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 (삿10:6-16)

by 【고동엽】 2022. 7. 23.
 
전체 목록가기 용서 목록 돌아가기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  (삿10:6-16)

   오늘 본문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형식의 문장입니다.  즉 새로운 사사의 출현을 예견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어두운 상황을 알리는 전형적인 서술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보는 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8-9절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침략을 받고 십팔 년 동안 억압을 당하였으며 심히 곤고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10절이 전하듯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사사기 기록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의 기록들과는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6절 전체를 다시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했습니다.  보통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는 말로 그치던 것을 여기서는 길게 이어서 그 이스라엘 자손의 악을 열거하며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외에 신으로 섬겼다고 언급된 것이 주로 바알과 아세아 또는 아스다롯이었는데(삿2:11, 13, 3:7) 오늘 본문에서는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고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풍조가 그 절정에 달해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아람과 시돈과 모압과 암몬과 블레셋은 가나안 주변 동서남북의 모든 이방나라와 족속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우상뿐 아니라 먼 주변의 모든 우상들까지 끌어들여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데로부터 우상들을 들여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가 살다보니 어쩌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들도 모르게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그렇게 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밑바닥 구렁텅이까지 떨어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는 말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6절 끝에서 보듯이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였다" 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바알이나 아세라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은 버리고 그를 섬기는 대신 원근주변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는 일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전의 기록들과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의 학대와 착취를 견딜 수 없게 될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3:9, 4:3, 6:7)고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10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하는 절박한 상황을 낳은 그 근본적 이유를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조목조목 자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도 심각하게 그들의 죄상을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몰라서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알면서도 그런 죄악으로 빠져들어 갔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악이 더욱 가증스러웠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전의 기록들과 또 다른 점을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들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사사를 세우셔서 이방압제자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평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이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본문 11-14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언급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행한 배신의 역사 또한 길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구원으로 응답해줄 의사가 없음을 밝히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잘 해보라고 빈정거리시기까지 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차가운 하나님의 반응 앞에서 보인 이스라엘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15절과 16절 상반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한 말을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냉담하신 하나님의 반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옳은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권한이고, 그것에 대해 자기들은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냉담하셔도 대신 기대고 호소할 다른 누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부르짖은 것입니다: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부르짖음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없애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데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과 행동을 들으시고 목격하신 하나님께서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한두 번 속은 것도 아니고 한두 번 배신당한 것도 아니며 이제 또 용서하고 구원해줘 봐야 조금 세월이 지나면 또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아시기에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보지도 않으시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족속에게 고통 받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언제까지나 견디실 수 없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기 자녀의 모습을 보며 무관심하거나 마음이 편할 수 없는 부모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곤고를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끝 부분의 말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심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죄짓고 스스로 곤고함에 처한 백성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수없이 죄짓고,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후에도 오래 가지 않아 또 죄지으며, 하나님 배신하기를 거듭하는 백성임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시고 다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다시는 상관하지 않으시고 정말 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도 당신의 백성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는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감사의 이유이며 우리의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고 대상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살고 있고 내일도 살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단지 농업에 종사하시는 이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생업과 노동과 경제활동의 결과로 거두어들인 모든 수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절기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눈을 뜨려고 힘쓸 기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내던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심령으로 거듭나기를 다짐할 때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우리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으셨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오늘도 숨 쉬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지 못하고 여전히 죄지으며 살았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시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허락하고 계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갱신의 의지와 결심을 잃지 않고 또 많은 선한 일을 힘쓸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오던 여러 가지 주님의 사업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서울시가 새로 세운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의 운영을 위탁 받아 우리 교회에서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봉사의 훈련을 하며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언더우드교육관을 아무 사고 없이 완공하여 제 때에 봉헌함으로써 우리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남부러울 것 없이 좋은 환경을 갖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건물을 단지 주일 하루 교회학교를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초등학교 어린이에서부터 청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전천후 전방위 선교를 위한 시설로 활용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청소년문화선교부를 국내 최초로 신설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경제는 여전히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선진복지국가로의 진입의 꿈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밑바닥을 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아직은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잘났거나 잘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때문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은혜로운 일들의 근원에는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반복된 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고 이 땅의 많은 교회가 문을 닫았을지 모르며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연초부터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의 가정 가정과 이 교회와 이 나라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손꼽아보며 하루 종일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오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또 용서하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언제나 죄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는, 부르짖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가운데서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 행동과 실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고 우리에게 냉담하시게 만든 우리의 모든 죄를 내던져버리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몰차게 내치지 못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근심하시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