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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때 성도들의 기도 (행4:23-31)

by 【고동엽】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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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때 성도들의 기도  (행4:23-31)

“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지요? 신분에 맞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귀족들은 평상시에 큰 대접을 받았으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아들들을 최전방에 내보냈습니다. “noblesse oblige”. 그 신분에 맞는 책임을 져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받는 일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 중 성도에서 머물려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는 훈련받아야 합니다. 에수님의 제자들, 3년이나 훈련받고도 예수님이 신문받으실 때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마저 . .
우리가 말씀훈련받고 전도훈련받고 . .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병사가 되어야 합니다. noblesse oblige. 주님의 병사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시련이 있습니다. 주님의 훈련이 따릅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이 시련과 고난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에서 큰 자가 되고 이 땅에서 큰 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큰 자에 맞는 그런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책임 없이, 아무런 희생 없이 어찌 큰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가지고 세상을 본받고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아서 되겠습니까? 세상의 정욕과, 물욕과, 세상의 더러운 습관에 빠져 살아가면서 어떻데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병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noblesse oblige”. 그 신분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청어잡이 배가 먼 북양에서 청어를 잡아 항구로 돌아와서는 다시 차에 싣고 런던 시장에 내다 파는데 청어는 성질이 급해서 잡으면 곧장 죽어 버리고 만답니다. 어부는 이 죽은 청어를 냉동시켜 시장에 팔았습니다. 어부들은 수백년 동안 그렇게 해왔는데 언제부터인가 한 청어잡이 어부는 살아 있는 청어를 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산 청어는 죽은 청어보다 값이 비싸서 한 번만 출어를 해도 다른 사람의 두세 번 갔다 온 것보다 수입이 많았습니다. 모든 어부들은 그 비결을 알고 싶어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 공개 하고자 합니다.
그 비결은 청어잡이를 떠날 때는 바다 메기를 몇 마리 넣어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어를 잡아 담은 통 속에 메기를 몇 마리씩 집어넣어 놓는다고 합니다. 메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청어이고 청어는 메기를 제일 무서워하기 때문에 청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피해 다닌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스스로 절망할 필요도 없고, 또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막지 않고 허락하신 것은 기도하라는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지 않은 고난이 닥쳐왔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 교회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입니다.
초대교회는 큰 박해를 받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감금을 당하였습니다.(행4:3) 박해의 이유는 성전의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거지 앉은뱅이를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이유가 참 궁색합니다.
이튿날 관원, 장로, 대제사장들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앉은 뱅이의 병을 고쳤느냐고 닥달을 하며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심문을 하였습니다(행4:5,6) 시기와 질투의 심문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걸을 수 있도록 고쳤다고 대답했습니다(행4:8-10).
마침 병 나은 사람도 거기 있었는데 심문하던 자들이 앉은뱅이 되었던 자를 보고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그 누구에게도 아무말도하지 못하게 위협을 한 후 내어 쫓았습니다.
본문 23절의 시작은 어떻게 출발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놓이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첫 번 위기는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놓이긴 했지만 태풍 속에서 잠깐 반짝하고 햇볕이 비친 것 뿐입니다.
사도들도 이것을 감지했습니다.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 올 더 큰 박해를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성령의 재충만 이었습니다. 더 강력한 영적 무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상황을 믿음의 형제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하루 동안 고통을 당한 뒤, 그들이 찾아 간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이해와 사랑과 권면과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모든 삶의 고뇌를 쏟아 놓을 수 있는 곳, 어떤 고뇌의 하소연도 들어주는 사랑이 있는 곳, 진정한 교제가 있고 가식없는 위로와 격려가 있는 곳,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새 힘을 얻은 곳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의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교회는 따뜻한 어머니 품과 같아야 합니다. 교회가 냉냉하고 차가우면 안됩니다. 무슨 비밀이 노출될까봐 두려워 하며 눈치보는 분위기기 되면 안됩니다. 이런 분위기는 가족의 분위기가 아닙니다. 가족은 모든 것이 용서되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가정이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각박한 세상에 살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편하고 쉴 수 있습니다. 누구도 흠을 잡지 않습니다. 건전한 가정이라면 가족중에 어떤 사람이라도 실수와 흠을 가려 줍니다. 건강한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흠을 잡아내고 손가락질 하는 곳이라면 가정이 아닙니다. 그런곳이라면 교회가 아닙니다.
에베소서1:23에 “교회는 그의(주님의) 몸이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교회에 안기는 것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마태복음18:20에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예수 그리스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답답한 일을 만나거나, 힘겨운 일을 당하면 어디로 달려갑니까? 기쁜 일을 이나 슬픈 일이나 무슨 일을 만나도 교회로 달려나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함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겠고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다 말할 수 있고, 기도 요청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극복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계속 힘써야 하겠습니다.
