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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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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가복음 7장 전반부(1-23절)에서 우리는 '참된 정결'이란 밖(외관, 의식법)이 아니라 속(내면,도덕법)의 정결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속(내면, 행동)을 깨끗하게 함이 없이 겉(외관, 의식)만을 깨끗케 하는 것은 위선이다. 결국 앞 단락의 논란은 예수의 제자들이 범했던 '더러운 손으로 떡 먹는 일'이 새 시대에는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더러운 사람(이방인)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속(마음)만 깨끗하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마가는 지금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이방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담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딸이 고침(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극명한 예로 소개함으로써 7장의 논증을 강화하고 있다(cf. Lane 1974:259) . 그리고 이 치유 사건은 그 다음의 치유 사건들(7:31-37)과 함께 복음(구원)이 이방지역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하나님의 돌보심(먹이심), 즉 구원(복음)이 유대에서 이방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특별히 앞의 기사와 함께 이 기사는 먹이심(급식)의 두 이적들(6:33-44; 8:1-9) 사이에 위치하여 그것의 의미를 '떡'(αρτος )과 '배불리 먹음'(χορταζω)의 단어를 반복함('떡'은 6:38, 41; 7:27; 8:5-6 그리고 '배불리 먹음'은 6:42; 7:27; 8:8)으로써 연결시키고 있다(Guelich 1989:383; Corley 1993:94).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다수의)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섞여있는 마가의 청중과 그들의 이방 선교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본 단락의 기사는 이적(축귀) 기사로 여겨진다(예수께 나아 옴; 축귀에 대한 간구; 믿음에 의한 딸의 온전해짐). 이 이적 기사는 앞의 논쟁에 대한 결론("부정한 손[사람]으로도 거룩한 떡[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 혹은 치유]을 먹을 수 있다")으로 제시되고 있다. 비록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논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기사는 여전히 논쟁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이방 여인과의 대화(26b-29절: 일종의 논쟁과 같은 문답)는 독자들에게 상당한 긴장감(혹은 갈등)을 제공하면서 설득력 있게 앞의 사건과 관련하여서 전체 주제의 결론으로 잘 이끌어 간다.

본문의 사건(장면)을 갈등구성에 의하여 분석하여 본다면 표 1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두로 지방에 오셔서 한 집에 머무름(24절)으로 시작된다(S1). 그의 머무름은 결코 은밀한 머무름이 될 수 없었다.

숨기고 감추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예수님,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속성이다. 결국 예수께서 이 곳에 오셨다는 소문은 신속히 퍼져 나갔다. 이러한 소문으로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이방 여인이 주님께 찾아 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함으로써 사건은 갈등국면으로 전개된다(S2). 본문이 말하는 대로 이 여인은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인 예수께 직접 찾아와서 그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한 일은 그 당시의 규례를 벗어난 다소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적인 답변(27절)은 이 사건을 갈등으로 더욱 고조시키기에 충분하였다(S3). 그러나 예수님의 차가운 반응(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낙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반응함으로써 사건의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S4).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이 반응은 앞에서 차갑게 답변하였던 예수님으로부터 과연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낼 것인가? 본문의 사건은 그 갈등이 이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여인과 함께 독자는 예수님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될까? 여인의 이 지혜로운 답변(믿음의 답변)에 대하여 주님은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이 떠났음을 알려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 드디어 절정에 이른 갈등은 해결에 이르고(S5), 딸의 온전해진 모습이 언급됨으로써 사건은 종결(대단원)된다(S6).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30절).
 

2. 사건의 배경(24절)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두로 지경")의 언급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옛 경계를 넘어서 이방 지역(페니키아)인 두로와 시돈까지 뻗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막 5:1-20에서 거라사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개방을 암시하였다. 제자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항해의 목적지("저편으로 건너가자")가 이방의 거라사 지역임을 독자는 알고 있다. 거기 더러운 땅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에 자신은 홀로 뭍(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을 다시 배를 태워서 벳새다로 가게 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두로와 시돈의 해변도시들을 바라보는 게네사렛의 땅이었다. 이곳 게네사렛 땅에서 정결 논쟁(7:1-23)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막 7:24-8:21은 주로 갈릴리 주변의 북쪽과 남쪽의 이방지역 즉, 게네사렛 -> 두로 -> 시돈 -> 데가볼리 -> 갈릴리 -> (데가볼리) -> 달마누다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막 8:22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은 여행의 목적지인 벳새다로 돌아왔음을 마가는 언급하고 있다.

