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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형벌이 과연 공평한가? 눅16:19~31

by 【고동엽】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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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형벌이 과연 공평한가?          눅16:19~31               출처

 

팀 켈러 설교 요약

 

매주 우리는 뉴욕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가장 불편히 여기도록 만드는 주제들을 살펴보고 있어요

 

이번 주에 살펴 볼 주제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판사라는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장 이해할만한 반박은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말하죠

‘지옥의 심판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란 개념과 공존하는가요?’

지옥의 심판이 존재하는데도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있나요?'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1.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

‘자기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았으므로’

 

많은 설교자들이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석연치 않다고 말합니다.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단지 매일 잔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간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에 대해, 팀 켈러의 해석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자와 거지죠

오래 동안 주석가들이 해석한 바에 따르면

이 비유에는 놀라운 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 비유에서만 등장인물의 정식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든 비유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안 나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거지로 등장하는 ‘나사로’의 이름만 나옵니다

 

한 등장인물에게 이름이 있으니

부자도 이름이 나올 법 하지만

성경에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있는 한 등장인물과

이름이 없는 다른 등장인물

예수님의 이 대조는 의도적이라 볼 수 있죠

 

무슨 뜻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의 배경에서

무신론자 혹은 타종교인이 부자인 것은 성경해석상 불가능했습니다

 

이 부자는 당연히 성경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에게 기도하고

또한 율법도 외적으로 지켰을 것입니다  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지옥에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말입니다

왜죠?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25절에 나옵니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마음 껏 누렸다!’ 마16:25

 

부자는 이미 얻었다는 거죠

네 인생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이미 누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이 비유를 해석하는

핵심 키key 라고 할 수 있는데요

‘네 인생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얻었다’는 말은 과연 무엇 뜻입니까?

 

물론 이것은 절대적/성경적 가치의 최고 좋은 것은 아니고

부자의 자기 생각에 ‘최고 좋은 것’입니다

 

이를 설교자 팀 켈러는 ‘최고 선’개념에 매치 시켜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Summum Bonim 이라는 개념을 말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선’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최고 선’은 무엇입니까?

즉,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궁극적 가치(최고 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최고 선)은 무엇이며

여러분에게 삶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 스스로가

그게 ‘최고 선’이라고,

‘궁극적 가치’라고

가치 부여, 의미 부여하는 그것이

각자에게 다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그것의 성취가 자기 삶의 목적입니다

 

부자는 그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마음 껏 누렸다!’ 눅16:25

과거형입니다

 

부자에개 그 최고 선이란,

그에게는 <지위와 부>가

자기 정체성의 기초이자 최고 목표였습니다

 

이제 영원의 세계에서

그 지위와 부가 사라지자

이 사람 자체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영원의 세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마저도 없었습니다

(교도소에 가면 번호를 부르지요)

그의 정체성은 없어졌습니다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죄의 정의에 대해 씨름합니다

그리고선 죄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라 정의하죠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데 대해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80년 정도만 살고 끝날 것이라면

별로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나의 나쁜 성향이나 질투, 죄성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산다면,

내 삶 전체에서 악화되는 정도는 극도로 심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이

우리 성품의 변화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상에서도 변화를 나타내다가

영원히 계속 더 하나님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영원히 마귀처럼 더 악하게 변화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영혼이 거듭나고,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백만 년만 지나도

나 자신은 지옥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죄의 악순환이 1백만 년 더 계속 가속되고, 증가되니까요

 

지옥은 불평불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항상 불만에 가득차서 남을 비난하고

그런 가운데

자기 반성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옵니다.

그런 사람은 현재 지옥을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저 불평을 계속하다가

결국 불평기계가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반성,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 자신이 ‘지옥’이 됩니다.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즉 회심하지 않으면

자동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커리어(자기 경력)에 대한 사랑을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커리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면

커리어에 무언가 흠이 생길 때

단순히 상처 받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파괴됩니다.

