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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을 사랑하라 (호세아 3장 1-5절)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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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을 사랑하라  (호세아 3장 1-5절)


제가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 중에 하나가 'X맨을 찾아라'는 것인데, 그 프로 중에도 특히 '커플 선정' 순서가 재미있었습니다.
  남자 연예인 다섯 명과 여자 연예인 세 명이 서로 마주 서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면서 짝을 짓게 되는 것인데, 그 경쟁에서 탈락한 남자 두 명은 어쩔 수 없이 '남남(男男) 커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를 보기 시작한 이후로 한 일 년이 넘도록 그 커플 선정에 어느 정도 소위 '설정'이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는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누가 서로 짝이 되는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조바심까지 하면서 시청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커플 선정' 순서가 될 때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 번도 '남녀 커플'이 되어보지 못하고 '남남 커플'을 도맡다시피 하는 몇 명의 남자 연예인들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다른 남자 연예인 출연자들에 비해서 일단 외모에서부터 너무나 차이나고 나이도 많기 때문에, 그 젊고 예쁜 여자 연예인들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커플 선정이 실제상황이라면 더욱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일부러 설정을 해서 짝을 지어준다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채O'이나 '윤OO' 같은 미녀들한테 '강OO'이나 '박OO' 혹은 '지OO' 같은 남자를 고르라고 시킨다면, 어쩌면 '차라리 방송을 그만 두고 말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눈에 매력 없이 보이는 사람에 대하여 애정을 느낀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 자기에게 미운 짓만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명령을 내리고 계시며 또한 호세아 선지자는 그 명령대로 따르는, 실로 이상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성경에서 '음란한 여자'의 대명사와 같은 여인인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향하여 "너는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참 기가 막힐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높고 크고 깊은 것인지를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한 번 실감나게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실을 상대방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백 마디 말보다 한번 실습을 시켜 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높은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 즉 당신의 눈에 매력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 앞에서 미운 짓만 골라서 행하고 있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해주신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호세아 너도 한 번 직접 겪어보아라.'는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그런 어려운 실습까지 일부러 시켜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당신의 사랑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꼭 깨달아야 할 사실, 그 사랑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높은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5때 베풀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바로 이 사실을 진심으로 체험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아주 희한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본문 1절에 기록하기를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그 여인"이란 음란한 바로 '고멜,' 즉 앞서 1장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결혼했던 "음란한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또 다시 방탕하여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떠나버렸습니다.
  여기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가 된 그 여인"이라는 말씀이 가르치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여인을 사랑하라고, 다시 데려 와서 아내를 삼으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관계야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실이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건포도 떡"은 사치스러운 양식에 속한 것이었으며 특별 행사 때 먹는 귀한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가장 좋은 것들을 우상 신 앞에 갖다 바치며 그 앞에서 잔치하고 즐거워하고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저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도 지금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는 네 음란한 아내를 한번 사랑해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그런 고멜을 사랑해주기가 쉬웠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음란했던 여인을 자기 아내로 맞아주는 것만 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고멜은 감사하기는커녕 그런 호세아를 또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가출해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용서해주는 것만 해도 보통 마음 넓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일부러 찾아가서 다시 데려오고 게다가 이전처럼 사랑해준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남편에게도 전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지금 하나님을 떠나 배교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그래도 용서하시고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고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뜨겁게 체험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역시 바로 이 신기한 하나님의 사랑을 꼭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악을 행하고 있었을 때,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아무 조건 없이, 아니 오히려 마땅히 미워해야 할 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의 그 어느 다른 종교에서도, 그 어느 훌륭하다는 성인에게서도 결코 찾을 수 없는, 지극히 특별하고도 유일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기 전에 사람이 알고 있던 사랑이란 다 '조건적인 사랑'뿐이었습니다.
