의 에드워즈를 소개하고 싶다.


칼빈(John Calvin,1509-64)처럼 55세의 생애를 산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 칼빈주의자,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열정과 능력의 복음 설교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J.I.Packer)이며, 또한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점에서 사도 바울을 닮은 사람으로도 그려지고 있다(D.M.Lloyd-Jones). 아무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드물게 몇 안 되는 인물중 한 사람이며,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지성이며, 보물과 같은 미국의 철학자로서 평가되기도 하는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Connecticut) 주에 위치한 윈저(Windsor)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는 그 곳에서 약 60년 동안 목회를 하신 목사로서 독자 요나단이 1758년 3월 세상을 뜨기 직전 다행스럽게도 앞서서 1758년 1월에 89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실천적이었다.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는 노쓰앰톤(Northampton)에서 죽기까지 목회를 하셨던 목사(Solomon Stoddard)의 딸로서 매우 영적인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영적이며, 지적 분위기 가운데서 요나단은 성장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어린 7-8세의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모임과 경건모임을 가진 것으로 훗날 회상하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1716년 13살의 나이에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 들어가서 존 로크(J.Locke)와 뉴톤(Newton)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1720년 17세 때 졸업하였다. 그 후 뉴 헤븐(New Haven)에서 2년간 더 신학을 공부한 후 172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잠시 임시목사로 뉴욕에서 교회를 섬긴 그는 1724년 21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의 강사로서 2년 동안 후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쓰앰톤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던 중 1729년 외조부의 사망과 함께 26세에 담임목사가 되어 1750년 까지 23년 동안 이루었던 목회를 쫓겨가듯 마감하여야만 하였다. 이유는 에드워즈가 세례 때에 세례 받는 자들의 공개적 신앙고백을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과는 다르게 강조한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발단으로 교회는 목사 신임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에드워즈는 230:23으로 불신임을 받게되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뜻밖의 결과를 바라보는 20세기 영국 교회의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일을 바라보며 목회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동역자들에게 하며 용기를 주었다.


사실 에드워즈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서 세계 교회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을 그 유명한 부흥설교자인 영국의 죠지 위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함께 이끌었던 것이다. 이 때에 행해진 그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 교회에서 행한 그의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는 1750년 7월 1일 고후1:14의 말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을 본문으로 선포됐다.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던 담대하고 떳떳한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훗날 역사는 그의 고별설교를 명설교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에드워즈 목사는 끝까지 틀림없는 설교를 성실히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 것이라 하겠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


바람직한 목회란 목회의 처음과 끝이 일치하거나 아니 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결과란 무엇보다도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맺어진 신실한 그리스도적 인격적 관계를 확인하는 말이다. 진정한 목회자 에드워즈의 마지막 「고별 설교」를 접하게 될 때도 이러한 진한 감동을 더욱 가슴 뭉클하게 실감하게 된다. 노쓰햄톤 교회에서 그는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를 1750년 7월 1일 고린도후서 1장 14절을 본문으로 선포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그리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더욱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이 교회와 여러 성도들의 목회자로서 주의 사역에 몸담은지도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 본인은 여러분들의 영원한 축복을 위하여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제 인생의 가장 귀한 황금의 기간을 여기에 투자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한 일에 여러분은 저의 증인이 되십니다. ... 저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제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밤과 낮으로 일했으며,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났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지명하신 거대한 사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한 주의 종을 여러분들을 위해 보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알며, 철저하게 죄를 경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지혜롭고 사려 깊게 주시하여 영원한 축복의 길로 여러분들을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기억하십시다. 주의 그 거대한 날에 이루어질 미래의 그 거룩한 우리의 만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날은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영원하고 불변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입니다. 아멘."


이제 에드워즈는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사실 다른 대책이 없이 많은 식구들과 함께 그 어디엔가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친구들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함께 동역을 해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사역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사양한 그는 1750년 12월 초 노쓰햄톤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스탁브리지(Stockbridge)의 인디언들을 위한 작은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1751년 8월 초 비로소 모든 가족이 노쓰햄톤을 떠나 이 곳 스탁브리지에 도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며 턴벌(Ralph G. Turnbull)은 "모든 교회가 그들 최고의 지성을 잔인하게 광야로 추방했고, 그 우울한 날들은 개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스탁브리지의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겼고, 보다 많은 시간을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그리고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탁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와 저술활동에 정열을 쏟고 있던 에드워즈는 1757년 뜻밖에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아 1758년 1월 취임을 하였다. 물론 그는 처음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의 여러 가지의 부족을 내세워 영광스러운 초빙을 겸허히 거절하였다: "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이러한 일을 떠맡게 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저를 지목하셨다는 게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연구와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이제 에드워즈는 영광스러운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었다. 그의 취임설교는 그리스도의 불변성에 관하여 2시간 동안 행해졌으나 그 어느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았으며 대단한 집중력으로 경청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만끽하면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들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1758년 3월 22일 55세의 아직 한참 일할 성숙한 나이로 3개월간의 총장재직을 뒤로하고 아깝게도 일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인생의 황혼이 너무 빨리 찾아온 뜻을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으나,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은 있었을 것이다(97.7.1.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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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주도홍 교수(기독신학대학원)

 

 

비로소 영혼을 옷 입히기 시작한 설교자

미국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장본인 에드워즈 목사의 설교는 어떠했을까? 그는 무엇보다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설교에 있어서 특별한 은사를 소유했었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의 말을 생생한 음성으로 들을 때, 그의 설교는 일반적인 웅변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영적 웅변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웅변때문에 우리 도시에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는 세련된 목소리도 아니었으며 강한 목소리로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거의 제스처를 쓰지 않고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상상력을 매혹시키기 위해 자기의 우아한 스타일이나 잘 생긴 용모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웅변의 힘으로 청중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전파하였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완전히 압도하는 주장과 강사의 온 영혼을 주장하는 설교 마디 마디에 쏟아 붓는 강렬한 감정으로 설교한 결과 전체 청중의 건전한 관심을 시종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지워질 수 없는 감동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웅변가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구원을 신(神)과의 합작품으로 서술하는 아르미니안주의를 정죄하며, 이성의 힘에 의존하는 계몽주의(Enlightment)의 본질을 반신적(反神的)으로 규명하면서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설교로 그러한 잘못된 시대사조에 강력히 맞서므로 미국 『첫번째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 1735-37)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이며, 그 분의 긍휼과 사랑만이 이미 지옥의 멸망에 떨어졌어야 할 죄인들을 선택함을 입은 백성으로 품으신다고 선언하였다.


에드워즈는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적 순종과 의존을 강한 어조로 요청하는 말씀의 선포를 한 것이다. 그는 탁월한 칼빈주의자였으나, 과격한 예정론을 멀리하였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존엄성은 언급될 수 없으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인간이 참여할 수 없음을 완벽하게 선언하였다. 곧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을 향하여서는 전혀 작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설교자였다. 결국 그의 설교는 오직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자신의 강조처럼, 감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으며, 강력한 설교였다. 또한 설교란 그에게 있어서 따뜻해야 하고, 진지해야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한마디로 묘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핵심적 메시지를 발견한 후 거기에서 설교가 출발되는 쉽게 전하는 강해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후 분명한 적용을 잊지 않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본문과 자신의 말을 신실하게 나누어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와 논문발표 그리고 강의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


당시 에드워즈가 외친 설교의 영향을 목격자의 음성으로 생생히 들어 보는 것은 실감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에 ... 영원을 옷입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랑과 경배와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과 겸손의 모습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볼 때 그것은 하늘나라의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 노인들은 이전에 없었던 복음의 능력을 강하게 느꼈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민감하게 깨달았던 때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97.7.7)!

 


정서와 지성을 조화시킨 설교자


요나단 에드워즈의 저술중에서 저자의 특징적 사상을 가장 잘 제시하는 작품은 43세 때 쓴 『신앙과 정서』(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1746)이다. 본 저서는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 데, 제 1부에서는 정서들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그러한 정서들의 중요성을, 제 2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의해서 오는 신앙적 정서의 진위는 무엇으로 가려지는지, 제 3부에서는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을 구분하는 표식들은 무엇일까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최선을 다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간하여 그 분별력을 정립하고 확정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신앙의 대부흥들이 단순한 일과성 현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열정적인 영적 정서와 깊은 지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킨 에드워즈는 설교에 있어서 정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인식했다. 그 정서란 오성으로 인한 깨달음(Understand)과 실천으로의 의지(Will) 사이에 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깨달음은 나아가서 인간을 감동시켜야 하며, 감동을 받을 때 사람들은 의지를 가지고 행위에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를, 감동은 가슴을 그리고 의지는 사람들의 손과 발을 요구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설교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의 주도적이고, 본질적 좌소가 바로 마음이기에,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설교, 그리고 의지의 결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끝나는 설교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지적 전달로 결코 바람직한 성도의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흔하게 일어나는 무분별한 인위적 감정의 문제점들을 강렬한 어조로 지적한다. 이러한 인위적 감정은 성령이 함께하는 진정한 바람직한 정서와 구별이 된다.


