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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풀어 가는 지혜 (마 15:21-28)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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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풀어 가는 지혜  (마 15:21-28)

본문에 보면 아주 불행을 당한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어머니가 당한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그 어려운 불행을 아주 지혜롭게 풀어 가는 모습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 그리고 불행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문제들을 풀어가며 살아야 하는데 지혜롭게 풀 방법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좋은 해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리리 지역에서 전도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옮겨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로부터 5,60km 떨어진 지역인데 거기는 이방 땅입니다. 그곳에 이르렀을 때 어느 가나안 여인이 좇아와서 예수께 절규를 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하고 부르짖습니다.  

이 여인은 참 불행한 어머니입니다. 딸이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귀신들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아무데나 웃으며 돌아다니고 넘어지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고 빈집만 골라 찾아가서 우거하고 밤이 되어도 잠을 자지 않습니다. 밤을 꼬박 새워도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귀신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돌아다니고 그럽니다. 그런 여자를 옛날에는 미친 여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딸이 그러고 다닙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러니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 어머니는 참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다 이런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당면한 문제들이 한두 가지입니까. 자식의 문제, 부모의 문제, 형제의 문제, 경제의 문제, 직장의 문제 등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식이 문제입니다. 입시문제, 취직문제, 탈선문제, 장래문제, 사업문제 등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 부모가 오랫동안 병석에 놓여있습니다. 집안 형제들이 모두 매달려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내 형제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도와 주어도 끝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살아가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누워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이 어머니의 모습이 곧 내 모습입니다. 이 어머니가 지금 얼마나 답답하고 고달프고 슬프고 힘겨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

그래도 여러분, 마음이 답답할 때 찾아가 부르짖을 대상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답답할 때 붙들고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도 축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짖을 대상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헤매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믿는 신앙인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붙들고 호소하고 탄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질렀으면 무슨 응답이 와야하는데 이 여인이 그렇게 호소를 했는데도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말씀도 안 하셨다”고 했습니다. 부르짖었는데도 한 말씀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이 때가 온갖 회의가 찾아오는 단계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지금 다급해 죽겠는데 그래서 부르짖었는데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막막함을 모두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이 때가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 때가 온갖 회의가 찾아오고 실망감이 몰려오고 실낱같았던 신앙들이 모두 끊어져 나가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성격 급한 분은 모두 포기해버리는 단계입니다. 성격이 급한 분은 신앙생활 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답답한 문제가 있어서 기도를 했더니 아무 응답도 아무런 조치도 없더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도했느냐고 물으니 몇 시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그렇게 해서 쉽게 풀린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이 여인이 딸이 귀신 들려서 다급해서 체면 불구하고 부르짖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II

성경을 보면 이 여인이 여기서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르짖었습니다. 성경 25절을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멀리서 품위 있게 외친 것이 아니고 바짝 다가가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점잖게 기도하다가 안되겠으니까 금식기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아픔은 금식하는 일입니다. 이 금식기도는 살을 빼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아픔입니다. 딸의 장래를 위해서 어머니가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열심히 기도해 두어야 합니다. 평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렇게 다급하게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이 지경이 되어서 기도하게 되면 사람이 비참해집니다. 그렇게 금식기도를 했더니 드디어 응답이 왔습니다. 성경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뺏어서 개들에게 던짐이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겨우 응답이 오긴 왔는데 그 응답은 조소였습니다. 비웃음이었습니다. 그 말은 “자녀에게 줄 떡을 뺏어서 어떻게 개와 같은 이방인인 너에게 줄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모욕의 극치입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때로 조소가 오고 비웃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부끄러운 것이 이 조소받을 때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잘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하고 일도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가정도 평화하고 삶도 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그렇게 살면 세상을 얼마나 자신 있게 살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신앙생활이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생적으로 다 잘됩니까. 다 성공하고 다 건강하고 다 행복합니까. 그리고 다 잘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복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실패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어려움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보아란 듯이 복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때로 그게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기에 참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곧 바로 조소가 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더니 그게 복이냐” 그러면서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 한다더니 그것이 건강이냐, 그래서 암에 걸리고 빨리 죽느냐” 그러고 비웃습니다. 그때는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실패를 했습니다. 다 날렸습니다. 집도 날아갔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전도를 중단해야 하겠다 라고 말합니다. 도무지 부끄럽고 창피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는 것 같아서 전도를 못하겠다 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와서 외쳤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겨우 응답이 왔습니다. 그 응답이 조소였습니다. “자녀의 떡을 뺏어서 개들에게 던짐이 합당치 않다”. 자기를 개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이고 이방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여러분, 욕 중에서 가장 지독한 욕은 개라는 말이 들어간 욕입니다. 말에 개자가 들어가면 모두 모욕스러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이쯤 되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이고 뭐고 딸이야 죽든 살든 침 뱉고 돌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생활 하다가 조금 개운치 안은 일만 보아도 실망했다고 안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개라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합니까. 더 이상 어떻게 참습니까. 그런데 이 어머니는 개가 아니라 더한 욕이 온다해도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포기하면 내 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모욕을 당했다고 기분이 상했다고 돌아가면 내 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III