  매력 있는 이성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연애라는 감정이 생기고, 마음 통하는 친구라는 조건이 있어야 우정이라는 사랑이 생기고, 한 핏줄이라는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가족애란 것이 나누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 부합되지 못하면, 그런 대상은 무관심으로 대할 뿐이었으며, 이런 조건에 반대되는 대상은 그만큼 미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무슨 공로나 매력이 있어서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운 짓만 하고 있는 죄인인데도 그냥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정도가 아니라 '악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신 사랑, 사람의 사랑 수준으로서는 결코 도달은커녕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접근해오려 하셨다면, 우리들 가운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만한 자가 하나라도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 역시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신을 사랑하고 그 앞에서 건포도를 먹으며 즐기는 바로 그때에 먼저 우리를 택해주시고 자기 백성이라 불러주시고 당신의 신부로 영접해주시는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라고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부가 된 여인' 같이 죄에 빠져 있던 나를 끝까지 찾아주시고 무조건 베풀어주시는 이 한없이 높은 사랑의 부르심을 듣고 그 주님의 품으로 꼭 다시 돌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죄값을 치러주신 대속의 사랑'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직접 겪어 보도록 하셨는데, 바로 2절 말씀에 "2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고 기록했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고멜을 다시 데려오려고 했을 때, 그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고멜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호세아가 치른 액수를 전체적으로 계산해 보면 대충 '은 삼십 세겔'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여종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로 갔지만, 그의 정식 아내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창녀나 여종의 신분으로 붙잡혀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사귈 때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신부로 대접받지만, 마귀와 사귀게 될 때는 그 마귀가 마음대로 학대하고 부리는 종의 신세로 전락되는 것과 꼭 같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그처럼 타인에게 구속되어 있는 고멜을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 선지자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는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삯을 대신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죄 아래 종 되었던 우리는 사망의 저주에 꼼짝없이 묶이는 신세가 되어서 스스로 벗어날 길도 힘도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자리에서 떠날 생각조차 스스로 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고멜 역시 다른 남자와 연애하며 간음하며 지내는 동안 그런 처지에서 스스로 벗어나 호세아에게로 돌아갈 생각 그 자체를 꿈에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공통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완전히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몸값까지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그처럼 남편을 배반하고 떠난 고멜에게 호세아 편에서 먼저 찾아가서,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녀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다시 아내로 맞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음란한 고멜이었지만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무언가 그녀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것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하여서도 그와 꼭 같은 방법을 쓰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우리 죄인 쪽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지극히 비싼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신부로 맞아들이겠다고 찾아와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고, 그 꼿꼿했던 우리의 목이 숙여지면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 가운데서 떠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던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라는 이 대속의 복음, 도무지 다른 교주의 입에서나 다른 경전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 신기한 복음을 듣는 순간, 그 심령이 충동을 받고 그 양심에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감동을 가리켜 히브리서의 말씀은 증거하기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그런 희생 짐승의 피를 대신 뿌림 받고도 정결케 되고 거룩케 되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를 대속제물로 받게 된 성도들이야 그 죄 사함의 확신이 오죽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해주시되 얼마나 사랑해주셨는지를 지극히 뚜렷하고 명백히 증거해주는, 너무나도 위대한 증거입니다.

  사람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보석금을 지불하면 수감되지 않고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감옥 가는 대신에 벌금을 내고 풀려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돈을 누가 내어주겠습니까?
  바로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용의자만 되어도 벌써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죄인으로 낙인찍고 경멸할 뿐이지만, 그 사람의 부모나 배우자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석금이나 벌금을 마련해서 그를 구해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정말 비싼 대가를 대신 치러주신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약간의 동정이나 연민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사시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값으로 대신 치러주신 이 '최대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이것 역시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실습했던 사실이었습니다.
  3절 이하 5절에 기록하기를 "3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그처럼 고멜을 사랑해주고 대가까지 치르고 도로 데려왔지만, 고멜 쪽에서는 그런 호세아에게 곧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멜의 마음에 그런 변화가 진정으로 일어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3절의 말씀에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냥 '너는 오랫동안, 평생토록 나와 해로하자.'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살면서 기다려주겠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 역시 호세아 선지자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그처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는 데도 여전히 못된 음녀의 본성과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답답했겠으며 또 화도 났겠습니까?
