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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보다 용서! (요 8:1~11)
사람은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책 행복론에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 사람은 사랑할 때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할 남편이 있고, 사랑할 아내가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자녀가 있고, 부모가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 땀을 흘리고 일할 때가 행복합니다. 직장이 있고, 사업 터가 있고, 일거리가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을 알고 섬길 때 행복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살 때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를 알기 위하여 끝임 없이 노력하게 되는데 신학자 마틴부버는 “너와 나 사이엔 끊임없는 대화의 함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1. 간음 중 현장에서 잡힌 여인
여기 사랑에 목말라 사랑을 갈구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부끄러운 모습으로 끌려 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여인을 붙잡아 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3-5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고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6절을 보면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난처한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한다면 평소 사랑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이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에 로마의 법만이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데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여인을 용서하고 살려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이 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살려주라고 할 수도 없고 죽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 묵묵히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이 쓰신 글은?
성경은 예수님이 땅 바닥에 글을 쓰셨다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종이에 글을 남기셨다면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1947년 사해바다 근처에 쿰란 동굴에서 양 치던 목동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누가 동굴 속으로 돌을 던져 명중시키는가 하고 돌을 던지는 시합을 하다가 한 사람이 던진 돌이 굴속에 들어갔고 쨍그랑 소리가 나서 동굴 속에 들어가 보니 항아리 속에서 파피루스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해 사본이라고 하는데 이사야 48-59장, 하바국 1-2장, 신도훈련교본, 감사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의 절반은 목동들이 골동품 상인들에게 싼 값에 팔아넘기다가 점점 그 가치를 알고 나중의 것들은 비싼 값에 팔렸고, 그 중에 일부는 영국의 부유층에 의하여 비싼 값에 대영제국 박물관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낡은 종이쪽지가 이렇게 비싼 값에 팔린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인생, 고독, 죽음’이라고 쓴 낙서종이가 발견이 되었는데 그를 좋아했던 수집가에 의하여 비싼 값으로 팔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남기신 글이 있다면 비싼 값에 팔렸을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쓰신 글자는 무엇이었을까를 묵상해 봅니다.
첫째는 아마도 ‘죄’라고 썼을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보편성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또,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는 것처럼,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쳐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이라고 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양심을 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가슴이 뿌듯해지고 나쁜 일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18절에 가룟유다가 목매달아 죽은 것은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 호돈이 1850년도에 쓴 작품 중에 주홍글씨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딤즈 데일이라는 청교도 목사와 헤스터 프린의 간통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여인이 임신하여 배가 불러왔습니다. 당시 청교도 사회는 그녀를 정죄하고 일평생 가슴에 간음(Adultery)을 뜻하는 주홍글씨 A자를 달고 살도록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딤즈데일 목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서 양심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청교도 목사는 병도 없이 마르고 야위었습니다. 그의 주치의 로저칠링워드라는 의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끝까지 추적을 하는데 20년 만에 딤즈데일목사는 그녀가 섰던 재판자리에서 “내가 20년전 헤스터 프린의 상대 남자였다”고 소리치고 죽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편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녀의 간통사건은 잊혀지고 가슴의 글씨는 천사(Angel)를 상징하는 A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사람은 병들어 죽었고 재판을 받았지만 양심에 떳떳했던 사람은 행복하게 바닷가에서 딸을 키우면서 살았다는 이야기이비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의 양심과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번에 우리나라의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열린 우리당에 152석을 주었는데 이것은 한번 일 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또 야당인 한나라당에는 121석을 주었는데 이것은 잘 견제하라고 준 것입니다. 차떼기로 해먹은 당이나, 가방으로 해 먹은 당이나 다 같은데 국민들이 잘 대화하면서 정치하라고 그렇게 분배해 준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는 것은 양심에 호소를 한 것입니다.
3. 정죄보다 용서를!
사람들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8장 7절에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시자 모두들 돌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8~9절에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0~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정죄보다 용서하고 살아야 합니다. 정죄는 또 다른 정죄를 낳습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한다면 이 사회는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 덮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허물은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면 덮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좋은 점을 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마다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99가지의 단점이 있는 사람이라도 1가지 장점만 있으면 그 장점을 보고 칭찬해야 합니다. 사람은 칭찬과 격려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초등학교 다닐 때 수학 과목을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낙제 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성적이 나쁜 과목을 보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잘하는 한 가지를 보고 칭찬함으로 상대성원리를 발견했고 인류역사상 가장 IQ가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은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쓰면 이 세상이 모두가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면서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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