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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추수의 감사 (여호수아 5:1-12)

by 【고동엽】 2022. 8. 22.

첫 추수의 감사   (여호수아 5:1-12)


오늘 이 말씀은 간단한 내용이지만 상당한 배경을 뒤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입성을 했지만 여리고 평지에서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아직 여리고를 정복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를 정복할 때까지의 그 기간이 상당한 기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이 얼마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땅의 소산

   요단강을 건너서 곧 바로 여리고를 침공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 땅에서 곡식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먹었더라 하고 그 이튿날에 만나가 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침에 만나를 내려주심으로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에 나는 곡식을 먹게 된 그때부터 만나가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고 가나안의 열매로 살았다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양식이 필요했겠습니까?
   우리는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다고 하니까 예사로 먹었는가 보다 라고 하지만 추정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일년 농사를 지어서 열매를 거두었다고 보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땅의 소산을 먹는 생활을 실제로 시작했는데 만나를 먹으면서 여리고를 정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살면서 여리고를 정복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추수의 감격을 누렸던 곳이 바로 여리고 평지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살펴보면 "그 땅의 소산"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땅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라는 평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하나님은 그 땅에서 나는 소산으로 먹고 살게 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이라는 개념이 히브리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땅이 있을 때에는 만나가 주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땅의 열매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수고의 양식

   여러분, 만나 먹고 사는 게 편합니까? 농사 지어서 거두면서 사는 게 편합니까? 만나 먹고 사는 게 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땅을 주마. 이제는 너희들이 이 땅에서 농사지어 거두어 먹으라 하고는 만나를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에게는 수고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결코 먹고 살 수 없는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 가나안 땅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광야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만나를 통해서 편하게 살아 왔지만 이제 약속의 땅은 더 편할 줄 알았지만 더 수고로운 것입니다. 땅을 일구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 그 속담의 의미를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십니까? 이 말의 해석을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개처럼 번다는 말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면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뜻으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만 벌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개처럼 벌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교육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히 뜻이 있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의식적인 위기가 하나 있는데 먹을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답니다. 먹기 싫으면 예사로 버리고 우리가 먹고 사는 식물, 밥 한톨, 우리가 먹는 간식 하나의 귀중함을 알고 먹어야 되는데 요즘 아이들의 의식은 당연히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있는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친 소유가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 먹을 게 항상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의 귀중성을 모르는 그 가난이 악성 가난이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대들이 먹을 게 많다는 것입니다. 입고 다니는 옷을 보세요. 그러나 그 좋은 옷을 입고 맛난 것을 풍족하게 먹과 입는 것의 귀중함을 모르는 정신적인 빈곤이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난의 의미

