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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결산 (마25:14-30)

by 【고동엽】 2022. 8. 19.

삶의 결산  (마25:14-30)

1. 전도서 7장에 보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는 지혜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지혜롭게 결산되기 위해 여러분 삶의 시작보다 삶을 결산하는 인생의 마지막이 더 나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맡은 세 인물 중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주인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칭찬과 축복으로 결산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는 책망과 더불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심판으로 그의 삶이 결산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결산하게 될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 비유 말씀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뜻하고,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넓게는 모든 사람을, 작게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란트”는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맡기신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환경과 지식 등 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달란트가 주인의 소유로서 종들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달란트가 종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환경과 지식 등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등을 모두 자기 것처럼 여기며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달란트를 주인이 종들에게 맡길 때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맡긴 목적은 한 마디로 주인을 위해 이윤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칭찬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달란트 맡은 자들과 반드시 결산한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한 결산, 곧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실 때,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각각의 종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판단과 뜻에 따라 배분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4,50년을, 어떤 사람에게는 7,80년을, 또 다른 사람에게 3,40년을 맡기십니다. 물질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평생에 20억 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10억 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 3억 원을 맡기십니다. 지식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석,박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고졸학력을, 또 다른 사람에게 초등학력을 맡기십니다. 건강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아주 건강한 체질을, 어떤 사람에게는 약골 체질을, 또 다른 사람에게 병약한 체질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맡은 정도에 따라 충성을 다해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적다고,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남보다 환경이 나쁘다고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그 능력에 따라 맡겼기 때문입니다. 맡은 바대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맡은대로 충성을 다해서 남기라는 것입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천체물리학자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취소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두 학생, 등록한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인가요?’ 그래서 알려줬습니다. 그러니까 첸드리스카 박사는 강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추웠던 시카고의 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계속적으로 겨울 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갔습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실한 강의, 두 사람을 앞에 둔 이 한 분의 강의가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이 맡았느냐, 적게 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맡은 바대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12: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 맡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받은 칭찬과 축복의 내용이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기고 받은 칭찬과 축복이 똑같은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겼다고 했습니다.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기신 뜻과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 주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무엇보다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셨습니다.(요9:1-4) 과연 이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증거했습니다.(요9:27-38)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합니다.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그 가운데서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바로 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이발소에 “내일은 공짜로 이발해 드립니다.”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공짜 이발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다음날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이발을 하고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나오려니까, “네, 손님. 사천 원만 내시면 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손님이 “아니 이발을 공짜로 해준다고 해서 들어왔는데요?”라고 하자 주인은 “ 어디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둘은 밖에 나가 간판을 보았습니다. “여기 공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디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일이면 공짜로 해드린다고 했죠.” “나는 어제 이 간판을 봤단 말이에요.” “그러나 간판은 여전히 내일을 가리키고 있잖습니까?” “그럼 언제 오면 공짜입니까?” “내일이오. 오늘은 항상 돈을 받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내일이니 기대할 수 없군요.” 오늘이 없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순종하지 않은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 미래는 심판과 영원한 불행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명히 깨달으시고 바로 순종하시므로 삶의 많은 것을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맡은 자가 어떻게 해서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와서는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아주 인색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현대역 성경) 주인을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말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만은 왜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느냐는 반항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나오는 어느 품군과 같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을 만나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아홉시쯤에 나가서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이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며 일하도록 했습니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라며 일하도록 했습니다. 일을 모두 마친 후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이 품삯을 치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인의 처사에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선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마20:1-15) 일이 없어 놀고 있는 형편에 포도원 주인이 불러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선하신 주인을 인색하다며 악하게 보며 원망 불평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각각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어느 정도를 맡기셨던 선하신 주인의 것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사람이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인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아주 인색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주인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이 사람처럼 악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맡은 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온 세계를 점령하고 있을 때를 중심으로 엮은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도 없는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형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돌아다니며 장사한 것뿐인데 왜 나를 죽이는가?” 라고 항의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저항운동자가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아무 일도 안했으니 그것이 큰 잘못이오.” 라고 대단히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라 민족이 위태한 데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이 커다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맡은 바 달란트는 주인의 뜻에 따라 주인을 위해 남기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각없이 오직 자기 삶에만 치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영화 <빠삐용>은 빠삐용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게 되지만 13년간 10번의 탈옥을 기도하여 마침내 자유를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빠삐용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무기형을 선고받고 남미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빠삐용은 혹서와 독충,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리며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탈옥하나 실패하여 독방에 2년간 갇히게 됩니다. 그는 위조범 친구 드가와 함께 또 탈옥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또다시 붙잡혀 이번에는 5년 동안 독방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도소장은 그들을 절대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섬 ‘악마도’로 보내버립니다. 이곳에 영원히 유배되어있으면서도 빠삐용은 탈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죄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빠삐용에게 인생을 낭비한 것이 바로 유죄라며 분명히 그의 유죄를 밝힙니다. 그점에선 빠삐용도 유죄를 시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면 결국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유익을 남기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006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달란트로 얼마를 남겼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얼마나 유익함이 되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 오실지라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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