24절에 언급된 배경을 통해서 독자는 사건의 배경이 불결한 이방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사건에 묘사된 것들 즉, 두로, 더러운 귀신,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 개들은 이러한 이방지역의 모습을 강화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Εκειθεν δε αναστας απηλθεν εις)의 표현(cf. 막 1:35; 10:1)은 사역의 새로운 전환을 알리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tock 1989:210). 이 기사로부터 이방지역에서의 사역 단락(7:24-8:26)이 시작된다(Swartley 1997:19). 그리고 이어지는 해설자의 서술("한 집에 들어 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은 이 지역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예고해 준다. 조용히 자신을 감추려 하나 감출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cf. 1:44-45; 2:1-2; 3:7-8, 20; 6:30-33; 9:30). 아마도 그의 초기 사역의 영향력(3:8)과 최근의 사역(이적들)으로 인해 그에 대한 소문이 이곳 이방지역까지 퍼졌을 것이다. 24절의 언급은 사건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룬다.
 

3. 주님께 나아온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25-26절)

해설자에 의하면 주님께 나아온 이 여인은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헬라인(이방인)인 수로보니게인으로 묘사되어 있다(25-26절). 여기서 '헬라인'이란 단순히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헬라의 시민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인임(Stock; Corley; Guelich)을 암시하고 있다(예수님과의 수준 높은 문답을 통해서).

더러운 귀신에 의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어린 딸을 가진 헬라시민인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곧 주님이 은둔해 있는 집에까지 찾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나아와 엎드리어 딸의 구원(축귀)을 간청한다.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의 집에 찾아온 행동이나 그 발 아래 엎드린 행동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곧 와서"라는 표현과 "그 발아래 엎드리어… 간구한다"의 표현은 귀신들린 어린 딸의 상태의 심각함과 그 딸을 고치고자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열망과 행동을 잘 묘사해준다. 이처럼 더러운 귀신들린 자신의 어린 딸의 고침(구원)을 위한 그녀의 행동은 즉각적인 행동이었을 뿐 아니라 필사적이고 겸손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러움의 문제, 악한 생각과 같은 내면의 문제를 놓고 얼마나 신속하고 겸허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여인의 겸손하고 간절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반응은 매우 차가 왔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차가운 거절의 반응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4. 주님의 응답(27절): 비유로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어 딸의 치유를 겸손하게 간구하는 여인에게 내뱉은 예수님의 말씀은 모욕적인 거절(?)의 반응이었다(Corley 1993:99-100). 예수님의 거절의 말씀은 비유로 주어졌다. 예수님 당시의 해변의 두로 지역은 갈릴리 북쪽 산지의 유대 농부들의 농작물들을 사서 쓰는 부유한 도시였다.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따르면 이 지역은 북쪽 갈릴리와 해안도시인 두로 지역 사이에는 농지의 제한 때문에[1] 농작물 공급이 항상 문제였다(cf. 행 12:20). 이러한 상황에 특별히 농작물이 귀한 시절(겨울)이 오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유대 농부들은 예비한 곡식이 없으므로 음식섭취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위의 비유를 말하곤 한 것 같다(Stock 1989:212). 과연 '자녀의 떡'(이스라엘의 농작물)을 취하여 이교의 '개들'(이방인들)에게 주는(파는) 것이 옳은가?

여기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서 왜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이 믿음의 여인에게 그와 같은 반응을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언급된 치유기사들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겸손히 찾아와 은혜(치유)를 구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반응을 결코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러한 믿음의 행동을 귀하게 여기셔서 칭찬하시며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셨다(중풍병자의 친구들, 손 마른 사람, 혈루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 등).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와 의도는 무엇인가? 그 당시의 정황이나 문맥을 고려하면 비유의 말씀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대단히 의도적임을 본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유는 농작물이 귀한 시절에 유대 농부들이 불평 어린 말로서 예수님은 지금 여인에게 이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그녀의 믿음을 시험할(Calvin in Cranfield 1972:248-249; Lane 1974:262)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방)사역의 의미를 보다 역설적으로 알리려고 한 것 같다(Camery-Hoggatt 1992:150-151).

막 4:11-12에 따르면, 예수께서 딸의 온전해짐을 간청하는 이방 여인에게 거절의 비유(riddle)로 응답하신 것은 이 여인을 외인(outsider)으로 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그 비유를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놀랍게 응답하고 있다.