에드워즈는 성경에서 가장 잘 거룩한 정서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구약의 다윗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한다: "첫번째로 주목할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시편을 통해서 자기 신앙의 생생한 모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의 거룩한 노래들은 다름아닌 경건하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현이요, 속삭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겸비하고 뜨거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놀라운 행사들에 대한 찬탄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간절하게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과 기쁨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충분성과 신실하심 안에서 영혼이 거룩하게 승화되고 승리한 것의 표현이요,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정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가까이 접근하려는 성향과 싫어하며 멀어지려는 성향이다. 전자에 해당되는 바로는 사랑, 기쁨, 소망 등의 감정이며, 후자에 해당되는 것들로는 죄에 대한 혐오감과 미움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거룩한 감정들이 일어나는 설교를 에드워즈는 행했고,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에드워즈야말로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명료하게 조화시킨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었다고 기꺼히 평가를 받는다(D.M.Lloyd-Jones).(97.7.7.Seoul)


 


명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일반적으로 에드워즈의 설교와 강의는 시대적으로 셋으로 나누어 이해되고 있다. 첫째로, 1720-23년으로 그의 예일대학교 졸업 이후 뉴욕 장로교에서의 사역시절 그리고 예일대학교 강사시절에 행해진 것들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독교인의 행복', '영광스러운 은혜', '사악한 사람의 죄의 노예'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 그 다음은 1726-50년 까지인데, 그의 노쓰햄톤에서의 23년간의 목회중에 행해진 것들이다. 대표적인 설교들로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관한 16회의 설교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장례식 설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쓰햄톤교회를 떠나면서 행했던 '고별설교'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분류되는 설교와 강의로는 1750-57년에 행해진 설교로서 스탁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사로서 행해진 것들이다. 아울러 짧은 기간이지만 예일대학교의 총장으로서 행해진 것들도 포함된다.


그러한 설교와 강의 가운데서 에드워즈를 기억케하는 가장 두드러지는 역사적 명성을 누리게 하는 작품은 다름아닌 그의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을 우선적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설교의 한 부분을 들어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설교의 제목과 직접적 관련이 되는 대목을 들추어 낼 것이다:


"육적인 자들은 지옥 구덩이 위에서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구덩이에 들어가야 할 마땅한 자들이며, 그러한 판결은 이미 선고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해 실제로 지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향하신 분노만큼이나 큼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분노를 조금도 누구러뜨리거나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악마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지옥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삼킬듯한 불꽃은 그들을 집어 삼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 불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으며, 그들은 어떠한 중보자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의무에 구속되지 않는 몹시 분노하신 하나님의 인내에 의한 것입니다."


이 설교는 38세의 에드워즈 목사가 1741년 7월 8일 미국의 엔필드(Enfield)에서 선포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의 중앙에서 행해진 설교로서, 당시 이 설교를 들은 수 많은 회중들에게서 통곡과 눈물이 함께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메사추세츠주의 노쓰앰톤에서 주목할만한 목회를 시작한지 벌써 14년이 되는 해였다. 대각성운동이 1734년 에드워즈의 탁월한 영적 설교에 의해서 시작된지 벌써 7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러한 영적으로 성숙한 분위기와 에드워즈의 개인적 영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뜨겁게 선포되어진 설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 무언가 역사적 작품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합작품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생각해 본다. 물론 무엇보다도 그 설교의 주인되신 성령 하나님의 강렬한 역사가 함께 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특기한 점은 2000년 교회사 가운데 이 설교처럼 하나의 설교가 명성을 떨친 경우는 처음이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설교자"(John H. Gerstner)로서 불리우는 에드워즈의 이 설교는 그의 설교 가운데 최고의 설교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누구의 설교보다도 감동적인 위대한 설교로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이 설교에 대하여 "너무 강렬하고 충격적이다"는 혹독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보다 더욱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그들의 진상에 의해서 두려워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잘한 정당한 일입니다"라는 에드워즈의 답변에는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9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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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주도홍 교수(기독신학대학원)


 


에드워즈가 만난 인물 브레이너드


29세의 너무도 짧은 일기로 한 생을 마감해야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에드워즈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브레이너드는 일반 교회사에서는 단지 미국 식민지 시대의 한 인디언 선교사로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를 말할려고 하는 이유는 에드워즈가 편집을 하고 서문을 써서 출판해낸 그의 일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의 지속적이고 경건한 영향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1984년 출판되어 신학생들의 경건훈련를 위한 중요한 필독서 중의 하나로 애독되어지고 있다.


딸의 약혼자였던 브레이너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에드워즈의 평가는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이기도 했던 주제 곧, 냉철한 지성과 아울러 바른 신앙적 정서를 균형있게 조화시킨 인물이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를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통찰력을 지닌 인재였고, 명쾌한 사고력과 정확한 판단을 할줄 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 그는 바르고 경건한 신앙과 광신을 철두철미하게 분별했다.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사리에 맞고 분명한 데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인가,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 아니면 원기가 왕성한 나머지 해괴망측한 상상을 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감정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를 향한 넉넉한 평가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자신의 저서 『신앙과 정서』가 거의 같은 시기인 1746년에 세상에 나온 것을 감안할 때 이 점에서 에드워즈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주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즈는 너무도 빨리 시들어버린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바라다보며 그의 결함아닌 "결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의 결함을 찾아본다면, 그가 고생하는 면에서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수고를 한 것에 비하여 마땅히 돌보아야 했을 건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촉급한지를 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의 건강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과 그가 처한 형편은 너무도 고생스럽고 피곤했지만,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참으로 고생스러웠던 선교사들의 삶이 생생하게 부각되는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커넥티커트의 헤이담(Haddam/Connecticut)에서 5남 4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도 14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적 양친을 잃은 데이비드는 온순했지만,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었는 데,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에드워즈의 눈에도 확인되고 있다: "그의 풍부한 감정은 우울증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때로 우울(melancholy)과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하곤했다." 물론 우울증은 일기 가운데서도 보여지는 그의 특징적 내면성임을 우리는 또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라면 영적 우울증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이리라!


영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한 존 웨슬리는 모든 설교자들이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참되고 진정한 헌신과 바른 기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향하여 "기도로 숨쉬었고, 기도로 움직였고, 기도로 선교하다가 기도가운데 숨을 거둔 사람"(김명혁)이라고 평가함은 적절하다 하겠다. (97.7.29.Seoul)


 


대각성 운동의 동역자 죠지 휫필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영적 『대각성 운동』은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2회에 걸쳐 계속되었는 데, 1차 대각성 운동은 1734-1735년에, 2차 대각성 운동은 1740-1741년에 일어났다. 나중에 일어난 2차 운동은 영국 출신으로서 웨슬리의 동역자이기도 한 당시 26세의 젊은 부흥사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천둥번개와 같은" 열정적 설교와 더불어 성령의 강력한 역사(役事)가 잠자는 교회를 깨워 뒤흔들며 새롭게하는 신앙부흥운동(Revivalism)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역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적절히 묘사하였다.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노쓰햄톤의 영적 상황을 보며 휫필드는 도착날 쓴 자신의 일기에 감동적인 내용을 기록하였다(1740년 10월 17일):


"빛이 비치자 곧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일어났던 하들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최근 하나님의 백성들이 첫사랑을 상실해 가며 무감각한 상태에 있음을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앞서 미리 사역하신 점들을 들려주었을 때,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또한 계속되는 일기에서 우리는 노쓰햄톤 교회의 목회자 에드워즈 목사의 당시의 모습을 가정과 함께 그리는 대목도 만나게 된다: "그 곳의 목사는 바로 요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충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현재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다."


계속되는 휫필드의 일기를 보면,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신앙적 교제를 우리는 피부로 느끼게 되고 에드워즈의 풍부한 감정도 만나게 된다: "에드워즈의 요청에 의해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10월 18일). "오늘 아침에 설교하니 훌륭한 에드워즈는 예배 시간 내내 흐느꼈다. 다른 성도들도 감동을 받았으며, 오후에는 능력이 더 강하게 역사했다"(10월 19일, 주일). 우리는 이 일기 가운데서 휫필드의 에드워즈를 향한 각별함을 또한 보는 데, 다름아닌 에드워즈의 이름 앞에 붙이는 격조높은 존경의 표시인 형용사들인 "신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훌륭한 에드워즈"등을 주목할 때이다.


두 사람의 친분은 이미 1년전 1739년 11월에 뉴욕에 와 있던 휫필드의 편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편지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소식을 뉴욕의 상인 노블(Th. Noble)에게서 듣고 언급하며, 자신의 유럽에서의 활약도 소개하기를 잊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 목사와의 북미에서의 동역(同役)을 이 편지를 통하여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 향한 목사님과 노블씨의 신실한 사랑의 소식이 저로 하여금 이 편지를 당신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많은 영혼들을 위해 노쓰햄톤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도 몇 달 만이라도 가서 그 일들을 보고 싶습니다. 신문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당신은 유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할 때입니다"(11월 16일). 이 편지가 제대로 에드워즈의 손에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에드워즈도 거의 같은 기대를 가지고 같은 해 영국의 휫필드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목사님께서 계획하시고 있는 내년 여름 뉴잉글랜드 지방의 여행 중에 노쓰햄톤을 방문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요청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보고 말씀을 들으려는 바램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알아 주십시오"(12월 12일). 1740년 이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은 교회사에 펼쳐질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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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드 공식 홈페이지 소개

 

http://www.jonathanedward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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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나단 에드워드의 결심(The Resolution of Jonathan Edwards)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결
심들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한, 내가 이 결심들을 지킬 수 있도룩 은총을 내려 주시
기를 엎드려 간구하는 바이다.

이 결심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읽도록 명심한다.

