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인 삶에서 벗어나는 길
2002-08-20 11:32:26 read : 2697
(마 8:1-4,20020818) 2002-08-19
<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십시오 >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가끔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번 주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조합니다." 하면 더 은혜가 되고,
"하나님! 이번 주 설교는 잘 준비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오히려 분위기가 냉랭합니다.
나의 성공이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이고, 나의 실패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을 꼭 붙들고 나가면 반드시 길은 열리게 됩니다.
실패도 결국은 유익한 것입니다. 실패는 패자에게는 짐이 되지만 승자에게는 힘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패배주의입니다. 언론이 패배주의를 너무 부채질합니다.
우리 나라를 너무 과소평가 합니다. 경제규모로 보아도 우리가 호주보다 더 대국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한 아프리카 전체의 경제 규모보다 우리 경제규모가 큽니다.
우리보다 인구가 30배나 많은 14억 중국의 경제 규모가 우리의 두 배에 불과합니다.
선진국 산업 발달 척도가 되는 6대 제품이 컴퓨터, 자동차, 배, 비행기, 반도체, 철강인데
우리 나라는 비행기 산업만 빼고는 세계 어느 선진국에도 경쟁력이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대망상증을 가지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패배주의를 가지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세계는 우리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고 하는데, 우리 신문을 보면 금방 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 고기를 멀리하고 난리 칩니다.
요새는 줄어들었지만 얼마 전에는 휴전선에서 무슨 일만 터지면 라면을 사느라 야단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패배주의에 빠지면 안됩니다. 실패 중에도 성공의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생에 여러 실패가 있지만 가장 큰 실패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께 나아오면 기적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
오늘 본문에는 한 문둥병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께 나아와 치유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 마태복음 5-7장에는 예수님이 산에서 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봐도 볼수록 감동이 되는데 당시 현장에서는 더욱 은혜가 넘쳤을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가 넘쳤으면 7장 28절에서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산 아래로 내려오시는데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좇아 내려왔습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 일은 힘든 일입니다. 문둥병자가 사람들 있는 데로 접근하면 자칫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자의 입장에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교만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교만과 자존심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제일 요소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부족한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창녀, 세리, 이방인,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상처 입은 자, 소외된 자... 한결같이 부족합니다.
지금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부족한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습니까? 자기를 높이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어느 날 닭장 안에서 아빠 닭과 병아리가 대화를 했습니다.
"아빠! 아빠는 왜 벼슬이 있어요?" "그것은 동물들 세계에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야."
"아빠! 아빠 입은 왜 뾰족해요?" "그것은 적들을 무자비하게 쪼아서 쫓아내기 위해서야."
"아빠! 아빠 목소리는 왜 그렇게 커요?" "그것은 소리로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야."
"그런데 아빠는 왜 닭장에 갇혀있어요?" 그 말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갑자기 닭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아빠 닭 목을 홱 잡아끌고 나가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히 성취를 이루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이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면 아빠 닭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일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줄 알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오면 그때부터 기적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말 못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예레미야도 자기는 말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말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한이 되는지 저도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심정을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와 예레미야를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으셔서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물맷돌 5개가 골리앗을 죽이는 능력의 돌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모세의 초라한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는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갈릴리의 초라한 제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종들이 됩니다.
힘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이 힘센 것보다 낫습니다.
성공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 맥아더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3수생이었습니다.
작가 해리포터는 11개의 출판사로부터 그의 원고가 거절당하는 비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음악적 재능이 없으니 다시 트럭 운전사나 하라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둥병자가 감히 어디를!" 이라고 구박해도 주님께 나아가면 기적은 시작됩니다.
< 주님께 순종하면 기적의 역사는 촉진됩니다 >
이 문둥병자가 목숨을 걸고 주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합니까? 먼저 주님께 절했습니다.
주님께 절했다는 것은 주님을 가치 있고, 능력 있는 분으로 신뢰한다는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도 아니고, 안수도 아니고, 주님을 구세주로 철저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닌 이 주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처럼 나의 생명을 맡겨야 합니다. 나의 삶도 맡겨야 합니다. 나의 자녀도 맡겨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 절대 순종이 나오고, 절대 순종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느 날, 주님의 말씀 한 마디가 내게 진짜 하나님 말씀으로 들리면 삶이 확 바뀝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빚쟁이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빚쟁이가 집에 가압류 빨간딱지를 붙이던 날, 괴로워하며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었습니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아버지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슬쩍 방안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는 줄 알았는데 단정히 앉아 성경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불안과 염려가 일시에 사라지며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부모의 모습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모습입니다.
참된 믿음은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어려울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왜 어려울 때도 흔들리지 않습니까? 죽는 것도 주님 뜻이라는 순종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둥병자의 말에서도 우리는 순종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 앞에 나와 처음 한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순종하려는 태도가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에 아주 흡족하셨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치 않으면 내가 원해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려고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마음은 기적의 도구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깨어진 행복과 축복을 회복시키는 가장 위대한 열쇠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완성되었고, 축복은 우리의 순종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시는 주님 >
문둥병자의 청을 듣고 주님이 손을 대시며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 이 '즉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즉시 기적이 일어나는 분들은 보면 대개 처음 주님 앞으로 나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주님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즉시 주어지는 것 같은데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은혜가 더디게 주어지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서 옛날 은혜 받은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맘대로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점점 진리의 세계를 깊이 알면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래 되면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냥 편하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처럼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은혜에 면역이 되면 은혜의 길에서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옛날처럼 똑같이 살면 하나님께서 심한 고난과 더불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회복이 힘듭니다.