그래서 이 여인은 그 모욕과 수치를 감수하고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가 더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해도 좋았습니다. 개가 아니고 더 흉한 욕을 해도 좋았습니다. 내가 욕을 먹고 개가되고 더 진한 모욕을 당해도 좋았습니다. 다만 내 딸이 고쳐지고 내 딸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별 수치를 다 당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다시 일어나서 부르짖었습니다. 27절을 보면 “주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말은 “주님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누가 온전한 떡을 달랬습니까. 부스러기, 찌꺼기라도 좋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런 인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의 극치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사람들을 보면 너무 쉽게 결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힘써서 얻으려 하지 않고 요행으로 뭔가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입니다. 세상일이 그렇게 쉽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십시오. 모두 인내의 결과 위인들이 다 되었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지 않고 들림을 받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모진 훈련을 다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합니다. 요셉은 10년을 감옥에서 소리 없이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보아란 듯이 부활합니다. 다니엘은 타국에서 온갖 모함 속에서 인내하면서 참아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 모진 모함들을 이겨내고 그 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어른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그냥 참은 것이 아니고 모욕 속에서 인내로 감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참아내서 결국 신앙 안에서 승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두 의인이 되고 위인이 되었습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은 여러번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고 합니다. 100메타를 팠는데도 물이 안나옵니다. 얼마나 더 파야할지를 모릅니다. 그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그 때 포기하고 다시 다른 곳을 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포기하면 물을 얻기가 힘듭니다. 조금만 더 파면 물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단계를 넘기가 어렵습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뛰다가 탈진상태가 되면 여러번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온다고 합니다. 뛰다보면 그런 포기하고 싶은 느낌이 오는 마의 고개가 몇 차례 온다고 합니다. 그때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동반하는데 참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빈사상태에서 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뭔가 이룬다는 것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으니까 겨우 응답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조소였고 비웃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서 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더 이상 부르짖어야 하나.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이 여인은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기회는 다시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내 딸을 위해서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응답 받는 신앙생활은 인내의 생활입니다.

                                    IV

그때 주님께로부터 다시 응답이 왔습니다. 28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 " 하시니 그 딸이 즉시 낫으니라. 주님은 이 여인을 모욕하려한 것이 아니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부르짖음을 모르실 리 없었지만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시험해 보았더니 그 믿음이 너무나 깊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되라,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딸이 즉시 나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그냥 되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되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쉽게 이루어졌다 요행으로 잘 되었다 하는 일은 모두 별로 중요한 일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은 모두 이런 수고가 들어가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때로 시험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두 쉽게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두 쉽게 살고 문제들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주님은 이 여인을 혹독하게 시험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달아보시려 했습니다. 보시고 기쁨을 얻으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마음으로 더 빨리, 더 깊이,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 보셨습니다. 아주 모욕적인 말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모두 믿음으로 이겨내고 끝까지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아주 만족스럽게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 경우는 바로 우리에게 암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모두 이 여인 같은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몇 번 기도하다가 조그만 시험이 오거나 응답이 없으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수단을 찾아 나서고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탄식하고 그럽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소중한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많은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가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처럼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확신 있게 응답 받는 축복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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