1. 결심하노라. 나는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드높이며, 나 자신의
유익과 즐거움이 되는 일을 할 것이로되, 지금 당장, 혹은 수많은 세월동안 전혀 갖
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에 구애받음 없이 내 전 생애동안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
의 의무가 되고 인류의 보편적인 유익과 이로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또한 그 어려움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막대한 가에 개의치 않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당해 낼 것을 결심하는 바이다.

2. 결심하노라. 위에 언급한 일들을 진행시키기 쉬한 새로운 고안과 창안들 찾아내는 데
계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3. 결심하노라. 내가 침체되고 둔감해져 이 결심들의 한 부분이라도 지키기를 소홀히한다
면 내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회개할 것이다.

4. 결심하노라. 영혼이나 육신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일도 습관적(관습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 일율 추구할 것이며, 피할 수 있다면 습관이
되어서도 또한 용납하여서도 안될 것이타.

5. 결심하노라. 시간의 일각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며,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그 시간을
활용할 것이다.

6. 결심하노라. 내가 사는 동안 내 전력을 다해 살아 갈 것이다.

7. 결심하노라. 만일 그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라 가정할 때 내 마음이 원치 않을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8. 결심하노라. 모든 점에서, 말이나 행동 모두에서, 나는 나처럼 악한 자가 없는 것처럼,
남과 같은 죄를 범한 것처럼, 남과 같은 약점과 결점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나
는 그들의 결점에 대한 지식으로 하여금 다만 나의 수치로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나의 죄와 비참함을 고백하는 계기로만 여길 것이다.

9. 결심하노라. 내 자신이 죽을 때의 모든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죽음을 동반하는 상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이다.

10.결심하노라. 내가 고통을 느낄 때 순교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묵상할 것이
다.

Ⅱ.결심하노라. 내가 풀어야 할 신학적 이론에 대해 생각할 때 상황이 허락하는 한 당장
내가 그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12.결심하노라. 내가 교만과 허영, 여타 그러한 일로 만즉하여 즐거움울 누리고 있다면
당장 집어 던질 것이다.

13.결심하노라. 자비로움과 자유로움에 합당한 대상들을 찾기에 힘 쓸 것이다.

14.결심하노라. 복수심에서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_

15.결심하노라. 비 이성적 존재(irrational being) 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화난 감정도 품
지 않을 것이다.

16.결심하노라. 절대 남울 비방하여 좋은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그를 조금이라도 불명
예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17.결심하노라, 나는 이렇게 살겠다. 내가 죽음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살았으면 좋
았을걸하고 바라게 될 그것처럼 살 것이라.

18.결심하노라. 나는 이렇게 살겠다. 모든 생애 동안 내 독실한 신앙의 틀에 가장합당하
다고 생각되는 그것을 위해서, 그리고 하늘나라와 복음에 대한 뚜렷한 개념을 인식한 채
로 살겠다.

19.결심하노라. 한 시간이 채 안남아서 최후의 심판의 나팔소리를 듣는다 가정할 때
그 때 내 마음이 원치 않을 일은 하지 않겠다.

20.결심하노라. 먹는 것과 마시는 일에 대해서는 가장 엄격한 절제를 유지할 것이다.

21.결심하노라. 만일 내가 남을 관찰하게 될 지라도, 그를 경멸할 좋은 기회를 찾거나 어
떻게든 그를 더 비열하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 1 부터 21번까지의 결심은 1722년 뉴 하벤(New Haven)에서 기록된 것임 )

22.결심하노라.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최대의 복락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전심과 전력과
열심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무력이라도 가능할 것이며, 생각할수 있는 모든 방도를 다해
추구할 것이다.

23.결심하노라. 하나남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일을 할 때는 신중하게
행동하여 그 최초의 의도와 계획, 목적을 돌이켜 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아니한 것이라면 제 4 결심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24.결심하노라, 어떤 명확히 악한 행위를 할 때마다 그 근본적인 원인에 도달할 때까지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 악의 근원과 싸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 기도하고 싸울 것이다.

25.결심하노라. 나의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의심케 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주의깊고 끊임없이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26.결심하노라. 내 신앙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이 발견되면 멀리 던저 버릴 것이다.

27.결심하노라. 그 어떠한 일도 의도적으로 빠뜨려 태만을 방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 태
만(omission)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이상, 어떤 태만도 용납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나의 테만에 대해 조사해 볼 것이다.

28.결심하노라. 성경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매일 연구하여 내 자신이 성경의 지식 가운데
자라나는 것을 명확히 발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9.결심하노라. 하나님이 옹답하시리라는 확신이 없는 기도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이 없는 고백은 기도라 해서도 안될 것이며 그러한 기도는 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30.결심하노라. 내 신앙과 은총의 나눔이 전주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매주
마다 최선의 분투를 할 것이다.

31.결심하노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비방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가장
워대한 영광과 인류에 대한 사랑에 적합한 것이며, 가장 낮은 겸손과, 내 자신의 과오와
허물에 대한 인식에 위배됨이 없고, 또한 황금률에 일치한 것이라면, 남에 대한 어떤 비
판적인 말울 하였을 경우, 되새겨 보아, 이 결심에 의해 조심스럽고 엄격하게 남에 대해
서 비판을 가할 것이다.

32. 결심하노라, 내 믿음을 견고하고 준엄하게 지켜, 잠언 20:6에 기록된 " 충성된 자가
누구 이겠느냐? "라는 말씀이 부분적일지라도 내게 해당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3.결심하노라. 다른 측면으로 균형올 잃어 해가 되지 않는 한, 언제나 화평율 이루고 유
지하며 보전할 것이다.

34.결심하노라. 이야기를 함에 있어 순전하고 간단 명료한 진실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을
것이라.

35.결심하노라. 나의 의무를 다했는가에 대한 지나친 의구심을 갖게 되어 나의 평온과 고
요함이 방해받게 된다면 그 때마다 그것을 내려 놓을 것이며, 어떻게 이 의구심이 풀릴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도 접어두겠다.

36.결심하노라. 결코 남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나 그것이 특별한 선의에 의한 것이라면 예
외가 될 것이다.

37.결심하노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가 어느점을 소홀히 했으며- 어떠한 죄를
범했으며- 어디에서 나 자신율 부인했는지 스스로 질문할 것이다. 또한 매주, 매월마다
매년마다 그러할 것이다. 12월 22일과 26일, 1722년

38.결심하노라. 주의 거룩한 안식일에는 결코 장난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즐기지
않올 것다.

39.결심하노라. 그 적법성 (lawfulness)에 매우 의심이 가는 일은 하지 않올 것이로되, 동
시에 그 적법성을 이후로 고민해 보고 조사해 보려 한다. 단, 그것을 생략하는 것이 적법
한 지를 동일하게 의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40.결심하노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관하여 내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취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볼 것이다. 1월 7낄, 1723년

41.결심하노라. 매일, 매주, 매월, 매년마라 모든 관점에서 내가 어느점에서 더 나아질 수
있었는지률 스스로 자문해 볼 것이다. I월 Ⅱ일, 1723년

42.결심하노라. 세례식 때 맺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헌신을 늘 새롭게 할 것이다. 이 헌
신은 내가 교회의 성찬식에 받아 들여 졌올 때 엄숙하게 새로이 한 것이며, 오늘 1773년
I웹 20일에 다시 엄숙히 갱신하는 바이다.

43.결심하노라. 지금부터 나의 임종에 이를 때까지 내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
이며, 오직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다. 또한 1723년 1월 12일 토요일에 행한 것
과 일치한 삶을 살 것이다.

44.결심하노라. 신앙 외에 어떠한 것도 나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없게 할 것이다. 그 어떠
한 상황에서도 신앙 외에 다른 목적이 내 삶을 이끌 수 없다.

45.결심하노라.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 괴로움, 또한 어
떠한 감정과 일말의 애정도, 그와 관계된 상황까지도 결코 용납지 않울 것이다.

46.결심하노라. 아버님이나 어머님에게 약간의 짜증스런 블쾌함이라도 결코 표현하지 말아
야 할 것이다. 혹 불쾌한 느낌으로 말을 번복하거나 그러한 느낌의 눈짓이라도 허용하지
않울 것이다. 더욱이 가족 중의 성원에 대해서는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47.결심하노라, 무엇이든 선하고, 부드러우며 자비롭고, 경건하며 평온하고, 만족스럽고
편안하며, 인정이 풍부하고 관대하며, 겸손하며 온유하고, 온순하고 감사하며, 성실하고
근면하며, 인애로우며 침착하고, 잘 견디며, 증용을 지키고 남을 용서하며 진실한 성품을
위한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언제나 이러한 품성이 이끄는 데로 나가기를 노
력할 것이며 매 주말마다 내가 그와 같이 생활하였는가를 면밀히 점검할 것이다. 1723년
5월 5일 안식일 아침

48.결심하노라. 항상 최고의 정밀함과 열심을 가지고 엄격히 내 영혼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 보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는지 알아 볼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내가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이것에 대해 회개할 거리가 없도록 할 것이다.

49.결심하노라. 내가 피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50.결심하노라. 내가 미래 세계에 이르렀을 때 내 판단이 가장 합당하고 현명했다고 생각
되도록 그렇게 행동하겠다. 7월 5일 1723년,

51.결심하노라. 모든 점에서 내가 결국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었
으면 하고 바라게 될 그것처럼 살겠다.