 

스스로를 쓸모 없다고 여기고

심해지면 스스로의 몸을 다리 밑으로 던질 수도 있는 거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그 사람, 또는 그 연애관계에게서 찾으면

(정답은 그런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연인에게 둘 때,

만약 그와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단순히 상처 받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파괴된다는 거죠. 심지어는 죽고 싶어하죠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것들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어요

 

그것을 빼앗길 때 인생이 마비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단지 화나는 정도가 아니라 끔찍하게 경멸적이 되죠.

낙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끝도 없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겪는 지옥불입니다.

그렇게 현실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단원을 요약하겠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또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지옥은 스스로 선택하는 정체성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정체성, 자기 만족을 찾아야 되는데

자기 생각에 좋은 것을 다 누리려고합니다

 

다른 말로,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입니다

그 잘못된, 죄성의, 자기 육신의 소욕에 따른 정체성으로 계속 살면..

회개하기 전까지

영원한 현재 지옥에서 살죠.

 

그 결과, 그걸 빼앗기게 되었을 때 

자아붕괴, 자기 삶의 붕괴를 맞이하게 되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다가,

즉 매일을 지옥같이 살다가,

결국 죽어서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지옥이라니까요!

이 현실 속 '미완성의 지옥'입니다

 

지옥은 자기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거기로 보내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선택하는 곳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기를 내버려두고,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최고 선, 여러분의 이 세상에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이루고 싶은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십니까?

 

바꾸어 말하면

나사로는 비록 현세에서 부자로는 살지 못했지만

자기의 최고 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이루고 싶은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국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2. 둘째로, 지옥의 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세상에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판과 하나님과 지옥의 교리를 믿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며

따라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다.' (물론 오해입니다)

                 

▲제 팀 켈러가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점은 25절입니다

다른 주석가들도 여기서 놀라죠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지옥을 바라보며

부자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나요?

 

‘이 악마같은 죄인아!’ 이러나요?

아닙니다

‘얘야 son’ (*헬, 테크논, 친밀한 사이에 부르는 호칭)

 

어느 주석가는 말합니다

이 말에는 연민이 묻어 있습니다 

슬픔도 묻어있고, 비극적인 마음도 묻어 있죠

아브라함이 부자를 지금 경멸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도, 하나님도

성경을 믿는 그 누구도

지옥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중에 지금 누가 지옥으로 달려가는지 거의 알기가 불가능하지만요!

    

▲미로 슬라브 볼프가 <배제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

이라는 책에서 말한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이 책을 자주 인용하는데요

 

미로 슬라브 볼프가 쓰기를

‘자신은 크로아티아 사람으로서

발칸 반도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을 겪었거나

혹은 겪은 사람들을 자기가 가까이서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보복과 앙갚음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했어?

너에게 그대로 돌려줄거야

나한테 준 고통 만큼 되돌려주겠어’

 

하지만 그가 말하길

이런 보복의 사이클은

‘하나님이 심판’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아서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지 않으니까,

그걸 이론적으로는 믿겠는데,  현실 세계에서 믿어지지 않으니까

자기가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거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정녕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가 나서서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습니다.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에 화를 내시지 않는다면

그런 신은 예배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든 폭력적 의지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판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질 때입니다.

*지옥은 그 공의로운 심판의 최종 절정이죠

 

"나의 책 주제는 이것이다

비폭력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처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보복, 궁극적 심판인 지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칸 반도의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데..

포괄적으로 말하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믿음!

   

이 책에서 볼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집이 적군에 의해 불탄데다가

가족이 살해되고, 성폭력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을 만난다면,

그가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보복의 사이클로 들어갈 때

그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폭력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않아!’라고 말해 주는 것?

이런 피상적인 말로는 그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런 불합리를 당한 사람은 이렇게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칠 것입니다

‘정의는 이루어져야만 해!’ 반드시 보복해야 돼!

신이 보복을 안 하시거나 그게 더디면

내 손으로라도 해야 돼!'

 

볼프는 말합니다.

‘제가 아는 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류의 마음을 충족시키면서도

피의 보복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해결책은

신이 존재하고

그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공의로운 심판)이란 믿음 뿐입니다.'

