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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벧후 3: 8-10)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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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벧후 3: 8-10)


우리가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읽으면서 직면하게 되는 두 가지 위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를 설명하고, 세상의 미래를 예견하려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과 노력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하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이 선지자들, 그리고 이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셨고,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지혜를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위치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주장하는 것이고 그는 그렇게 해서 지난 역사를 인용해서 조롱하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이전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인간적인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하고자 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들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일어났던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오래 참으신 후에 행동하신 그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상기시켜 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이것을 좀더 자세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사람들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스스로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복음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대부분의 서신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게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롱하는 사람들과는 같지 않다 해도 그들은 꽤 자주 꼭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서 여러 곳에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하는 질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 반대로 조롱하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질문의 성질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질문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백성들이 상심하게 되는 것을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곳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대다수는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주님을 빨리 다시 보내시지 않으시는가?”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 당시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불경건과 불신앙을 보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묵인하시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능력이 많으시다면 왜 이 일이 계속되도록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왜 계속해서 간섭하지 않으시고 이런 상태로 내버려두시는가? 왜 하나님과 원수되는 세력을 그냥 놔두시는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고 우리도 그의 약속을 믿는데, 왜 그 약속을 아직도 행하지 아니하시는가?”라고 묻고 싶어합니다. 그런 질문을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조금도 무지한 일이 아닙니다.


시편 73편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의 회의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의 소득은 마음에 소원하던 것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의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대답을 두 가지로, 그러니까 일반적인 대답과 특수한 대답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일반적인 요점이 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때와 시기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짜와 때와 시기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일에 대해서 성경에서 여러 번 경고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우리가 종말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때에 대해서 결코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약 성경의 전반적인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를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계산법대로 그때를 계산해보고 알아맞히려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고통과 고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경고하는 것은 때와 시기와 날짜에 대하여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이전에도 그들의 시대에 주님이 오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인물과 그 상징을 동일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가령 그들은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때와 시기를 알아맞히려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실수를 하게 됩니다.

전에 세계 제 1차 세계대전을 종말의 대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도 사람들은 뭇솔리니나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예기치 않게,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온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마 베드로가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원리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은 죄로 인하여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길과 하시는 일을 꼼꼼히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것은 우리가 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지시하는 길로 걷다가 고통을 받으면 그래서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것을 알아내려고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그의 생각은 영원하고, 나의 생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게 되면 바로 거기서부터 잘못이 생기게 됩니다. 아주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어 무한한 성질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사건이나 사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완전히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근본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시간의 과정 속에서, 혹은 시간과 인간의 역사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완전히 초월해서, 시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할 때 시간의 요소를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시더라도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시간의 과정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계를 만든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시간이 없이 계십니다. 시계를 만드는 사람은 시계를 만들어 그것을 감고 그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는 그 과정을 시작하여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2세기 전 자연신론자의 논증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과정을 움직이도록 하고, 그것이 계속되도록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시간을 조절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활동은 모두 명확한 계획에 따라서, 그리고 아주 명확한 조직에 의해서 수행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그 점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때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과정은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지 살펴보세요. “때가 차매”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시간 속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과정과 인간 역사의 과정을 움직이게 하시면서, 동시에 시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시간 밖의 세계로부터 시간의 과정 속으로 들어오시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간섭하시고, 시행하십니다. 그가 언제 그렇게 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와 계획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어하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언제나 도덕적 상황이 문제가 됩니다. 가령 창세기 6장 3절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때 세상은 죄를 짓고 있었고 도덕적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책망하셨고, 정죄하셨고, 회개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하기를 멈추고 내가 활동하게 될 그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달력 위에 있는 어떤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 상황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하시고 활동하실 만큼 악화되는 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할 때에만 행동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네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세기 전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벌은 죄악의 정도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 천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도 말씀했습니다.


언제 세상의 끝이 오게 될까요? 그것은 복음이 온나라와 온백성들에게 전파되어지는 때입니다.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세상에 오셨습니까? “때가 차매.” 다시 말해서 도덕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되는 때입니다.

언제 세상의 끝이 올까요? 이방인의 때가 차야 비로소 오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의 열국에서 그의 백성을 부르신 후에야 비로소 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세상 끝의 날짜와 시간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의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와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종말이 오기 전에 무서운 배교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전에 종종 “이것이 무서운 배교입니다”라고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종말의 때를 알아맞히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교만하고, 경건치 아니하며, 불신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주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상황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에는 ‘주님의 약속하신 것이 너무 더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주님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의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하나님이 관계치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이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약속은 절대적이고,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변하지 아니하며 모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신앙으로 살며, 불의를 행하던 자들이 반드시 심판을 받으며 형벌받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시온에 세우리라.” 이것이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위대한 원리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읍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현재는 고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조롱할 것이고, 그 순간은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고 분명한 것처럼 불의한 자와 불경건한 자들은 온갖 변명을 다해도 소용이 없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충성을 다한 사람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라고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우시고 더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더딘 것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늦은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의로움만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원리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을 낳게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의 요점은 우리가 보기에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죽음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행동이 지연되는 이유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아의 홍수를 기억하시지요? 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악했음에도 불구하고 120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노아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기 전에 언제나 경고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도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비웃고 경멸하며 하나님을 멀리했어도 그들에게 계속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이 왜 지연시키셨는가를 물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여러 세기에 비추어 생각해 보세요. 왜 그것을 오랫동안 지연시켰을까요? 단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옛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세기를 걸쳐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셨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여러 해 지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은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보내졌고 이 오랜 세월을 통하여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너희에게 기회를 주었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이 장 마지막에 한 번 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 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하심, 의로우심, 완전하심, 그의 사랑, 그의 자비, 그의 긍휼을 상기해 보세요. 무엇보다도 그의 인내를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로 지나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거기서 쉬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주님의 권능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속해 있는 영의 방법이 어떤가를 알지 못하도다.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무도 멸망에 이르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모두가 다 이 거룩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완전한 지혜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과 긍휼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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