52. 나는 좀종 노인들이 다시 젊음을 되찾게 된다면 어떻게 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다. 결심하노라.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바라게 될 그것처럼 살겠다.

53,결심하노라. 나의 정신상태가 고양되고 주가 주신 가쁨으로 충만할 때, 나의 영혼을
던져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외 혼신을 그에게
거룩하게 드릴 것이다. 나의 구원자를 신뢰하므로 내가 평안의 확신에 이를 수 있다.

54.결심하노라.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 있거
든 그것을 본받도륵 노력할 것이다.

55.결심하노라. 내가 어미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을진데,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기에 최선의 경주를 기울일 것이다.

56.결심하노라. 그 결과가 아무리 실망스럽다하더라도 내 자신의 부패함과 싸우기를 포기
해서도, 고삐를 늦추어서도 결코 아니될 것이다.

57.결심하노라. 내가 불행과 역경울 두려워하게 될 때, 내가 내 소명을 다했는가 점검하
고 그것을 완수하기"를 마짐할 것이며, 주의 섭리대로 만사가 이루어 지도록 하겠다. 나는
가능한 나의 소명과 나의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겠다.

58.결심하노라. 대화 속에서 불쾌감이나 짜증스러움, 노여운 태도를 절제하고 오직 사랑
스러움과 쾌활함과 온화한 분위기를 나타낼 것이다.

59.결심하노라. 내가 악한 기질과 노여움으로 분노가 촉발되려고 할 때, 스스로를 다스려
선한 기질이 우러나오도록 애를 쓸 것이다. 그렇다. 비록 다른 관점에서 그것이 해가 될 수
있으며 훗날 분별없는 행동이었다고 여겨지더라도, 그럴 때야말로 선한 기질을 발휘할
것이다. 5월 12일, 7월 4일과 13월, 1723년

60.결심하노라. 나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문란해지는 조짐이 보이게 될 때마다, 조금이라
도 내면의 불안함과 외면의 무질서함이 인식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주의깊게 관찰할
것이다. 7월 4월과 13일 1723년

61.결심하노라. 마음을 강팍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내가 신앙에 굳건하고도 완벽히 서게
되는 것율 방해하는 신앙에 대한 냉담함(listlessness)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냉
담함이 어떤 변명을 만들지라도 결코 용납지 않올 것이다. 5월 21일, 7월 13일, 1723년

62.결심하노라. 소명을 위한 일에만 몰두할 것이다. 에베소서 6:6-8과 같이 주님께 하는
것처럼 자진해서, 기껍게 할 것이로되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이 무엇이
든 선한 일을 하면 그에 대한 상급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6월 25일, 7월 13낄 1723년

63. 모든 면에서 의롭고, 어떠한 부분과 어떠한 특징을 조명해 보아도 언제나 기독교 그
자체의 영광으로 빛나는 신앙을 소유하고, 뛰어나고 사랑스러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결심하노라. 만약 내가 전력을 다해 경주한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었을 것이라는 각오로 삶에 임하겠다. 1월 14일과 7월 13일 1723년

64.결심하노라. 사도가 말한 그러한 "말할 수 없는 탄식(롭. 8:26)"들을 알게 되고, 시편
기자가 시편 119:20에서 말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고통들로 하여금 나의 힘으로 승화시키고 내 간구함을 열렬히 분출하고
또 다시 간구하는데 피곤치 않도록 할 것이마. 7월 23일, 8월 10일 1723년,

65,결심하노라. 만톤 박사의 시편 119편에 대한 27번째 설교에 의거하여 내 전생애 동안
다음과 같이 실천할 것이다. 다시말하면 가장 허심탄회하게 하나님께 대한 나의 행위들
을 고백하고 그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열어 나의 죄와 유혹과 슬픔과 두려움과 소망
과 기대와 그 모든 것들을, 그 모든 경우들을 고백하리라.

66.결심하노라. 의무들이 달리 규제하지 않는 이상, 모든 교제와 모든 장소에서 말과 행
동을 할 때 항상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힘쓸 것이라.

67.결심하노라. 고난의 시간들이 지난 후, 그로인해 내게 어떠한 유익이 있었는지, 그 유
익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얻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문해 볼 것이다.

68,결심하노라. 그것이 허물이든지 죄악이든지 나의 내면에 있는 것은 모두 나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해 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신앙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 전모롤 하나님께 아
뢰어 필요한 도움올 간청할 것이다. 7월 23빌과 8월 10일, 1723년

69.결심하노라. 남들이 내가 바라던 것을 하는 것울 볼 때에 내가 했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할 그것을 언제나 행할 것이다.

70.결심하노라. 내가 말하는 모든 내용 속에 무엇인가 자비로움이 있게 하라.
8월 17일,17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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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나단 에드워드처럼 살 수는 없을까”

 백금산 목사

 


Ⅰ. 들어가며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18세기의 미국 제1차 영적 대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쓰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교회사적으로 16,17세기의 종교개혁 신학과 청교도신학 부흥신학을 결합한 사람입니다. 이런 그를 로이드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비교했습니다.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교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교할 수 있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을 통하여 이시대 캠퍼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적 대 각성운동을 일으키고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 천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영적인 소원이 충만해지길 기도합니다.

 

 

 

Ⅱ. 조나단의 생애

 


1703. 10. 5 코네티컷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

1716 ‘곤충에 대한’ 논문

1716. 9. 예일대학 입학

1721. 9. 예일대 최우수 졸업

1720-1722 예일대에서 신학 공부

1722. 8. -1723. 4. 뉴욕장로교회의 목사로 6개월 섬김

1723. 9. 예일대에서 M.A. 학위받음, 예일대 교수로 임명

1726. 8. 노샘프턴 교회의 청빙수락

1727 사라 피오폰트와 결혼

1731 ‘인간의 신앙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출판

1734 노샘프턴에서 대각성 시작, ‘신적인 초자연적 빛’ 출판

1737 ‘놀라운 회심 이야기’출판

1738 ‘사랑과 그 열매’ 출판

1739 ‘자서전’ 출판

1741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 분별 방법출판’

1742 ‘부흥신학’출판

1746 ‘참 신앙의 본질’출판

1750 성찬 참여 논쟁으로 노샘프턴 교회에서 축출, 고별설교

1751 메사추세츠 스톡브릿지에서 지역교회 목사겸 인디안 선교사로 사역

1754 ‘의지의 자유’출판

1755 ‘참된 윤리의 본질, 하나님의 창조 목적’저술

1757 뉴저지 대학 총장으로선출(현 프린스턴)

1758 ‘원죄’출판 3월22일 천연두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사망

 

 

 

 


Ⅲ.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일기, 자서전

 


조나단은 18세기 미국 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 뽑힙니다. 이런 그의 많은 저서들은 그의 사상과 삶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그의 개인적인 삶을 섬세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결심문과 일기와 자서전입니다.

 


그의 결심문은 7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18세 회심한 이후 약 1년 동안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결단과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의 일기는 이러한 결심문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 결심문을 기록한 시점부터 자서전이 끝나는 때쯤에 끝을 맺습니다.

 


그의 일기는 19세에서 33세 때까지 14년이지만 대부분은 20-21세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심문과 일기는 조나단의 초기의 영적 생활의 모습과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자서전은 그가 36세쯤 되었을 때 사위의(?)의 요청으로 자신의 영적 일생을 회고하면서 요약한 자신의 개인적 회심 이야기입니다. 유년시절과 30대 중반의 장년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30년 후반의 영적 상태와 수준은 55세로 죽을 때까지 거의 동일하게 이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나단의 ‘결심문’, ‘일기’, ‘자서전’에 담긴 개인적인 삶은 조나단의 생애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 권의 책을 참조함으로써 조나단의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세권을 기초로 한 여러면에서 본 조나단의 신앙생활입니다.

 

 

 

 


1. 종말의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시간 관리(벧전3:10-12, 고전7:31, 요일3:2-3)

 


(1) 시간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짐. “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결7),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결17)”

 


(2) 시간 관리를 위한 우선 순위 설정의 핵심 원리. “모든 일을 그 일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따라서 그에 맞는 생각할 시간을 배당하도록 하자.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이라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하고, 죄된 것과 부적당한 것이라면 하나도 하지 않도록 하자.”(1924/1/1) “세상을 추구하는 데 사용되는 시간과 노력은 이 세상의 생활과 소유의 불확실성과 함께 내세와의 관련성에 비추어 그 일의 필요성과 유용성과 중요성에 따라 배당되어져야 한다."”1924/1/3)


* 오늘날의 시간관리에서 1세대는 메모지에 기록부를 작성, 2세대는 달력과 약속 기록부를 작성하고, 3세대는 시간 관리에 우선 순위 개념을 도입한 것이며, 4세대는 중요성과 긴급성의 개념을 도입하여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3) 시간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함.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아주 일찍 일어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아침 일찍 일어날 것을 권고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1728/1)

 


“음식을 적게 먹고 체중조절을 하며, 가능한 한 가볍고 소화되기 쉬운 음식을 먹게 되면 틀림없이 생각을 더 또렷하게 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이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내 수명이 길어질 것이다. 둘째, 식사 후에 소화시키는 시간이 덜 들것이다. 셋째, 건강에 지장 없이 더 철저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수면시간이 덜 들것이다. 다섯째, 두통으로 고생할 필요가 거의 없게 될 것이다.”(1724/9/2)


