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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전도 (행8:1-8)

by 【고동엽】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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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전도   (행8:1-8)


Ⅰ. 들어가는 말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지위의 고저나, 인종이나, 지역으로 제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로 인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시절 선민적 배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인종과 지역을 철폐하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박해라는 방법이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는 훈련된 사람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인종적, 지역적인 편견의 벽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유대인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상종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박해라는 바람을 타고 빌립이라는 촉매를 사용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마리아 전도에 이른 과정까지를 관찰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사람들, 특히 빌립 집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누가는 전합니다. 이제 차례로 이 이야기들을 살펴 가시는 중에 우리의 속사람에 복음을 전해야할 것에 대한 새로운 부담감과 함께 의욕이 생겨나는 시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Ⅱ. 본문 관찰

1. 핍박자 사울(7:58; 8:1,3절)
항상 일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지곤 합니다. 최초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령 충만 한 사람들에 의해서 나날이 성장해 가고 있을 무렵 자신들의 밥그릇만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지만 타락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사도들이 그들의 법정에 서기 시작합니다. 그때마다 사도들의 불을 토하는 듯한 질책이 그들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백성들이 무서워서 민의가 무서워서 억지로 사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성전과 율법에 관한 변론을 했고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복하지 않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을 또 다시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과 모함이 난무하는 공회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은 가운데 스데반의 긴 변론이 이어졌습니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을 가진 이 변론의 결론은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51-53절)는 신랄한 죄의 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적을 받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회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귀를 막고 이성을 잃은 채로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그랬습니다. 아마도 스데반의 순교는 양측 모두에게 강한 자극을 준 것처럼 보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에게는 "이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박해를 당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신앙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각오와 신앙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의 여파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노골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박해는 로마의 대박해를 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로마의 박해는 시작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박해는 권력을 가진 유대인들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박해의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박해의 핵심 세력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울이 있었습니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자요,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자요, 로마 시민권자인 사울, 뒷날 자신이 지나치게 유대교를 열심히 믿었다고 술회했던 바로 그 시절의 사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말하기를 수데반의 순교는 뒷날 사도 바울의 생애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메섹의 경험을 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을 사울은 잘못된 종교, 배타적인 감정에 심취해 있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박해가 시작되자 사울은 이제 본격적인 핍박자로 등장합니다. 본문 3절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잔멸할 새}라는 말은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의 뜻을 지닌 '뤼마이노의 미완료 중간태인데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시80:13절에서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황폐화시킨 것을 나타낸 70인역의 표현 중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완료라는 시제는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황폐화 시키는 것처럼 과격하고 지도한 핍박을 사울은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처음에는 관망자였다가 점점 극심한 핍박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문과 논리적인 지성을 가졌던 사울이지만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던 듯이 보입니다. 또한 사람들이라면 누가나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3절이 보여주고 있는 사울의 열심은 분명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잔인한 행위는 뒷날 자신의 입을 통해서 여러 차례 회고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행22:4절과 26:10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갈1:13절에서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딤전1:13절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빌3:6절에서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그랬습니다. 잘못된 확신, 잘못된 종교의 폐해는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볼품없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써야할 소중한 학문과 지식이 엉뚱한 일에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서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라는 말 에클레시아는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울이, 권력을 쥔 유대인들이 핍박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을 일컬어 뭐라고 썼습니까?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그랬습니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건물도 필요하고 기타의 비품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2. 흩어지는 교회(1-4절)
그래서 교회, 즉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온갖 핍박과 고난을 감내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던 사람들, 찾는 이가 적은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걸어가기로 결정한 사람들, 망대를 세우면서 계산해 본 사람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행1:8절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그랬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임했고 사람들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날마다 모이는 자들의 수가 더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무려 이만 여명이 모이는 매머드급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흩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어져야 하는데 사람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곳은 교제권이 있고 말씀이 있었으며 섬기는 자가 아닌 배우는 자로서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사람들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이제는 어느 정도 훈련된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흩어져서도 신앙을 변절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증거할 만큼 준비된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역사와 박해라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든 고향과 집과 예배당을 떠났지만 그리스도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박해를 피해, 생명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도망자였을 지언정 그들은 자신들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속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흩어진 자리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 합니다. 마치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서 이제는 사방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과 같이 복음의 불길은 예루살렘에서 튀어서 유대와 사마리아에게까지 타오르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교회들이 선교의 중요성을 부르짖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는 흩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흩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선교의 센터로서 존재해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남아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이 거기 남아 있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항상 지나친 극단은 문제를 일으키게됩니다. 우리에게는 양육사역도 소중하고 차세대를 준비하는 것도 소중하며 선교도 소중합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저의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국면들을 볼 수 있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합니다. 요즈음은 문화 사역자들의 톤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시대에 대단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교회의 사명이 전부 선교로만 해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사마리아 전도(5-8절)
바로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현장에서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 의하면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박해는 비록 유대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복음의 불길이 번져나가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특히 흩어져 복음을 전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빌립 집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이 사마리아 전도에 대해서 8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전도가 가지는 비중은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적대감은 무려 천년간이나 지속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적대감의 진원지는 분열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르호보암에게서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찢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졌을 때부터 이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 오시기 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점령당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방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이방인들과 섞임으로 인해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인종과 종교면에서 혼합된 길을 걷게되자 주전 6세기경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거부하는 배타성을 띠게됩니다. 그리고 주전 4세기에 이르러 사마리아 분파가 그리심 산에 유대인들과 경쟁하여 성전을 세우고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성경을 거부하게되자 그 분파는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혈통과 종교 양면에서 잡종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교도이며 분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요4: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그랬습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반목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방인들에게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를 향한 첫 걸음은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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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증거했다고 말씀합니다. 정확히 사마리아 성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오랜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가 선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인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야 이것이 그렇게 새로운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당시에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들어간 빌립의 전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말씀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표적도 행했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빌립 집사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빌립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표적도 행했는데 그러한 표적들은 빌립의 전파하는 복음에 신실성을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성에는 큰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귀신 들린 사람들,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들, 그리고 복음을 들어야할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물결이 넘실거렸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시며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왜곡된 질서, 죄로 말미암아 어긋나고 잘못되어진 것들을 바로잡으심에 대한 상징들로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장차 누리게될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왜곡된 세상에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시는 주님! 장차 우리가 상속받게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이요 sample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가 전도하던 현장에도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뒤따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은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을 살게합니다. 전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경험이나 간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이 죄인인가를 이야기하고 그 죄로부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내가 본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표적과 기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할 일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빌립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박해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박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훈련된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나가기를 원하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전해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복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상이 마술사 시몬이든, 에디오피아의 내시이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증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침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의 편견 속에 가두어둔 우리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한해가 다 가기 전에 1998년이 과거로 흘러가 버리기 전에 우리 속에 충만한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 * )

          
출처/김종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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