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설교 : 하나님만 섬기라 (출애굽기 32장 1 ~ 10절)

by 【고동엽】 2022. 7. 31.

 

전체 목록가기 하나님 목록 돌아가기
   

 

하나님만 섬기라   (출애굽기 32장 1 ~ 10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어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령한 만남의 장소가 될 성막을 세울 것에 관한 말씀을 주시기를 마치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증거판 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모세는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산 밑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들은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받을 것이므로 자신들을 정결케 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한동안 기다리다가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마치 사울이 조금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이들의 제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예배로서의 요소를 매우 잘 갖추고 있고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배울 그 무엇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예배 모습은 어떠합니까?

1. 이스라엘의 예배는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백성들이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지도자 모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재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론에게 달려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신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더 이상 불안해서 살지 못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현대를 사는 인간들은 온갖 세속의 유혹과 욕심에 젖어서 몸도 맘도 다 내주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무감각 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져야 합니다. 예배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2. 이스라엘의 예배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은 아론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여러분 금귀고리는 여인들의 소장품, 장식품으로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장식이었습니다. 이런 장신구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이웃집에서 빌리도록 하여 가져온 것으로서 자신들의 오랜 노예생활의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이것들을 모두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행하기에는 쉽지 않은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가지고 아론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의 모든 금귀고리들을 빼어서 아론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헌신입니까? 여러분 이처럼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그 얼마나 됩니까? 진정 이들의 예배에는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넘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대단한 헌신의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천만성도, 찬란하고 거대한 성전들, 세계 선교사에 혁혁한 기록을 세운 한국교회의 모습은 우리의 선배들의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기를 좋아했던 그 최고의 헌신이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날들로 돌아가면 우리들의 헌금 주머니에는 주께 더 드릴 것 없어 드린 우리들의 눈물겨운 사연의 금고리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추억이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적은 것을 드리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습니까? 진정 주님께 드리는 넘치는 헌신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예배의 내용입니다.

3. 이스라엘의 예배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그러자 아론은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렇게 공포합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사실은 내일은 모세가 내려오는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씀을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튿날에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을 되찾았습니다. 아론이 만들어 준 송아지 형상이었습니다. 애굽의 암소, 하토르 모양을 한 송아지였습니다. 하토르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여인으로 암소 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암소의 두 귀가 강조된 여인의 모습으로 조각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들은 그 송아지 앞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절일, 여호와께 속한 축제의 날로 정한 그날 백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제단 앞에 나와서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 놀기도 하였습니다. 저들이 드린 예배에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과거의 우리들의 예배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요즈음 경배와 찬양의 붐이 일어나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뛰고 춤추는 기쁨과 축제의 예배는 이제 우리 한국의 많은 곳의 예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예배에서 일어나서 춤추며 뛰는 일은 상식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장년들이 드리는 예배로 들어가면 여전히 경직된 모습입니다. 경건과 거룩이라는 명분과 예배정숙을 최고의 예배 미덕으로 아는 우리들의 예배 속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축제의 모습은 표현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이 축제의 요소는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러한 사모함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의 아낌없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의 기쁨과 축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대단히 진노하시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왜 하나님은 이렇게 완전해 보이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예배로 인하여 복주시기는커녕 도리어 그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8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 백성들이 그들의 사모함, 아름다운 헌신, 기쁨과 축제의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예배 대상은 그들을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송아지 우상이었으며, 나아가 이는 바로 자신들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금송아지는 ‘풍요의 신’, ‘물질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섬긴 것입니다.

빌립보서 3:18~19절을 보면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16:17~18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예배는 진정 하나님만 섬기는 예배입니까? 예배의 모든 초점이 정말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우리는 지금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의 신이라고 경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습은 예배인데 우리기 진정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추구하고 우리의 자신의 안전과 보호만을 추구하고 있는 기복주의적인 예배 행위, 우리의 배를 섬기는 것은 혹시 아닙니까? 죄악된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하며 회개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이 부르신다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기꺼이 우리를 내어 놓는 진정한 헌신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어린이 동화에 보면 알라딘이라는 아이가 마법의 램프를 얻게 되는데, 램프를 문지르기만 하면 마왕이 나와서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합니다. 마왕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알라딘이 할 수 없는 일을 척척해 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왕이 주인이 아니라 알라딘이 주인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는 능력이 있는 존재, 그러나 그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인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돈 물론 우상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만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을 잘 되게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빌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마땅히 섬겨야할 대상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잠시 능력을 빌려 달라고 기도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바쳐서 섬겨야할 분이시오, 오직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며, 그 분에 말씀에 복종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내 멋대로 살다가 급한 일이 생겨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삼상4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블레셋하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은 4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분석하는 회의가 벌어졌는데 결론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다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승리가 아니라 이번에는 3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더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언약궤 없이 나갈 때 4천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을 모시고 즉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는데 3만 명이 죽고, 거기에다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때로 정말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과연 계신가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기도했는데 간절히 매달렸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확신이 없습니다. 신앙이 자라질 않습니다. 10년, 20년을 믿어도 졸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늘 맨송맨송하고 기운도 없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믿음의 자세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존재하시는가, 어느 편인가를 자세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요한 일서5:14절 말씀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전부 들으십니다. 그래서 일단 구했으면 이미 얻은 것으로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응답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가정, 직장생활, 사업하는 것도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라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 보너스로 주십니다.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솔로몬에게 하루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대하1:10)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덤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응답 받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보너스로 받을 줄 믿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먹고사는 것이 심각한 국가적 문제였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단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왕이 되시면 우리들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고 아무도 몰래 그 자리를 빠져 나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요6:15절은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침부터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아 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 믿음이 예수를 믿으면 내 욕심이 채워지고, 예수를 믿으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며, 뭐! 이런 것은 아닙니까? 그러다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는 그러한 것입니까?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만일 그런 차원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것처럼 우리 그런 신앙도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됨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시간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섭섭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모든 생각과 삶을 드리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예배를 드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능히 채워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귀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출처/박승남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