(4) 매일, 매주, 매달, 매해마다 정기적으로 평가함.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보자. 또한 매 주말, 매 월말, 매 연말에도 그렇게 하자.”(1722/12/24)


* 일본의 빌게이츠라고 불리는 ‘소프트 뱅크’의 사장 손정의씨는 자기 회사에서 운영되는 모든 사항을 점검하는 항목들을 만개를 만들어 ‘일만 개 노크제’라고 독특한 경영방법을 사용하여 신화적인 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2. 자기 자신 및 세상과의 영적 싸움 (눅9:23, 골3:5, 롬8:13)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칼빈, '기독교 강요')”

 


(1)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싸움: 모티피케이션. “내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결22)”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를 갖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 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 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을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중략(1723/1/14)”

 


(2)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대한 본능적 요구를 최소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을 절제하는 문제에 있어, 몸과 정신 양면에 걸쳐 매일 아침마다 매일 해야 할 일과 내가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루 중에 내가 짓기 쉬운 죄를 생각하고 하루를 어떻게 잘 보낼 것인가를 결심하고, 그런 죄를 피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1723/1/10)

 


(3)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번 주에는 불행하게도 주간 평가가 저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열정이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의무를 행하는 것을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신앙적인 생각을 하는데 힘을 쏟지 않은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을 깨닫고 고치기로 결심했다.(1723/1/5)”

 


(4) 세상의 부와 편안한 삶에 대한 거부.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받아들이며, 그 밖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족하리라 새롭게 다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은 잘 되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하 더라도 나는 불평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겠다. 최근 나는 이와는 반대로 행동했다.”(1723/2/17)

 


(5) 고난과 시련에 대한 태도. “고통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앉아서 고통이 주는 괴로움에 대해서 곱씹으면서, 고통으로 인한 나쁘고 어두운 면만을 계산하고, 오랫동안 고통의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장 나쁘고 치명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쁘게 말하며, 고통에 대해서 실컷 떠들어대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며 옛 고통을 더 크게 키우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반대로 행동하게 되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이 주는 긍정적 측면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며, 또한 고통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 고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 고통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게 될 것이며, 실제로 상당한 정도까지 그 고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1723/11/26)

 

 

 

3.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적조화와 균형

 


(1) 에드워즈의 지성적 측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닐 것같이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행하자. 그리고 그 일의 원래 의도와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을 파악하자.(결23)”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조금이지만 약간의 의문이 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1722/12/18...)

 


(2) 감성적인 측면. “요즘 며칠 동안 빠져 있었던 죽음 같은 상태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723/1/18...), 어제와 오늘 아주 둔감하고 메마르고, 죽은 것 같은 상태였다.(1722/12/21), 오늘 성령님에 의해 회복되었다.”(12/22)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살며,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영적이고 거룩한 기쁨으로 영원히 살리라고 하는 소망을 품고 내 마음은 즐거워하고 있다.” (1723/5/12)

 


(3) 의지적 측면. “1723년 1월 12일에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나의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나 자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자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전부와 행복으로 받아들이기로 맹세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나의 행복이 달려 있는 것처럼 간주하고 행동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인 삶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울 것을 결심했습니다.(자서전)”

 

 

 

4. 철저하고 지속적인 경건의 습관

 


(1) 성경 묵상과 적용 (요17:17, 벧전2:2, 딤후3:16-17). “나는 때때로 생명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빛이요 달콤하고 탁월하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함께 생겨났으며 말씀이 내 마음속에 풍성히 거하게 되었습니다.(자서전)”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또한 예방 차원에서 다음의 성경 구절들에 기록된 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즉 빌립보서 4장 6,7절에 따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자. 벧전5:7절에 따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자. 또한 마6:31-33절에 따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자, 또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자,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자,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1724/2/7...)”

 


(2) 신학과 교리의 묵상과 탐구. “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속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영광스러운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새로운 차원의 이해와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내적이고 달콤한 느낌이 자주 내 마음속에 생각났습니다. 또한 내 영혼은 이러한 일들을 기쁘게 생각하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게 되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을 일고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책이 가장 나를 기쁘게 했습니다.(자서전)”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선택의 교리, 무조건적 은혜, 하나님이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에 대해 그리고 거룩은 전적으로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에 대해 묵상했다.” (1723/3/6)

 


(3) 균형 잡힌 독서. “나의 참된 관심사에 비추어 볼 때 내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할 수 있는 한 비슷하게 다음과 같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내게 가장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공부할 때, 하루의 절반 또는 많아도 하루는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고 그 다음의 하루의 절반 또는 하루는 신학공부를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돌아가면서 균형 있게 하도록 하자.” (1725/11/16)

 


(4) 기도와 찬양. “나는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계속 되풀이해서 나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즉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계속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기도하려 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통 때 기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도했습니다.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자서전)”


“과거에는 기도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과 교회의 번영과 인간의 유익에 대해서 충분히 간구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반대에는 비중을 두지 말자. 즉 ‘하나님께서 단지 눈에 띄지 않는 한 사람의 기도 때문에 전세계를 크게 변화시키시며, 나라와 민족들을 번복시키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전교회의 합심기도에 대한 기도응답으로 이루어지곤 한 것이다’라는 주장이나 ‘내 기도가 어떤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알아차리지 힘든 사소한 것일 거다’라는 주장 말이다.(자서전)”

 


(5) 성도의 교제 및 전도. “주일에는 절대로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지 말자.(결38)” “자유로운 신앙적 대화의 유익함에 대해 이전보다 더 강한 확신이 든다. 자연철학에 대한 토론을 통해서 나는 지식을 아주 빠르게 얻고 있고, 개인적으로 공부할 때보다 사물의 근거들에 대해서 훨씬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신앙적인 대화를 하려고 간절히 추구하자. 어느 때든지 유익과 기쁨으로 자유롭게 그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방이 있을 때 그렇게 하자.”(1724/2/6)

 

 

 

5. 통전적이고 관계적인 거룩

 


(1) 대화 및 언어 생활, 그 비방과 질책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어떤 말을 하지 말자. 그러나 성도의 명예를 아주 실추시키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또한 극도로 교만하거나 나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 그리고 황금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다. 종종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을 비난했을 때는 이 결심문에 비추어 엄격하게 검사해 보자.(결31)”

 


(2) 친절, 복수, 분노 등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대화할 때 싫어하거나,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는 표정을 하지 말고 가능한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도록 하자. 47번째 결심문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조심하자. 불신, 불만, 불안, 불평, 고집, 자만, 우울, 반감, 숨김, 게으름, 우물쭈물함, 또한 대화중에 이러한 것들을 조장하는 것들을 경계하자.”(1723/7/22)

 


(3) 부모와의 관계. “부모님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심려도 끼쳐 드리지 말자. 가능한 한 말이나 눙동자에 전혀 내색을 하지 않도록 해서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가족 중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조심하자(결46)”

 


(4)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면에서 지나치게 손해 없이 될 수만 있다면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항상 하도록 하자.(결33)” “다른 사람의 교만을 보고 내 교만을 애통해 하고, 다른 사람의 악의를 보고 내가 악한 말을 하는 것을 애통해 하는 기회를 삼자. 그리고 다른 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자.”(1723/7/30)

 


(5) 자연과의 관계. “묵상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아버지의 목초지에 있는 조용한 곳을 혼자 걸어다녔습니다. 목장을 거닐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내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은혜, 이 둘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말하자면 거의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요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순수함,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번개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만드신 천둥의 위엄 있고 두려운 목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자서전)”

 

 

 

Ⅳ. 결론

 


“나의 전생에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결1)”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에 어떠한 사람이 쓰임을 받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흥의 주역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기 위해 예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 역사의 진리를 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고 나무그릇도 있지만 쓰임을 받는 것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나단은 자기의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투쟁한 사람입니다. 저희가 새 천년에 주역으로 쓰임 받을 운명은 타고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2000년 복음역사에 주역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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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회심 이야기- 조나단 에드워즈

 

 

 

1. 뉴잉글랜드를 진동시켰던 대각성

 


 대각성의 도화선들

 


p.31. 

 


 그때부터 우리 주에서는 아르미니안주의 (Arminianism) 때문에 잡음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곳 사람들의 신앙에 위협적인 요인이 되었다. 매우 경건한 친구들은 그 문제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신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버리고 떠나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각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단 사상과 잘못된 도의들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기회가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배웠던 교리들의 진실성에 대해서 다소 의심했던 사람들이 곁길로 빠져 영원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자기들이 의심한 것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었다. 그 당시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자주 나누곤 하였다.

 


 비록 어떤 한 사람이 강단에서 이신득의에 관한 논쟁을 다루다가 큰 실수를 하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시기적절한 말씀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들의 영혼에 하늘의 놀라운 축복이 눈에 보일 만큼 뚜렷하게 임하였다. 그때 (p.32)자기들이 떨며 의심하고 염려하던 주요한 사항들에 관해서 아주 완전히 만족해하였다. 그들은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이전에 참되고 유일한 길로 알았던 오직 복음으로 구원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런 후 12월 말이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예전과 달리 놀랍게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5, 6명의 사람들이 차례차례 구원받는 회심을 하였고, 그 중 두서너 사람은 아주 강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한 여인의 각성과 영향

 


p.36. 