따뜻한 어머니 품과 같고 고향과 같은 느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거칠고 딱딱한 성품이 녹아지고 다듬어져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가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런교회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베드로와 요한처럼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내 놓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반드시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주의 종들에게 마음껏 기도 제목을 부탁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공개할 수 없는 기도제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제목도 안심하고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될 때 Power full한 교회가 되는것입니다.
2. 고난의 때 교회는 연합전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도들에게 가서 그들이 고난당한 일들, 위협당한 일들을 모두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화를 내거나 분을 삭히지 못하여 아우성을 치고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저력입니다.
24절에 보면 제자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온 교회가 모여서 합심으로 소리 높여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에서 배울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이 어려운 때에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혼자만 일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온 교인이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온 교인이 서로 협력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혼자 일하는 것은 고독합니다. 힘듭니다.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함께 일하면 즐겁습니다. 기쁘고 보람되며 일의 능률도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4:9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라”
예배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분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탄이 역사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분열입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 하며 남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협력하면 어려운 일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협력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싸우고 등지는 삶이 아니라 협력하여 일하는 삶입니다.
전4:12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하나가 된 삼겹 줄은 그 어떤 세력으로도, 그 어떤 힘으로도, 그 어떤 핍박으로도 결코 끊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3.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불씨가 두 개, 세 개, 열 개 이상 모이면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기도의 불씨도 함께 모아져야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도는 마치 불타는 장작과 같습니다. 장작이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으면 꺼집니다. 혼자 있으면 연기만 납니다. 우리는 혼자서 연기만 내는 기도만 할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큰 불을 일으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무기를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 ”(마7:7-1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눅18:)
예루살렘 교회는 어려운 일이 닥쳐왔을 때 맨 먼저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일심으로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열심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했습니다. 일심으로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 기도의 능력을 소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도 ‘목사님 기도를 꼭 해 주십시오.’ 하지 않고 ‘목사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도나 좀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 힘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기도나’ 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도의 능력이나 기도의 중요성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군 장성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여러 이야기 꺼리를 많이 남긴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취임 한 후, 백악관에서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을 못자고 설쳤다고 합니다.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감당해야 할 직무는 엄청난 데, 정작 본인은 너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을 한 숨도 못 자고, 날이 밝자마자 친구 국회의원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기도하고 대통령으로 직무를 시작하고 싶으니깐 빨리 와 주게.”
그리고 몇 몇 친구들과 함께 백악관에서 함께 기도한 후, 첫 집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중요할수록, 힘들수록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초대 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기도’ 하는 일 이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습니까? 너무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계에 달린 큰 추가 힘들게 왔다갔다하는 걸, 보고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시계를 떼어 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부터 시계 바늘은 서고 시계는 죽어 버렸습니다.
새의 날개는 무겁습니다. 그러나 날개 때문에 날아갑니다.
배의 돛, 역시 무겁지만 그것 때문에 항해가 가능합니다. 비행기 날개 역시 거추장스럽지만 날게 없으면 비행기도 날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힘들고 고달파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이 살고 힘을 얻고 비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기도는 전력을 다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주재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말은 “주권을 지닌 통치자여”, “만물의 주인이시여”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심리적인 자기 암시이거나,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간질병 걸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한 아버지의 간청이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하셨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기도는 혹시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해서 가능성을 찾아 여기저기 머리를 디밀어 보는 그런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도 할 때, 어떤 박해자들까지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일이 철저히 힘있는 사람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세상에 힘없는 사람들이 한 맺힌 심정으로 푸념처럼 하소연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세상에 할 짓 없는 한가한 사람들이 시간 소일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대 주제여!”라는 말 한마디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신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요즘 신앙인들은 너무 영특해서인지 그렇게 미련스럽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만으로 안될 것 같으면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미리 다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도 크게 걱정할 일이 없도록 자기가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좀 미련하게(?) 믿는 자가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5. 그들의 기도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29-30) 이 기도를 자세히 보면 얼마나 적극적이고 담대합니까? 이제 막 시작된 교회에 엄청난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자기들앞에 어떤 박해 가 올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꽁무니를 빼겠다는 것이 아니고 당당하게 시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담대함과 능력과 권세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있는 길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박해가 계속 되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사명을 다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이다.
우리가 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해답입니다.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앞에 무릎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지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초대교회처럼 기도합시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면서 마음을 열고 나누면서. . . 마음과 힘을 모아 전력을 다해 기도합시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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