   가난은 남에게 줄게 없는 게 가난입니다. 내 먹을 것도 궁핍하고 남에게 줄게 없는 게 가난입니다. 줄 게 없어서 안주는 사람보다 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줄 게 없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줄 것은 없습니다. 남에게는 못 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교훈의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말아라. 그러나 가난의 의미는 알고는 살아야 된다.' 우리는 가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가난하더라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해지더라도 그 가난의 의미를 알고 살자는 것입니다. 가난의 의미를 알아야 가난한 자를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가난의 생활은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이제는 농사를 지어서 먹으라고 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여러분, 이 물질 한 푼의 귀중함을 하나님으로부터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고 쓰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추수감사절은 약속의 땅에서 실행되는 개념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때는 추수감사절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농사한 게 없기 때문에 만나를 거두어 먹는 시절에 무슨 감사절을 지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광야에서 받았던 율법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유월절을 지키고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키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 어디일까요? 우리는 약속의 땅이 없는데 추수감사절을 지킬 의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우리는 약속의 땅이 없습니다. 공간적으로 보면 약속의 땅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약속의 땅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직업이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영적으로는 약속의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약속의 땅에 사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직업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그 일터가 약속의 땅임을 믿으십시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예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이 말씀 안에 사는 게 약속의 땅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추수절을 지켜야 됩니다.
   그리고 이 가나안 땅의 추수는 영구한 감사의 추수입니다. 한번만 지키라는 게 아니라 이제 첫 추수를 감사하는 이것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절을 맞아서 사는 자세를 바로 갖추고 살기 바랍니다.
   한일 노동자의 의식을 비교한 자료가 있습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사장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발로 땅을 한번 차면서 욕을 한답니다. 그런데 일본 노동자들은 내가 몇 년 후에 저런 차를 타겠는가 라고 계산을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노동자들은 아예 내 팔자는 저런 차는 못 탄다, 무슨 도둑질을 하든지 엉뚱한 짓을 해야 저런 차를 탄다, 사장들은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저런 차를 타느냐 하고 욕만 하지 내가 앞으로 저런 차를 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한국의 사장과 노동자는 건너가지 못하는 관계인줄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노동자들은 안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성공의 자리에 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절대로 원망하고 악심을 품고 욕하는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슬픈 현실입니다. 사장과 노동자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아예 체념하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저 자리, 큰 도둑질이나 해야 성공하는 자리 라는 식으로 체념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는 자세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자세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남의 성공을 격려해주고 박수 쳐주고 나도 따라갈지언정 시기할 필요도 없고 체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주신 하나님의 추수의 계명은 참 엄격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만 주신 하나님은 이제는 네가 수고해서 네가 농사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위에 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되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하나님이 꿈을 보여주셨는데 칠년은 풍년이 들고 칠년은 흉년이 든다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요셉이 칠년 풍년 동안에 앞으로 다가올 칠년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곡식을 저장하여 애굽의 칠년 흉년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아하 이게 바로 인생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는 칠년 풍년도 있고 칠년 흉년도 옵니다. 계속 풍년만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또 계속 흉년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요셉의 칠년 풍년 그리고 칠년 흉년은 우리 인생에게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풍년도 적응해야 되고 흉년도 적응해야 합니다. 풍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고 흉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됩니다. 이것을 청년기와 노년기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사십대 중반의 아들이 팔순이 다 된 아버지 앞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마흔 여섯입니다. 그런데 오십이 되면 이제 저는 퇴직을 해야 됩니다." "뭐, 오십에 퇴직을 한다고? 그렇게 일찍 퇴직하느냐" "아버지, 요즘 세상이 변해서 오십이 되면 우리 직장에는 다 퇴직을 합니다. 그래서 나도 퇴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네가 퇴직을 하면 내 나이 될 때까지가 사십년인데?" 그러니까 이 아들 대답이 "아버지, 제가 살 세상은 좀 더 오래 살 것이기 때문에 오십년은 거뜬히 더 살아야 됩니다. 이제 오십년은 전반부고 앞으로 오십년 더 살 대비를 해야 됩니다." 그런 부자간의 대화가 있습니다.

   존재냐 소유냐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가 칠년 풍년기가 있고 칠년 흉년기가 있지만 이 풍년기의 대비가 없으면 칠년 흉년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늘 우리는 범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고 하는데 두 가지 자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이 둘 중의 하나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사람이 소유가치와 존채가치를 말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욥은 존재형의 인간입니다. 욥은 가진 것을 다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욥의 아내는 소유형의 인간입니다. 재물 없어지니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는 저주가 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자세로 우리가 살지 않는 한 인생살이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칠년 흉년을 너무 앞당겨서 겁을 집어먹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신앙인으로 살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장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놓치는 것은 자꾸 인간적인 수단을 부리려 하고 인간적인 방법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해야 되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할 때는 믿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생살이에 가난이 오는 것입니다. 의미상의 가난입니다. 밥은 먹으면서도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첫 추수를 감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생활보다 더 여호와를 가까이 모시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더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야 됩니다. 광야에 살 때는 여리고라는 적이 없었습니다. 광야에는 가나안 칠족이 없었습니다. 그저 내려주는 만나를 주워먹고 내려주는 메추라기를 잡아먹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면 되었지만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이제 그런 자세로는 못삽니다.
   예수 믿고 사는 우리는 광야에 살 때처럼 그런 자세로는 안됩니다. 하나님 모르고 불신자처럼 사는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존재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실 때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하는 존재 의미가 있는 인생으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어떤 이는 설교하고 간 사람을 잘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사람보다는 그 분이 전해주고 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증거해주고 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효과가 나타나야 됩니다. 사람을 자꾸 붙잡으면 안됩니다. 세례 요한을 붙잡으면 안됩니다. 세례 요한이 전해주고 간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광야의 소리다 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를 의식하지 마십시오. 설교자가 전해주는 그 말씀을 여러분들이 붙잡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사셔야 됩니다.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사시면 그것이 약속의 땅입니다. 말씀 안에 사는 것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금년 추수감사절에 충만히 누리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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