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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시103:8-14 요 8:1-11)
한 마리의 늑대가 사냥개에게 쫓겨 어느 동네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 담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늑대는 구원을 청했습니다.
“고양이야, 이 동네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을 가르쳐 주렴. 난 지금 사냥개에게 쫒기고 있어.”
“그럼 김 서방네 집으로 가세요, 늑대 아저씨.”
“그렇지만 나는 김 서방네 돼지를 죽인 일이 있는데…”
“그래요? 그럼 이 서방네 집으로 가세요.”
“이 서방도 무서워. 난 그 집 염소를 훔친 일이 있으니까.”
“그럼 박 서방네 집은 어떨까요?”
“거기도 안 돼. 그 집 닭을 잡아먹은 일이 있으니까.”
그러자 고양이는 사나운 눈초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당신을 도울 사람은 없어요. 손해를 입힌 당신을 구해 줄 바보는 이 동네에는 없으니까요. 자기가 심은 씨는 자기가 거둘 수밖에 없죠”
이 말썽장이 늑대에게 죽을 때가 온 것을 기뻐해야 되겠습니까? 이 늑대는 돼지를 죽였고, 염소를 훔쳤고 닭을 잡아 먹었기 때문에 사냥개에게 잡혀서 죽어야 합니까? 정말로 자기가 심은 씨를 자기가 거둘 수밖에 없습니까? 만약 우리 자신이 심은 씨를 철저히 모두 거둔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간음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 왔습니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온 이 여인의 모습이 어떻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잠자리에서 잡혀 왔으니까 헝클어진 머리, 공포에 질린 얼굴,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칠게 끌고오는 도중에 폭력으로 당한 상처들이 보였습니다. 어차피 돌에 맞아 죽을 여인이기에,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처지이기에 눈꼽 만큼의 동정을 받을 여지도 없었습니다.
과연 이 여인은 옷이라도 걸치고 왔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왔을 때는 이 여인의 부도덕성과 간음의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분명히 옷을 대강 입힌 채 그대로 끌고 왔을 것입니다.
옷은 문화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입니다. 문화의 발달과 시대에 따라서 옷의 재료와 모양이 달라지고, 사회적 신분과 부의 정도에 따라 옷의 재료와 모양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옷은 사회적 신분과 역할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옷을 흩트러지게 입은 인간은 이미 옷만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존재 가치에도 이미 큰 손상을 입은 사람입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다 상실한 인간입니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여인의 비참함, 그녀를 통해서 사람들은 전혀 인간의 존엄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한 마리의 동물처럼, 한 마리의 곤충처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성전 안에까지 끌고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둘러 싼 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은 어땠을까요? 저들의 얼굴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공격성과 분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워놓고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아주 긴장된 순간입니다.
“예수 선생, 이 여자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의 의견은 어떻소?”
주저하시는 예수 - 계속되는 질문
예수님은 대답을 안 하시고 허리를 굽히시고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한참을 쓰시면서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다. 그러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참지 못하고 계속 대답을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만 쓰고 계십니다.
고발할 조건
그들은 왜 이렇게 대답을 다구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요8:6).
그들은 지극히 당연하게 보이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속에 도대체 어떤 고발할 조건이 숨어있다는 말입니까?
첫째 경우, 만일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돌로 치지 마시오’ 한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될 것입니다(신22:22-24). 모세는 ‘돌로 쳐 죽여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알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제 ‘돌로 치지 말라’ 하시면 ‘예수는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이요, 모세의 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악선전을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당장 산헤드린 공회에서 율법을 어긴 것으로 고발을 할 것입니다.
두번째 경우, 만약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예수님 당신의 평소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말씀이 됩니다. 당시에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은 반드시 로마 정부에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없고, 또한 사형을 집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돌로 쳐라’ 하셔서 사람들이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날이면 로마의 실정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선동하고 사람을 죽인 죄를 지고 살인자가 되은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예수님은 로마 법정이든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이든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교묘하게 예수님을 딜레마(Dilemma = 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습니다. 이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목적은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한 쪽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한 여인이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서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둘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오랬동안 땅에 글을 쓰시는 것은 예수님의 심각한 고민을 말해 줍니다.
사실 당시 상황은 예수님께 매우 위험했습니다. 바로 앞장인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고 갈릴리 지방에만 계셨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심각하게 돌아가자 예수님도 망설이는 행동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요7:8)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뒤에, 예수께서도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요7:10).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안 올라 가신다고 하시고서는 몰래 올라가셔서 절기의 중간부터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죄 짓고 힘 없는 한 여인의 생명을 볼모로 하여서 예수님까지 덤으로 고소할 조건을 찾고자 하는 죄악이 보입니다. 여인의 생명은 도박판의 판돈처럼 예수님과의 논쟁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신 이유는?