 


 어느 때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면, 모든 모임에서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이야기되어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죽기까지 하신 사랑, 영광스러운 구원의 방법, 하나님의 놀라운 거저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 죄인을 회심케 하시는 영광스러운 역사,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위대한 일들의 진실성과 확실성,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바리봄으로써 얻는 달콤함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전에는 단지 유흥과 쾌락을 위해서 시간을 냈다. 그리고 이전에는 단지 유흥과 쾌락을 위해서 시간을 보냈던 결혼식에서조차도 그렇게 했다. 오직 신앙 외엔 그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었다. 오직 영적 즐거움을 위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가운데 이전에 회심했던 사람들도 다시 소성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p.37)성령이 신선하고 비상하게 들어오심으로써 새롭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 자신의 영적 상태 때문에 어려워하고 고생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더 만족할 만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을 버리게 되었다.

 


2. 각성, 회심, 구원 그리고 열정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

 


p.71.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 처음으로 감동적인 은혜를 한 번 받았다고 해서 항상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희미하게 마음에 남아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의(義)를 포기하고 죽어 마땅하다고 자신을 정죄하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자신에게 풍성하다고 기뻐하며 만족해한다. 그들의 죄가 결코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서도 충분히 풍성한 긍휼이 있으시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벽하고 분명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p.72)위해서도 풍성한 긍휼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설명이 불과 얼마 되지 않고, 물어봐도 잘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복음에 나타난 긍휼의 계시는 그들이 격려받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의지할 뿐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가 아니다.

 


 때때로 위로받지 못하는 영혼들이 다시 소생하여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부르심과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마음에 달콤하게 느끼고서 소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나 분명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불쌍한 죄인들에게 베푸신 초청들과 약속들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고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므로 베푸는 살아 있는 특별한 활동들을 하였다.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한 가지는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복음의 근거를 처음 발견하고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 차 가고 있을 때와 자신이 회심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책감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짓눌린 후에, 하나님 안에 완전 충족한 것이 있고 그런 충만한 섭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는(p.73)것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크게 새롭게 될 것이다. 그같은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칠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본질상 영광스러운 것이요, 아주 새로운 충만한 기쁨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회심을 사모하도록 자극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회심하게 되면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그 아들께 바치려는 결심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게 만드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때에 그들을 위해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영혼의 거룩한 평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영혼의 거룩한 평안을 누리고, 또한 그분을 두려워하며 사랑하고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그분으로 말미암는 축복들을 소망하는 은밀한 충동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이제 회심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회심이 머리 속에 박힐 만큼의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그 이유는 이렇다. 그들이 '영접'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은 후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순종과 충만한 기쁨이 완전한 구원을 받은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완전한 구원 때문에 달콤한 만족감이 있다. 하나님의 (p.74)용서와 만족(죄인의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 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만족되심-역자주)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감이 있게 된다. 그 만족감은 하나님의 긍휼을 진정으로 받았다는 뜻이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바로 이 점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회심 그 이후의 영적 상태

 


p.98. 

 


 사람들은 회심한 이후에도 자신의 상태 때문에 괴로워했던 의심들과 두려움들의 근원을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많은 타락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들은 넘쳐 흐른다. 그들은 세상을 완전히 초월하여 사는 것 같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거의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늘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악된 행위들 때문에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진정으로 낮아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마음속에 어떤 타락이 남아 있는지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울하고 죽은 것 같은 심령을 느끼기 시작하고, 공예배와 다른 사적 예배 시간에조차 엉뚱한 생각이 왔다갔다하며 갈등을 안고 있을 때에, 그렇게 되어도 속수무책일 때 스스로 깜짝 놀란다. 아직도 열정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들의 열정을 상실한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아직도 자신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적인 기질들(교만, 시기, 복수심 그리고 내재해 있는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p.99) 다른 작용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어떤 못된 마음)을 느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실망하여 거의 낙담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외식주의자들이었을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회의와 갈등

 


 그들은 또한 주장하기를, 만약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들을 자기들이 원했던 대로 베풀어 주셨더라면 배은망덕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굳은 것과 악한 것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한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부패한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떤 선한 것도 나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회심하기 전보다 자신의 부패함을 더 크게 깨닫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런 심령의 상태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더 좋아지지 못하고 도리어 더 나쁘게 되었다.

 

 

 

 영적 대각성에 불을 붙였던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든 죄인들.....

 


"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신 32:35).

 


p.154. 

 


9. 모든 악인들의 고통과 그리스도를 거절하면서도 지옥을 피해 보려고 고안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인으로 남고, 한 순간도 지옥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대해서 듣고 아는 거의 모든 자연인은 스스로 지옥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재잘거릴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행한 것을, 자기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을 혹은 자기가 앞으로 하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저주를 피할 것인지를 자기 머리 속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모략들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단지 얼마 되지 않을 것임을 그들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각자 생각하기를 자기의 탈출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문제들을 더 잘 헤쳐 나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고통의 장소로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p.155)그는 속으로 실패하지 않도록 스스로 문제들을 정리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참하게도 자신의 모략에, 그리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존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단지 어두운 그늘을 의존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탈출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문제들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살았을 때 지옥에 대해서 늘 들으면서 지옥에 가리라는 예상을 했느냐고 캐 물으면, "아니요, 나는 결코 여기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달리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 모략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효과적인 수단을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것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도둑처럼 왔습니다. 죽음은 나의 생각을 뛰어 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내게 너무나 빨리 왔습니다. 아! 나의 이 저주받을 어리석은 짓! 나는 그때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헛된 꿈을 꾸면서 히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평화롭다, 안전하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 멸망이 내게 덮쳤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은 한 순간도 자연인을 지옥으로부터 구출(p.156)하기 위해서 어떤 약속을 하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영생에 대해서 혹은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하시거나 보호하실 것에 대한 어떤 약속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혜언약 속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들에 대해서는 '예' 요, '아멘' 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자녀들이 아닌 자들은 은혜언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어떤 것들도 믿지 않습니다. 중보자와 그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인들이 간절히 구하고 두드리는 것에 주어진 언약들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해 보았든지, 그리스도를 믿을 때까지는 그가 어떤 기도를 할지라도 아무튼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자연인을 구할 의무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연인들은 지옥의 무저갱으로 쳐넣으시려는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불구덩이가 마땅합니다. 이미 선고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엄중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지옥에서 그 무서운 진노가 집행될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진노를 진정시키거나 약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작은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한 순간이라도 붙들어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옥은 그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불꽃들은 모여 화염으로 그들을 태웁니다. 그들을 통째로 삼켜버립니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이 (p.157)불화하려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보자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안전 대책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에게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설 땅이 없습니다. 매순간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며, 약속치 않았으며 의무적이 아닌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칼이 매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 번득이고 있습니다. 그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게 하는 것은 오직 절대주권적인 은총과 하나님의 순전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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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 결심문, 자서전 분석(2)

- 영적 전쟁의 영웅-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신앙 생활이란 영적 전투의 삶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탄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한 이후 우주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죄는 본질상 하나님께 적대적이다.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난 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본질상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따라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였다가 하나님의 군사,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도가 된 순간부터 성도에게는 영적인 원수가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죄악된 자신의 본성과 여전히 죄악가운데 있는 세상과 이 모든 육신과 세상을 조종하는 악의 왕인 사탄이 성도들의 신앙의 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 세상, 사탄과의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세상도 사탄도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을 발판으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어떤 면에서 부패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해도 좋다. 에드워즈의 삶 속에서 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영적 전투는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나타난다. 에드워즈의 삶은 날마다 영적 전투의 삶이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적 전투의 모습을 다음의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싸움

첫째, 에드워즈의 삶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와 싸운다는 것이다. 자기의 죄악된 본성 즉 육신과 싸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죄악된 본성에 물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피조물 됨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인간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선한 존재가 아니라 타락하여 죄책을 가지고 있으며, 죄의 세력 하에 놓여있으며, 죄에 오염된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믿는 순간에 우리의 죄책은 이미 용서를 받고, 신분상으로는 죄의 세력에서 이제 벗어난 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아직 죄의 오염된 상태에 처해있고, 죄의 공격에 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의 성숙은 곧 타락한 부패의 요소를 아직도 몸 속에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요, 자기 속에 있는 죄와 부패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점점 깊이 알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면서, 할 수 있는 한 내 속에 있는 죄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죄를 완전히 죽이는 것이다. 여기서 죄를 죽인다는 말은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세력이 남아있지만 전혀 활동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거듭난 성도로 하여금 죄를 짓는 세력으로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따르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또한 동일한 진리를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이러한 자기 부인, 자기 속에 있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을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모티피케이션(Mortification) 즉 죄죽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모티피케이션은 성도의 신앙성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특히 청교도들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의 절반은 바로 이 모티피케이션을 계속적으로 실천해 가는데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명작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모티피케이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죄와 유혹(은성)」이라는 저서다. 이 저서에서 오웬은 참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장군답게 우리 성도들이 싸워야 하는 원수중의 하나인 우리 육체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마치 손자병볍처럼 오웬병법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모티피케이션은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주제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모티피케이션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묻혀진 것은 곧 영적 성장이 멈추었다는 증거이며 거룩이 사라졌다는 증거이다. 현대교회의 수많은 교인들이 영적으로 갓난아이 상태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축복만을 구하고, 세상의 성공만을 구하는 것은 바로 신앙성장의 첫걸음, 거룩의 첫발자국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자기 부인, 부패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죄를 죽이는 일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자신과의 싸움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 성격의 장단점 중에서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고치는 것도 포함이 된다. 여기에는 또한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도 포함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철저한 모티피케이션의 실천이야말로 에드워즈의 거룩한 삶을 이해하는 비결중의 하나다.


