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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설교 : 고난 받으시는 주님 (마26:69-75)

by 【고동엽】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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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받으시는 주님   (마26:69-75)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잡혀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며 말하기를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희롱했습니다(마26:67-68).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지만 곧 뒤따른 사건, 곧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은 바로 그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며 장담할 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언하신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마26:33-3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때에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도 저 예수와 같이 있던 사람 아니요? 당신 말투도 그렇고"라는 한 마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아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무슨 관원도 군인도 아닌 대제사장 저택의 뜰에서 문 지키던 여종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무슨 신성모독을 했다고 비난하거나 폭동을 사주한 사람이라고 붙들어 고발이라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저씨, 아저씨도 저 사람과 같이 다니시던 분 아니셔요?" 하는 투로 지나가며 한 마디 던졌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냥 아니라는 듯 못들은 체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강한 어조로 부인했습니다.  부인하는 강도는 갈수록 단호해졌고 심지어는 저주와 맹세까지 덧붙이며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모든 제자들 앞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 35) 하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본문 뒤에서는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당하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최고권력자들 앞에서 온갖 폭행과 폭언과 비아냥과 거짓 증언과 협박을 당하시면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아들 되심(마26:63-64)과 유대인의 왕 되심(마27:11)과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선포(요18:36-38)하시는 사이에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여종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며 거짓을 힘주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과잉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는 극도의 두려움에 싸여있었을지 모릅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부족에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비겁함을 낳는 법입니다.  아무튼 그는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너무나 맥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측은함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셔야 했던 예수님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온 몸이 전율할 정도로 실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단지 로마 병사들로부터 당하신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정신적, 심적 고통을 함께 당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지만,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을 앞뒤에서 따르며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던 환영의 소리(마21:8-10)가 불과 몇 일만에 같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소리 지르는 배척의 고함으로 돌변하는 배신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안겨준 백성들의 배신은 인간적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육간의 풍성한 양식을 베푸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신 예수님께 세상은 십자가로 되갚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함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을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을 십자가에서 조용히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고난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당할 모든 배신과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열두 명의 최측근 제자들 가운데 가장 똑똑해서 돈궤를 맡기기까지 했던 가룟 유다에 의해 은 30량에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지는 배신을 당하시는 고통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저녁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침 그 때는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의미와 곧 있을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절묘하게 연결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습니다(마26:26-28).  제자들과의 이 마지막 식사에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며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목적과 의미를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삶은 바로 제자들과 모든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찢어 나누어주시고 자신의 피를 흘려 나누어주신 삶이었습니다.  그 삶을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요약하여 재연하심으로써 마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삶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간 삶이었고,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은 곧 그의 삶 전체를 그 안에 담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역사적인 구속의 사역, 대속의 죽음, 위대한 사랑의 희생의 과업을 실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나가 곧바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30량에 팔아넘기기로 약조했던 것입니다.  배신의 극치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배신의 역사의 절정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베드로의 배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항상 앞장서 다짐하던 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신과 불충은 예수님께 단지 고통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엄청난 허탈감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3년간의 삶의 나눔과 가르침이 다 헛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아야 하는 허탈감인 것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주를 버리고 흩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흐트러진 육신 위에 덧입힘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고 이 종려주일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때 주님 때문에 열광하며 환호하다가 곧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돌변한 우리는 아닌가?  넘치는 은혜 아래 있으며 온갖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버리고 흩어진 우리는 아닌가?  하찮은 이 세상의 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갈 준비만 하고 있는 우리는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부인하지는 않고 주님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매다는 배신과 불충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배신당하고 부인당하는 고통을 주님께 드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고통을 주님께 넘치도록 안겨드린 우리일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배신의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충성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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