 

'만약 심판하는 신이란 개념을

(지옥 심판을 포함해서요)

믿지 않으면

인간을 복수의 사이클로부터 구출해 내지 못합니다!'

 

만약 막판에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또는 신이 있어도 그 최후 심판 사실이 모호하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칼을 빼어들고

보복의 사이클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볼프의 결론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러분에게 아직 이런 일들이 닥치지 않았다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은 중요합니다

자기가 나서서 보복을 하지 않게 되니까요!

보복을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니까요!

 

사람들이 이 지구 상에서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강력한 믿음입니다!

지옥의 심판을 포함해서요!

이땅에서 평안하게 살기 위해

지옥의 교리는 필수적입니다

    

 

◑3. 지옥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뭐라고요?

무슨 뜻입니까?

 

심판의 하나님이란 개념은 사랑의 하나님과

정반대로 보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는 그의 5형제들을 위해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공포심 조장으로는 안 됩니다 

“나사로를 세상에 다시 보내주세요”

그들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만약 나사로가 갑자기 무덤에서 일어난다면

부자의 5형제 앞에서 말이죠

 

나사로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말을 전해 줍니다

 

(이래도 물론 믿기 어렵겠지만요) 

‘지옥은 존재한단다!’

 

5형제가 뭐라 말할 것 같나요? 

‘이런 잰장, 좀 더 착하게 살아야겠군, 지옥에 가긴 싫어’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불가능해 이런 식으로는 절대 설득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그들은 믿지 않을 거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공포, 지옥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은 절대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무서워서 억지로 믿는 척 하는 것!

이런 식으론 안 된다는 거죠

 

혹시 잠깐은, 갑자기 엄청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교회도 나가고

성경도 읽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겠죠

지옥이 무서우니까요!

(그러나 911사태 후에도 잠시만 교회가 붐볐지, 몇 달 후에는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지옥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여러분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헤이, 내가 며칠 전에 너희 집에 있는데

갑자기 청구서가 날아왔어

근데 네가 집에 없기에 내가 대신 냈어!'

 

집 주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그 청구서가 얼마짜리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그게 2천원짜리 도시가스 요금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저 ‘그래 고마워!’라고 하겠죠

 

그런데 만약 그 청구서가

국세청에서 마침내 발견하여

당신이 미처 모르고 있었든 지난 20년 치의 세금을

몽땅 청구하는 것이었다면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빚에 대한 지불이라면.. 얼마나 정말 감사하겠습니까!

 

로이드존스는

그 친구가 얼마를 내줬는지 알기 전까지는

단시 악수로 고마움을 전할지

바닥에 엎드려 그 친구의 발에 입을 맞출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이 치르신 값은 도대체 얼마일까요?

 

만약 당신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당신을 가치있게 여기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옥을 믿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인물을 다 합친 것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셨을까요?

 

영원전부터 사셨던 그 분은, 지옥에 대해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십자가에서 지옥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같은 이야기도

성경을 쓰도록 감동하셔서

우리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즉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지옥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를 지옥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1만달란트의 빚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만약 지옥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분의 사랑이 어느정도인지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이러니 하게 심판이란 개념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이 넘치는 존재로 만드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분의 사랑을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제게

‘난 사랑의 하나님은 믿어요

근데 지옥이나 심판은 안 믿어요’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려고 지불하신 게 뭔가요?’

 

‘몰라요, 지불했든 안했든

그냥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잖아요’

 

만약 하나님이 그냥 모두를 사랑할 뿐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높여드릴 수도

그 분을 기뻐할 수도 없었을테고

그저 무심하게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변화되길 원한다면

자기를 감싸는 사랑을 느끼길 원한다면

그 사랑을 찬양하고 놀라워하기를 원한다면

대담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원한다면

그 사랑이 놀랍고 경이롭다고

내 영혼과 삶을 드리겠다고 말하길 원한다면

그는 지옥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것도 심각하게요!

 

*번역에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7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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