"내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결심문55, 참고 결심문 68)".


"너무 지속적인 죄 죽임과 신앙에 대한 너무나 철저한 적용은 건강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실천하고 경험하겠다. 만일 내 건강이 완전히 상할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리 피곤하거나 지치게 되는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1723년 1월 12일)".


"죄를 크게 죽여본 사례를 가지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63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성도들이 보통의 정도로 행하는 그런 작은 일들은 은혜가 많이 증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실행해야 한다. 내가 옛날의 좋은 행동들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될 때, 만일 그런 좋은 행동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1723년 1월 14일, 참고 1월 5일, 7월 23일, 8월 10일, 8월 31일, 1724년 3월 16일,5월 4일, 10월 12일, 1724년 2월 22일, 11월 22일, )".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대한 육체의 본능에 대한 절제


둘째,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우리 안에 있는 육체적 본능의 욕구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육체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욕구이기는 하지만 타락으로 인해서 이러한 육체의 본능적인 요구도 변질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요구하는 이상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를 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성장이란 바로 이러한 육체의 본능적 욕구가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절제는 처절한 전투 현장처럼 아주 힘든 싸움을 통해서만이 얻어 낼 수 있는 결과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자기 속에 있는 식욕과 수면욕구에 대해서 엄청난 경계심을 가지고 이러한 욕구들을 제한시키려고 노력을 했다. 때로 이러한 싸움에 패배한 적도 있었지만 에드워즈는 7전 8기의 정신을 가지고 이러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결심문20)".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보자(결심문40)".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을 절제하는 문제에 있어, 몸과 정신 양면에 걸쳐 매일 아침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루 중에 내가 짓기 쉬운 죄를 생각하고 하루를 어떻게 잘 보낼 것인가를 결심하고, 그런 죄를 피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1723년 1월 10일, 참고 2월 5일, 2월 16일, 3월 31일, 6월 15일, 1724년 2월 23일, 9울 2일, 9월 30일)".

 

 


끊임없는 회개의 삶


셋째,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날마다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에서 우리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해 질 수 없다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회개할 것이 있는 자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실제적인 면에서는 죄를 그만큼 덜 범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더욱 더 큰 죄에 대한 의식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큰 역설이다. 죄인일수록 자기의 큰 죄를 아무 것도 아닌 양 생각하며 자기는 별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거룩한 사람일수록 자기의 사소한 죄를 큰 죄로 여기며 자기의 죄가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기의 허물과 오점을 보지 못하며, 빛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점과 티를 더 분명히 보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어두운 밤에는 집안이 모두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낮에 햇볕이 집안을 비추면 온 집안이 먼지투성이인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도의 회개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 끝나는 것이며, 죽기 전까지 거룩해지는 과정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과정이며, 신앙의 성숙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연약과 부족과 죄악을 더 많이 그리고 크게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제임스 팩커의 관찰처럼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내가 성도중의 가장 작은 자'라 고백했다가 몇 년이 지난 다음에는 '내가 사도중의 가장 작은 자'라고 인식했다가 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에드워즈는 삶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측면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회심이후 오랫동안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자기 속에 부패와의 싸움을 통해서 많이 성결하게 된 에드워즈는 노댐프턴에서의 목회 기간 중 자신의 죄의식을 느끼는 정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노댐프턴으로 이사 온 이래로 종종 나는 나 자신의 죄악성과 사악함을 아주 분명하게 보고 느꼈습니다. 아주 빈번하게 나는 큰소리로 울면서 오랫동안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억지로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 나는 나 자신의 사악함을 아주 크게 느꼈습니다. 내가 전에 회심할 때보다도 더 마음이 나쁘다고 느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 죄악을 철저하게 다루신다면 내가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류가운데서 가장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 종종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가장 낮은 밑바닥에 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들이 와서 자기 영흔의 상태에 대해서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들이 느낀 죄악성을 자기들은 사탄처럼 나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런 표현은 내 죄악성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느꼈던 나의 사악함은 말로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치 내가 어마어마한 대홍수나 태산에 파묻힌 것처럼 내 모든 생각과 상상이 완전히 죄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 죄는 무한에다 무한을 더한 것처럼 또한 무한에다 무한을 곱한 양만큼 쌓여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밖에는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수년동안 매우 자주‘무한히, 무한히’라는 표현이 내 생각과 내 입술에 붙어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을 살펴서 죄를 보면 죄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지 지옥보다 한없이 더 깊은 무저갱 같습니다(자서전)".


좀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싸워야 할 죄는 육체의 본능적 욕구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많은 영역에도 있다. 모든 타락한 죄인들의 부패한 본성 중에서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끈질긴 원수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과 게으름일 것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있다. 이런 면에서 성도의 거룩이란 곧 이러한 죄악들과의 싸움이며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이런 죄악들을 깊이 회개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교만에 대한 수많은 경고가 나오며 또한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일기 중에서 마음속에서 나오는 죄악들 가운데 특히 교만과 게으름의 문제를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요즈음 전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선하신 뜻에 매사를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아주 실감나게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의 의에 대해서는 더 많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행위들 또는 경험이나 어떤 생각이나 생활 속에서의 선함 등의 이유 때문에 내가 기뻐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매스껍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는 교만과 자만심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훨씬 예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독사가 내 주위의 사방에서 계속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자서전)".


"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있다면 즉시로 그런 것들을 버리자(결심문12)".


"내가 다소 겸손한 상태에 있을 때보다 교만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오, 나는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인지! 겸손이 교만보다 얼마나 더욱 사랑스런 운지! 지금 나는 분명하게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을 느끼고 있다. 나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보다 겸손한 즐거움이 얼마나 훨씬 더 강도 높은 즐거움인지! 나 자신이 완벽하다고 나를 부추겨 세우기보다는 나를 겸손하게 낮출 때 얼마나 좋은 느낌이 인지! 오, 교만보다 겸손은 얼마나 더욱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지! 오,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철저하게 겸손하게 만들어주시고, 항상 나를 모든 교만으로부터 지켜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겸손이 주는 즐거움은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내적이고, 훌륭한 즐거움이다. 교만한 사람은 얼마나 꼴 보기 싫은가! 벌레가 교만하여 자기를 추겨 세운다면 얼마나 꼴 보기 싫은가! 교만할 때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고, 비참하고, 눈멀고, 속고있는 불쌍한 벌레인가!(1723년 3월 2일)".


"절대로 고의로 어떤 일을 게으르게 하지 말자. 자주 내 게으름을 점검하자(결심문27, 참고 결심문 61)".


"이번 주에는 불행하게도 주간평가가 저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열정이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다....의무를 행하는 것을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신앙적인 생각을 하는데 힘을 쏟지 않은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을 깨닫고 고치기로 결심했다(1723년 1월 5일, 참고 1722년 12월 20일, 1723년 1월 1일, 2월 16일, 2월 23일, 3월 2일, 5월 18일, 7월 3일, )".

 

 


세상의 부와 편안한 삶에 대한 거부


넷째, 에드워즈의 영적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육신외에 성도가 싸워야 할 또 하나의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상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바로 세상이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삶의 방식이 세상이다.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은 곧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곧 부유하게 살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과 싸워야 하는 영적 군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성도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리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을 쫓아 온 것이라(요일2:1-15)"


에드워즈의 삶은 바로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영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진 그였기에 그는 더욱 자신의 삶 속에서 이러한 세상의 유혹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몸이 약해지는 한이 있더라고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며 또한 절대로 세상 적인 편안함이나 쾌락을 바라거나 구하지 않기로 다짐한다(1723년 1월 6일)".


"왜 내가 이렇게 빨리 무기력하게 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할 수 없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나 자신을 방치해두곤 했으며 그래서 내가 편안함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나의 마땅한 권리로서 휴식을 취하게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러고 나면 실제로 내가 피곤하고 지친 것처럼 속게된다. 반면에 편안함을 바라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게된다면 나는 휴식을 위한 공백시간이 없이도 동일한 활력을 가지고 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성경 읽기에 있어서 이것을 체험했다. 또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를 암기하는 것에 있어서나 다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1723년 1월 12일)".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받아들이며, 그 밖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하더라도 만족하리라 새롭게 다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은 잘 되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불평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겠다. 최근 나는 이와는 반대로 행동했다(1723년 2월 17일 참고 1월 10일, 2월 21일)".

 

 


고난과 시련에 대한 태도


다섯째, 에드워즈의 영적 싸움은 고난과 시련에 대한 인내의 싸움이었다. 성숙한 신앙, 성숙한 성도의 특징은 무엇보다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서 잘 드러난다. 욥기 전체가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전체에 걸쳐서 성도들이 당하게 되는 고난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고난 속에서 신앙이 진위여부는 드러나며 참 신앙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죄를 지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징계의 수단으로서 고난이 따라오게 되지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비밀은 단순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의 차원을 훨씬 넘어 선다는데 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성도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교육의 한 방편으로서도 사용된다는데 고난의 깊은 성경적 이해의 핵심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난은 성도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스도인이면 이 세상에서 누구나 고난을 당하게 되어있다. 고난 속에서 불평하지 않고 또한 낙담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고난 때문에 신앙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을 가지고 고난을 통과해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신앙이 성숙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훈련코스일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요동치 않고 신앙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신앙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받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니라"


"무릇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하리니 현재 우리의 고난은 장차 받은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19-21)".


