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6개).
출처/이신건 교수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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