어떤 분은 이런 분들이 차라리 타락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타락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의 빛이 한번 비추면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매달립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낙원에서 저를 기억해주세요." 하고 매달리면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도 많이 듣고 체험도 많이 한 사람은 웬만한 은혜는 은혜 같이 여기지도 않습니다.
웬만한 설교는 설교 같지도 않습니다. 어느 누가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밖에 없는데 하나님 관계에 심각한 금이 갔으니 이제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분은 변화될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그런 분들은 모두 사울처럼 악신에 휘둘리다 전쟁터에서 죽고, 데마처럼 세상 사랑하다 죽고,
가룟 유다처럼 돈과 권력 문제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고 죽는 길로 가는 수밖에 없겠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까?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 없습니까? 있지만 참으로 힘든 길입니다.
어떤 길입니까? 살면서 이제까지 당했던 어떤 고난보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을 당하면서 이제까지 체험했던 어떤 은혜보다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할 때에야
다시 겸손히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가끔 목격하지만 그 외에 다른 길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변화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오래 할수록 이제는 땀 흘리는 정도가 아닌 피 흘리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더욱 겸손하고, 더욱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 더 성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오줌을 쌌습니다. 그때 엄마는 은혜가 넘치는 손길로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네 살이 되어 오줌을 쌌습니다. 그때 엄마는 "아이가 빨리 기저귀를 땠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여덟 살이 되어 오줌을 쌌습니다. 그때 엄마는 "아직도 오줌을 싸느냐?"고 야단칩니다.
스무 살이 되어 오줌을 쌌습니다. 그때까지 그러면 이제는 사람 취급을 받기가 힘듭니다.
처음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나의 죄악의 흔적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즉시 덮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었는데 죄악의 흔적들이 여전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즉시 그 죄악의 문둥병 흔적들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은혜의 길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은혜가 없어!" 하고 남을 탓하기만 하면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분들은 "이것은 내 문제야?"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해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길대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 광야의 불뱀과 놋뱀 이야기 >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내용을 아시지요?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에돔 땅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이 자기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니까 멀리 빙 둘러서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 가는 길이 힘드니까 백성의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길은 멀어지고, 사막 길이라서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었으니 원망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감사 신앙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원망했습니다.
원망이 지나쳐서 하나님이 내리신 만나를 보고 '이 박한 식물이 이제는 싫다"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땀 흘려 준비하고 전해주는 말씀을 박한 식물이라고 해도 좋은 모습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친히 내리신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불평하니 복을 받겠습니까?
누구나 마음은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은 더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는 말을 해서 결국 불뱀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은 돌이키기 쉽지만 그것이 입으로 나오면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는 참 불평이 많습니다. 몇십 년 전보다 훨씬 잘 사는데 불평은 더 많습니다.
그것을 보면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중요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많은 축복을 빼앗아갑니다.
어떤 의사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원망과 불평은 심지어는 뼈까지 부식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백성들은 모세에게 와서 잘못했으니 기도해서 뱀들이 떠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의 요청으로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모세가 말씀대로 놋뱀을 달아 장대 위에 다니까 그 놋뱀을 본 사람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면 불뱀이 나와 물게 됩니다.
그러면 가난과 저주, 질병과 죽음이 찾아오고, 기쁨을 잃고,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놋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요 3:14-15).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제는 불평하는 삶, 수군거리는 삶을 버리고, 그 시간에 주님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불평하고 수군거리면 은혜의 길에서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치유 받은 문둥병자에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조용히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증거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큰 은혜를 입어도 감사가 없으면 그것은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할 때 진정한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은 감사를 표현하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한 분이 매달 선교 후원회읜으로 가입해서 어떻게 가입하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말씀이 은혜가 되어 저도 작은 정성을 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표현된 작은 정성이 저희들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고,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너무 감사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내에게 하루에 3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내에게 하루에 3번 "사랑한다"고 하면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하면 "뭔가 수상하다"고 의심하다 싸우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저도 얼마 전에 한번 해봤는데 괜히 핀잔만 들었습니다.
평소에 사랑 표현을 너무 안 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랑과 감사를 많이 표현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에게는 무엇보다 감사하는 삶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돈을 모으고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자녀에게 물려주고 지옥에 갔습니다.
약 30년쯤 지나니까 자식도 지옥에 왔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지옥은 불평하는 사람들만 모였다는 말대로 이 아들이 아버지 때문에 왔다고 불평합니다.
아버지도 불평합니다. "너 때문에 나는 하나도 못 쓰고 이곳에 왔는데 왜 나 때문이냐?"
아들이 또 불평합니다. "아버지가 남겨둔 돈 쓰다가 죄만 지었으니 아버지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간에 다시 한번 무엇이 자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감사를 가르치고, 성실을 가르치고, 선한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고, 범사에 불평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분!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달라고 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더욱 은혜 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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