에드워즈는 아주 성숙한 태도로 고통과 고난에 대처했다. 에드워즈는 고통과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난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도록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고난에 지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는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자(결심문10)".


"고난 후에는 고난으로 인해 내가 더 나아진 점이 무엇인지, 어떤 유익을 얻었는지.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자(결심문67, 참고 결심문 57))".


"내가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은 아주 쉽게 나를 낙담시키고, 내 정신적인 활력을 빼앗아가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에도 불구하고 온갖 종류의 고통을 복된 기회로 활용하자. 또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57번 결심문에 따라 행하는 습관을 만드는 기회로 활용하자. 그리고 1월 10일 일기와 43번, 45번 결심문 또한 1월 12일, 2월17일과 21일, 5월 1일 일기에 따라서 내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천국에만 고정시키는 기회로 활용하자. 또한 고통을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내를 배우는 복된 기회로 삼으며, 나 자신을 신앙적인 실천에 몰두함으로써 내 생각을 고통에서 떠나게 하자. 또한 나의 마음을 더 낫게 만들어주는 것이 고통의 본질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삼자. 고통이 현재는 비록 슬퍼 보이지만 고통에 의해서 내가 개선된다면 내가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1723년 7월 23일)".


"고통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앉아서 고통이 주는 괴로움에 대해서 곰씹으면서, 고통으로 인한 나쁘고 어두운 면만을 계산하고, 오래 동안 고통의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장 나쁘고 치명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쁘게 말하며, 고통에 대해서 실컷 떠들어대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며 옛 고통을 더 크게 키우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반대로 행동하게 되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이 주는 긍정적 측면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또한 고통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 고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 고통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게 될 것이며, 실제로 상당한 정도까지 그 고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1723년 11월 26일, 참고 7월 31일, 8월 29일,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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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브리지, 1755년 5월 27일
(조나단 에드워즈가 교회에서 쫓겨나 말년에 인디언 사역을 하고 있을 즈음에)

 


 

사랑하는 아들에게

너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너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온통 너에 대한 생각 뿐이어서 자주 너를 생각하고, 자주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

너가 비록 우리와 또 친척들로부터 멀리 있어도, 너가 비록 내 시야에 안 보인다할지라도,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을지라도,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여기 이곳 오노호콰하에 계시고, 너도 항상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우리는 마음이 평안하단다.

우리는 그분에게 가서 너를 보살펴달라고 할 수 있고,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할 수 있단다.

 


그분을 잊지 않고, 또 그분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항상 너의 눈을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그분을 경외하면서 살거라.

매일 모든 열심으로 그분을 구하거라.

그분만이 너를 행복하게도 하시며, 그분이 원하신다면 너를 우울하게도 하실 수 있단다.

 


또한 너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너의 영혼의 영원한 구원과 장차 다가 올 너의 삶의 모든 것도 그분의 뜻과 허락하심에 달려있단다.

지난 마지막 주 화요일에 데이빗이 생을 마쳤단다.

너도 알고 있겠지. 너와 함께 뛰놀기도 했고, 우리집에서 묵기도 했었으니까.

 

 

이제 그의 영혼은 영원한 세상으로 갔단다.

그가 죽음을 준비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겠지.

어린 나이에 죽을 수도 있고, 나이가 차서 죽을 수도 있단다.

 


데이빗은 너보다 나이가 어렸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거라.

너는 거듭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말씀을.

너가 참으로 회심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선한 증거를 갖기까지 절대로 평안해하지 말거라.

하나님께서 너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셔서 다시 안전하게 스톡브리지로 돌아오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꼭 기억하거라. 인생은 불확실하단다.

너가 어느 한순간 생을 마칠지는 모르는거란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단다...

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윈저에서 너에게 사랑을 담아 보낸다.

우리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단다.

 

 

다정하고 깊은 애정으로
너의 아버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언 머레이(Iain H Murray), 조나단 에드워즈 : 다시 쓰는 전기(Jonathan Edwards : A New Biography), pp. 394~395 중에서
 
 http://blog.naver.com/stchopeter/15001215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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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점검에 관하여 -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논문을 중심으로 -

 

제 1부. 성경이 신자들에게 주는 경고


성경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2,23).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 이 사람들의 삶에는 능력과 헌신과 증거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고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으뜸가는 신자들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확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 마지막 순간에야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기만의 위험은 혼인 잔치 비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 10-12). 여기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혼인 잔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혼자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으니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고 생각해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태연하게 잔치가 시작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실로 우리 마음은 그러하다. 이 사람은 자기 상태에 전혀 반성하지도 않았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이 사람은 잔치에서 쫓겨났다.

 

신앙에 있어서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대단한 위로와 힘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확신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면 자기 점검이다. 정확한 점검이 있은 후에야 올바른 확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 2부. 자기 점검도 우리의 의무인가?

 

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각별한 경계심을 행사하도록 요구하신다.
신 4 : 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 4 : 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6 : 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엡 5 : 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우리가 이 일을 게을리하고 부주의한 방식으로 살아가다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된다.

 

3)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고려한다면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모든 사악한 길을 버렸다 할지라도 한 가지 죄악에 묻혀 살면 그것은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고의적으로 악의를 품지 않고 산다 해도, 부주의하게 살아간다면 부패한 우리 마음의 기만성 때문에 하나님을 노엽게 할 것이다.

 

4) 우리 마음은 본래 악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성도들 속에도 죄의 세력이 존재하므로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속에 죄의 세력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닐 것이고 우리는 죄악을 행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으니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고후 11 :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전 5 : 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는 죄악 중에 살면서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지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 19 : 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3 부. 사람들은 왜 속고 사는가?


1) 죄는 본래 사람의 눈을 혼미하게 하고 속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죄가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마음을 더 어둡게 하고 기만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될수록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져서 자기의 행실을 뉘우칠 줄 모르게 된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에 있는 정욕은 육적인 이성(理性)을 자극하여 모든 교활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자아(自我)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발동하여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도록 편견을 심어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행동에 양심을 맞추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각별한 부지런함으로 우리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히 3 : 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 21 :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렘 17 : 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 28 : 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깊이 살피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리 마음을 살펴 주시도록 해야 한다.
시 139 : 23, 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사탄이 우리를 속여서 죄악된 길에 계속 머물도록 유인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의 육적인 이성(理性)을 사로잡아 우리에게 잘하고 있다고 아첨하고 양심을 눈멀게 한다.

 

3) 오래되고 널리 퍼져 있는 관습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전체적인 기류가 악하면 처음에 양심에 꺼리던 사람도 이내 괜찮다고 생각하고 서슴없이 그런 행동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사람들의 실례를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을 눈멀게 한다.

 

4)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무에 대해서 세심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죄를 모두 개혁한답시고 개인적인 경건 생활과 공예배 출석에만 열심을 낸다. 그리고는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의무들에 대해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태는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제 4 부. 약은 없는가?


우리의 마음이 어리석고 속기 쉬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신 말씀 안에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빛을 비춰주셨으므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탐사해 본다면 우리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완벽하고 진실된 규칙을 제정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을 부지런히 익히고 완전하게 알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규칙을 알려주셨는데도 익히지 않아서 무지함 가운데 범죄한다면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시 119:10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 119: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하나님의 규칙을 안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그 규칙에 비추어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조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규칙과 맞는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애 3: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자기 점검을 위한 도움말 여섯 가지


(1).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항상 돌아보고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행실 사이에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일치하는 것은 무엇인지 숙고하고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그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딤후 3 :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신앙이 탁월한 사람들과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죄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이 정말로 죄가 되는지 탐사하라.

 

(3).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든 방식이 임종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인지 조사하라.

 

(4).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을 현명하게 받아들이되 우리가 어떤 죄악된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는 기회로 삼도록 하라. 원수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도 새겨듣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상대방이 악의를 품고 행하는 비난 속에도 우리 안에 실재하는 죄악을 겨냥한 비난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뒤에서 우리를 비방하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잘못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활용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그들이 비방하는 대로 무슨 죄악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다.

 

(5).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볼 때 우리 자신에게도 같은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보라.
갈 6 :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우리 자신의 탐사나 점검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기에 앞서, 행하는 도중에, 행한 다음에 기도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라. 다윗이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라.
시 139: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5 부. 자기 점검의 구체적인 항목

제일 먼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 밖에 있는지 점검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생과 영벌(永罰)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적이 있는지 진정으로 회심하였는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등을 점검해야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 : 5).


또 이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도 혹시 하나님께서 몹시 불쾌하게 여기시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매우 신중하게 탐사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듭난 신자들이 점검해야 할 내용이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적용해야 할 내용이다. 혹 우리 생각 속에서나 행실 속에서 어떤 정욕을 만족시키며 살지는 않았는지. 또 어떤 경건한 의무들을 빠뜨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고 있는 죄를 용납하고 있지 않은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제자도에 어긋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구체적이 점검 항목은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좋은 기준을 스스로 마련해서 활용한다면 유익할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자기 점검표는 19세기 대부흥의 핵심인물이었던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요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제시한 자기 점검 항목을 표로 만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시간을 내어 은밀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자기 점검을 하도록 하자. 우리 신앙에 파고 들어올 수 있는 위선과 기만과 거짓의 뿌리를 색출하고 제거하도록 하자.


http://blog.naver.com/stchopeter/150012150635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xi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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