왜 말로 하시지 아니하고 땅에다가 글을 썼을까?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1. 예수님의 분노를 감추기 위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추악함을 보시고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분노로 불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Temple)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2. 사악한 질문을 무시하기 위해서
또 칼빈(J. Calvin)은 말합니다. 그들의 교활한 질문을 지혜롭게 무시하시는 행동으로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글을 쓰셨다고 말합니다.
3. 감정을 식히려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흥분한 감정을 식히려고 하십니다. 쿨 다운(cool down)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격분해 있습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분노하고 공격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군중심리가 발동을 했습니다. 떼를 지어서 돌을 들고 막 치려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격한 감정을 일단은 가라앉히고 싶었습니다. 밝은 이성과 밝은 양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4. 지성으로 돌리려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책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000년 전에 글 읽는 사람이 몇 명 안되었습니다. 글만 읽으면 그게 지성인입니다. 그래서 땅에 글을 썼어요. 지성인 먼저. 글을 볼 줄 아는 사람 먼저, 와서 보라 이겁니다.
이래서 감정을 식히고 지성인 먼저 이 글을 읽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쓰신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드리어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나 여기에는 두개의 조건이 있습니다.
1. ‘죄 없는 사람’이 치라
2. 그리고 그 사람이 ‘먼저’ 치라
누가 먼저 칠 수 있는가? 많은 군중 앞에서 눈에 띄는 행동입니다. 누가 처음으로 돌을 던지는 ‘총대’를 맬 것인가? 첫째로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성결, 최고의 순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습니다. 특별히 돌을 들고 던지려고 하는 남자들을 향한 질문입니다. 너희들은 간음한 적이 없느냐? 너희들은 매춘한 적이 없느냐? 이 여인이 간음을 했다면 남자와 함께 했을텐데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22:22).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함께 죽여야 하는데 왜 여자만 죽이려고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뭘 알라는 겁니까? 나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 나의 무능을 알라. 내가 지혜가 없음을 알라,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 자신이 죄인임을 알라’라는 말씀입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그 묘비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궁금하지요?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그저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주여 나에게도 베푸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나는 저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귀중한 복음입니다.
무엇을 쓰셨을까?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고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문제는 뭐라고 썼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썼는가는 성경에 없습니다.
세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1. 하나는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먼저 쳐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글 읽는 사람은 먼저 읽고 글 못 읽는 사람들은 자꾸만 재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읽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다 가 버리고, 글을 못 읽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2.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각자의 죄목을 썼을 것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위선, 교만, 이렇게 죄목을 쭉 썼을 것입니다.
바울이 적은 죄악의 목록은 이렇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29-31)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롬 1:32).
사람들은 특정한 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음죄는 절대 안 된다. 그럴 수가!
도적질은 절대 안 된다. 어떻게 남의 물건을 강탈할 수가 있는가?
살인죄는 절대 안 된다. 어떻게 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죄는 죄입니다. 모든 죄의 삵은 사망입니다. 간음만이 아닙니다. 이 모든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3. 또 짐작하기를 그곳에서 정죄하기에 앞장섰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이름을 하나씩 쓰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야곱이라는 서기관이 ‘빨리 대답하라’ 하고 재촉을 하면 예수님이 죄인의 명단에 ‘야곱’ 이렇게 쓰고, 요셉이라는 바리새인이 빨리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면 ‘요셉’이라고 쓰시지 않았을까요?
야곱, 너도 죄인이다. 베냐민, 너도 죄인이다. 유다, 너도 죄인이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해야 될 것은 이렇게 흥분한 군중들이 집단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격해서 지금 집단화해서 행동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개별화했습니다. 흩어 놓았습니다. 글을 써서 한 사람 한사람 와서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 먼저 죄인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가장 먼저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인가?’
갈라디아 6장 1절을 보면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앞차가 고장이 났으면 내 차가 어떤가 생각해야 되고, 앞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으면 나도 넘어질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죄악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게 그런 죄가 있나 없나'를 돌이켜 봅니다.
결과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인 군중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나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만 혼자 남은 것을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돌로 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로 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나도 나 스스로를 죄인처럼 간주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 자신이 죄인이 되는 시간입니다.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러분,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여자를 은혜로 살려 주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녀의 변화의 가능성을 보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가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해도 주님은 그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모두에게서 순교자의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모든 죄값을 나로 하여금 감당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내 대신 위험을 담당하시고 내게 생명을 주시는 것, 죄인이 죽지 않고 사는 것, 먼저 용서받고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악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끌려운 이 여인처럼 이 세상의 죄악에 이끌려서 다 찢어진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 이상도 아니고 죄인 이하도 아닌 단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깨끗한 흰 옷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골고다와 무덤까지도 따라 갔으며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폴리캅은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웠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날카로운 바다 조개 껍질 위나, 땅 위에 박아놓은 창끝에 눕혀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습니다.
총독은 폴리캅에게 그리스도를 한 번만 모독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이때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 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를 정죄해도, 예수님은 나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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