  하지만 호세아는 바로 그런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느끼고 계실 심정을 꼭 같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와 꼭 같은 기분이실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에게, 또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을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십자가의 대속 은혜로 불러주셨지만, 사람 쪽에서 그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는 반응은 여전히 지극히 느리기만 합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한 몸에 쏟아 받으면서도, 그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항상 꾸물대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지금 하나님의 처지에 있다면 그것 정말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만큼이나 용서해주고 사랑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회개하는 속도마저 그처럼 더디다면 그것이 정말 참을 수 있을 일이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또 참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속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날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많은 날 동안' 우리를 더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4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이라는 말씀은 3절과 대응하고 있는 구절로서, 장차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기간을 가리킵니다.
  70년이라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왕도 없고 군(지도자, 족장, 장로)도 없는" 상태, 즉 한 국가로서의 힘을 완전히 상실한, 최악의 날을 보내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포로 기간이 또 좋은 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거기서 그들은 "우상 앞에 제사도 드릴 수 없고, 주상이나 에봇이나 드라빔 같은 숭배 대상도 가질 수 없게" 될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있을 때에는 우상숭배도 제 마음대로 했지만, 오히려 포로 된 땅에서는 그럴 여유도, 겨를도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포로 되었던 "많은 날"이 흘러 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었습니까?
  바로 5절에 있는 대로 '저희가 해방을 얻고 돌아와서 하나님 여호와와 다윗 왕조를 구하며 경외하는, 그야말로 이제야 진짜 본격적으로 은총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처럼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의 손길과 죄인을 감격케 하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꾸물거리고 있는 우리를 완전히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날 동안 인내로써 기다리시며 그 많은 날들을 '은혜 받을 기회'로 제공해주고 계십니다.
  그 많은 날들은, 때때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시대와 같은 날들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택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고 실패만 거듭하게 되는 때를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마음대로 죄짓고 우상 따라갈 겨를마저 없어지게 되며, 그런 시련의 날이 오래 지난 후에 그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이 많은 날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계시는 날들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남 따라 억지로 교회 출석만 간신히 하고 있는 날들, 기도는 드리고 있는 데도 아직도 모든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날들, 신자라는 체면 때문에 그래도 술 담배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잘 안 되고 있는 날들, 좀 열심히 신앙생활하겠다고 노력하는 데도 오히려 시험이 닥쳐와서 환난을 겪는 날들 - 우리들에게 이런 날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많은 날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절실히 깨닫고 완전히 그 앞으로 회개하며 돌아올 때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은혜의 때'입니다.

  이렇게 기다려 주시는 날들이 없었더라면 또 우리는 벌써 끝장났을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그 복음에 반응하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속도가 이처럼 느린 우리들에게 만일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시는 많은 날들이 없었더라면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아무에게도 실제로 적용되지 못하고 끝났을 것입니다.
  잠시 타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시되 '인내'까지 하시면서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사랑, 우리처럼 연약한 죄인이 구원 얻기 위해서는 이것 또한 꼭 필요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이 '깊은 사랑'에 속히 응답하고 돌아오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찬송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을 만큼 높고 크고 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몰라서는 안 될 사랑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실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운운하고 끝내지 말고, 정말 그 사랑의 지고한 높이, 더할 수 없는 크기, 끝없는 깊이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너도 한 번 음란한 아내를 사랑해보아라.'고 호세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사랑을 적어도 당신의 자녀들은 꼭 알아주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거부하고 배반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해주신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해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란 것이 그 얼마나 강력하고도 위대하고도 진실한 것인지를 확실히 체험해보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랑을 끝내 모르면 정말 안 됩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무관심해도 아무 상관없겠지만, 우리에게 이처럼 계산이 안 될 무한정의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배은망덕과 신성모독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9절은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은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왜 복음 주는지, 왜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확실히 아네'로 끝나게 되어야만 합니다.
  나 자신이 바로 고멜 같은 여인을 사랑해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그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그런 까닭에 또한 그 얼마나 위대하고도 고마운 것인지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꼭 깨닫고 반응해주기를 원하고 계시는 당신의 사랑,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무조건 베풀어주신 사랑,' '무력한 우리 대신 비싼 값을 치러주신 대속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당신 앞으로 돌아오기를 지금도 여전히 기다려주시는 인내의 사랑' - 이런 하나님 사랑 차원의 높이, 이 사랑 강도의 크기, 이 사랑 진실함의 깊이를 밝히 깨닫고 뜨겁게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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