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 비유의 교훈 (마 25:1-13)
병술년 한 해를 마감하고, 정해년 돼지의 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날입니다. 인류가 해와 달과 날을 정하고, 캘린더를 갈아 끼우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도록 한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나온 한 해는 국내외적으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광풍을 만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온 세계가 경악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다이야기’와 같은 사행성 오락 게임장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성인들까지 노름에 빠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해였습니다. 그 뒤에는 어김 없이 정경유착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쏟아진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는 부동산 강풍,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나 한미 FTA 협상문제,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문제 등등이 땅에 떨어진 국가지도자의 리더십과 아울러 세모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표어 아래 우리는 온 교회가 성경적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서현의 가족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한 해였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통해 교회와 개인의 5대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수용을 통해 한 마음이 되어 온 것은 물론이고, 그 열매로 많은 소그룹(242구역)들이 형성되어 마침내 남자 전도회까지 구역의 연합으로 새로이 구성하게 된 것은 ‘새 부대’를 향한 전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여름에 시작된 의료선교 사역은 계속되어야 할 아름다운 주님의 일입니다. 211 제자훈련에 젊은 남자 일군들 수십 명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스데반돌봄 사역을 위하여 40여명이 땀흘려 훈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예람과 3청이 연합되어 전담 교역자를 통하여 보다 알차게 양육받고 증거의 삶을 살게 된 일이나, 중등부와 고등부 또한 각각 전임 사역자를 모시게 된 일은 우리 교회 교육 사역의 획을 긋는 일입니다.
교회 CI작업을 완료한 일이나, 교육관 1층 200평 공간을 거액을 들여 문화공간(GNI)으로 개관하게 된 것은 이웃 사회 친화 면에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나 여러 면에서 우리 교회의 이미지 변화와 사역의 방향을 선도하는 점에서 축하할 일입니다.
어린이 선교원의 점차적인 발전과, 특히 서현선교공부방의 개원은 지금은 미미하지만 향후 우리 교회의 2세 교육 사역에 일대 전환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장차 온전한 대안학교를 시작케 되는 초석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우리는 지나온 해에 교회 5대 목적에 해당하는 사역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과 기도와 교제를 통하여 은혜를 체험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 받고 자원하여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수고와 땀의 결실입니다.
새해에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보다 더 알찬 내용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후회 없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인생은 후회의 연속 아닙니까! 과거 우리의 삶은 되풀이하여 후회를 거듭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크게 낭패하게 되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극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열처녀 비유”로 알려진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대략 일주일씩 계속되었는데, 혼인예식은 저녁이나 밤에 거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러 시간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신부의 집을 향해 행진합니다.
한편, 신부는 친구들과 함께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친구들과 함께 나아가 신랑을 영접하여 등불을 켜고 신랑의 집을 향해 떠나는 행렬이 벌어집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열명의 들러리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들어 버렸습니다. 밤이 깊었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이 때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등불을 켜 들고 잔칫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뒤늦게 시장에 가서 기름을 등에 채워가지고 잔칫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잔칫집의 문은 닫히고 잠긴 후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안타깝게 문을 두드리며 애걸했지만, 닫혀진 문 안에서 들려온 신랑의 목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열 처녀’는 성도들입니다. ‘등’이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상징한다면, ‘기름’은 이를 유지시켜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적인 결말이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의 핵심입니다. 신랑을 기다렸으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혼인잔치에 참석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평생에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기름 준비 못한 미련한 처녀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1. 기름 없는 등은 결국 무용지물이다.
여기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삶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똑같이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똑같이 졸았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지혜로운 자들은 신랑이 올 때까지 깨어 있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곤했기 때문에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똑같이 등을 가졌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나 삶의 방법은 슬기로운 자들의 경우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별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뜻밖에도 기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등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등은 신앙 생활의 형식적인 부분을 의미하고, 등 안에 담겨 있어 보이지 않는 기름은 신앙 생화의 내면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등과 기름은 믿음의 외형과 질인데, 외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등은 있으나 기름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딤후 3:5)는 말입니다. 성도로서의 신앙의 겉모습은 있으나 정작 이러한 참 신앙을 유지시켜주는 성령의 역사는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고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은, 비록 등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렸지만 결국 문 밖에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알맹이 없는 외형적인 신앙의 겉모습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형식은 중요합니다. 형식 없는 내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릇 없이 기름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다 해서 내용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이 있을 때 형식은 그 내용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고, 다섯은 기름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석학자 A. L. Williams는, “지혜로운 처녀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존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과거에 한 번 받은 영적인 은혜에 만족하여 그들 내부를 성령과 새로운 은혜로 증진시켜 나가는 데 실패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위기 앞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신랑이 밤 늦게 오니까 그때에서야 기름 있는 사람과 기름 없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탄하게 지낼 때는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는데, 어려움이 찾아오니까 불평하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짜증내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만 있지, 성령 충만한 알맹이가 없는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가 확실하다면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내 삶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가장 커다란 위기의 때, 다시 말하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를 내보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2. 기름은 아무에게도 빌릴 수 없다.