 
5. 이방여인의 응답(28절): 외인(外人)에서 내인(內人)으로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방인)으로 여기며 비유로 대답하신 예수님(cf. 막 4:11-12)에 대하여 이 여인은 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혜롭게 응답(응수)하고 있다. 여인의 대답은 그녀가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선권(혹은 특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고 있음("주여 옳소이다마는")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놀라운 능력에 호소하면서 비록 자신이 개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먹던 부스러기라도 얻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그녀의 높은 신분이나 유대인과 두로인 사이의 갈등(Garland 1996:293)을 고려한다면, 여인의 이 반응은 매우 특이한 행동이었다. 모멸스러운 비유적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딸의 온전해짐(떡을 먹음)을 위하여 자신을 개로 여길 정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낙망치 않고 끈질기게 반응한다. 딸의 치유(온전해짐)를 위해서 그녀는 이러한 모멸과 거절의 벽을 넘어서야만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끈질긴 간구는 응답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다.

마가복음의 비유이론(4:11)에 따르면, 이 여인은 외인에게 주어지는 비유를 설명 없이 깨달음으로써 더 이상 외인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제 이 여인은 그 나라의 내인의 위치 에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내인(하나님의 자녀)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외관이 아니라 믿음이다(막 1:14). 왜냐하면 앞 단락(7:1-23)에서 본 대로 내인이 되는 것은 내면의 변화와 믿음이기 때문이다. 거절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 여인에게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내인으로서 치유의 은혜가 주어졌다(29절).

 
6. 예수의 선언과 딸의 치유(29-30절)

그녀의 담대하고 적극적인 믿음과 지혜와 신뢰의 행동은 (인종과 성별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구원의 이적을 경험하는 축복으로 이끌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을 단순히 듣고(믿고) 집으로 돌아간 그 여인은 자신의 어린 딸이 정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여인의 신앙의 결과는 단순한 부스러기의 먹음이 아니라 배불리 먹은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돌보심, 치유)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이제 더 이상 외관상 차별이 없음을 보게된다. 행 10:34-48(특히 34-35절)과 15:6-11의 베드로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방인에게도 믿는 유대인과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신다(cf. 갈 3:28). 그러므로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가 고백한 것 처럼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닫게 된다. 비록 이 여인이 수로보니게 태생의 헬라인(이방인)이라고 할 지라도!


7. 나가면서
 
초기에는 이 이방여인의 간청이 거절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여인(의 딸)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돌보심(먹이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기사는 앞의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이방인이 외관적으로는 불결하여도 하나님의 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떡을 배불리 먹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방지역의 급식이적(8:1-10)에서 보는 대로 이제 이방인도 하나님의 상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을 이 기사는 미리 입증하고 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더 밝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놀라운 복음을 먼데 있는 이방의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상에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는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려움(장벽)을 만날 때 더 강해짐을 잘 교훈해 준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이적기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간구 할 때까지 그들에게는 평탄의 길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장벽들을 넘어서서 주님께 나아왔다. 문둥병자도(1:40[접촉할 수 없는 문둥병]) 중풍병자도(2:4[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 야이로도(5:35-36[딸의 죽음의 소식]) 혈루증 여인도(5:27[불결한 상태])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9:18[제자들의 초기 실패]) 바디메오(10:48[조용히 하라는 무리의 계속된 경고])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신앙은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더 강하여 진다. 모멸적인 거절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여인의 믿음은 환난 가운데 있는 마가의 청중이나 오늘 우리에게 귀한 신앙의 범례가 된다. 이 여인은 말씀과 믿음으로 환난이 와도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받아 결실하는 전형적인 옥토의 모습(막 4:20)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말씀(초기의 믿음)으로 인해 환난이 오면 곧 넘어지는 돌밭의 사람들은 아닌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멸적인 도전(야유)앞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존심을 쉽게 손상시키는 사건(일종의 장애물과 어려움) 앞에 우리는 체면과 감정에 의해 그냥 무력하게 걸려 넘어져서 돌아서지는 않는지. "아니 내가 이 일(수치: 경한 일) 당하려고 이 짓(중대한 일)을 해" 라고 금방 화를 내고 욕하고 돌아설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고통스러운 경멸의 순간(비유)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그것을 긍정적 상황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녀의 생애에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것이 신앙의 지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적은 것'[먹던 부스러기](감정, 자존심, 체면)에 걸려 넘어져 '큰 것'(신앙, 성숙)을 잃게 되는가? 결국 이 여인은 부스러기를 구했지만(실제는 배불리 먹음) 그녀의 겸손하고 적극적인 신앙의 간청으로 딸의 구원을 얻게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이와 같은 신앙적 지혜는 간구 하였던 [부스러기] '떡'(치유=구원)을 기다림 없이 동시에 같은 상에서 먹게 되었다(Lane 1974:263). 그것도 넉넉하게.

딸의 온전해짐을 위한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복음을 위하여 즉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모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뭇 사람의 끝('개'로서 취급당한다 할지라도)이 되어 뭇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하는 제자도의 겸손한 모습(9:35; 10:43)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Garland 1996: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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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편집인, 총신대 신대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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