본문의 비유에서 우리가 충격적으로 접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부족한 기름을 아무에게도 빌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8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하거늘“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슬기 있는 자들이 기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신앙의 삶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녀들은 신랑이 밤 늦게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신들의 등을 보니 기름이 조금밖에 없어 넉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다섯 처녀들에게 준비한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좀 나눠 달라” 라고 완곡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은 당당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몹시 다급한 상황에서 이 말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탁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맙니다.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얼핏 생각하면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이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에 의해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묘사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내용이란 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양도가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개인에게 완전히 귀속하여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리켜 법학에서는 ‘일신전속권’(一身專屬權)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내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즉, 재산권은 양도 가능하지만 가족권과 같은 일신전속권은 그렇게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과거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 가운데 어이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가족을 위해 바치는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여러분의 가족의 영혼은 번개처럼 천국으로 튀어 올라간다” 고 말하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대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성결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는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름은 결코 빌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직접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기름 준비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10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본절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신랑의 입장과 함께 혼인잔치가 시작되면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아 걸었던 관습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한번 문이 닫히면 다시는 그 문을 열어주지 아니했습니다.
11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처녀들의 간절한 소원과 애걸에 대하여 신랑의 대답은 너무나 냉정했습니다.
12절,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혼인잔치집의 문이 닫혔습니다. 한 번 닫히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던 오랜 세월 동안에는 언제라도 기회가 있었지만,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후에는 노아라 할지라도 그 문을 다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부흥회를 인도 할 때 그의 손자는 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 손자가 어느날 저녁 자기 조부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되어 믿기로 작정하기 위해 다른 교수 한 분을 찾아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지금 작정할 필요가 없고 집회 끝나도록 기다려라”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믿기로 작정하기를 연기하였고, 종래 늙어 죽도록 작정하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설교 중에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느 날 자기 부하들을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기간에 그들에게 훈시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오겠느냐?”
한 졸개가 말하기를 "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돌아가면서 얘기 하겠습니다"
"그거 오래 전부터 해먹은 건데 그거 그 방법으로는 안 된다"
또 다른 졸개가 말하기를, "나는 돌아다니면서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지옥을 안 믿어"
"그러면 고난을 주겠습니다. 고통을 많이 주어야 되겠습니다."
"고통을 주면 그 사람들 순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당한다고 더 기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왕초 사탄이 딱 하는 말이 "그냥 가서 이렇게 말해라. '서둘 것 없고 천천히 예수 믿으시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교회에 갈 수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구역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이라도 사역팀에 들어가 봉사할 수 있고, 기분만 내키면 오는 주일부터라도 전도 훈련받고 전도하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조금만 내게 잘해주면 나도 교회를 위해 뭔가 큰 일을 할 수 있고, 교역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조금만 나를 더 알아주면 신앙생활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기회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의 문이 기회의 문이 아주 닫혀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초청하고 계시는 바로 오늘 이 순간, 하나님 앞으로 진심으로 나아와 값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은총을 풍성히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때를 놓친 것 때문에 땅을 치고 후회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공부할 때를 놓쳐서 평생 억울하게 살아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투자할 때를 놓쳐서 사업의 손해를 본적도 있을 것입니다.
공부야 때를 놓친들 또 다른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투자의 때 또한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때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구원의 문이 닫히고 나면 더 이상 회개의 기회도 없고, 은총의 축복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송구영신의 날입니다. 묵은 해를 뒤로 보내고, 이제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 해의 삶이 후회하지 않는 삶이었습니까?
오는 새해에는 후회하지 않을 결심이 서 있습니까?
본문 13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단순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보듯이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외견상으로는 모두 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실상 미련한 다섯 처녀는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랑이 왔어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생활에 외형적으로 열심히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등불과 함께 무엇보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곧 말씀과 성령으로 속 사람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눔으로써 생명력 있는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지금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도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롬 13:11-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우리의 허리띠를 졸라맵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한 해 한 해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후회하지 않고 기뻐하고 만족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봅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새롭게 다짐하는 온 교회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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