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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 속의 기쁨 (사도행전 8:1 ~ 8)

by 【고동엽】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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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핍박 속의 기쁨  (사도행전 8:1 ~ 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1-8

   사람은 각각 다양한 조건과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이 다르고 성품과 취미, 교육정도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누구나 가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는 고난을 당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내가 고난을 자초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고난을 거치는 때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그런 것이지요. 남을 위해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 하거나 국민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남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서,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종의 재난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생각하면 욥을 떠올리게 됩니다. 욥은 재산을 모두 잃었고 자식들도, 하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몸에 종기도 생겼습니다. 그 정도면 좋겠는데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합니다. 이런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어디 있겠습니까?

   욥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세 친구가 고난의 바닥에 와 있는 욥을 에게 말 합니다. “당신이 고생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잘못 한 것 없이 그냥 고생하는 법이 어디 있겠어!” 고생은 괜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악을 행한 데 대한 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당신의 고난은 당신의 죄 때문이야.” 고난 자체도 견디기 힘든데 친구라는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아픈 상처에 소금을 발라 막 비비는 겁니다.

   고난을 보는 데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고난을 당할 때 마땅하다면서 비난을 합니다. “네가 이마저마 했으니 고생 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렇듯 고난당한 사람에게 더 마음고생을 시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마 경험 해 보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경건한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고난당한 사람과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합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고 위로 해주고 손을 잡아 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지 각자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사울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 스데반이 유대인들이 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울은 그 옆에 서서 옷을 다 받아 들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로 쳐 죽이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만약 스데반의 가족들이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마땅한 죽음은 한 가지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서는 그 피를 흘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생명은 생명으로 갚는 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어느 남자가 아무 죄 없는 여자 12명을 차례로 죽였습니다.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 대해 국가가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한 생명이 귀중하니 비록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죽이면 안 된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나라에 정의가 살아 있느냐!”면서 화를 내겠지요. 국가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 주는 일은 개인이 할 일입니다. 국가에는 반드시 정의의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원한이 남지 않습니다. 무고하게 죽은 그 12명의 가족들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까. 그런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죽었더라도 이 사람은 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사형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감옥에 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도 있지만 생명을 12명이나 뺏어간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마땅하다! 잘 죽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사람입니까. 초대 교회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앙은 사형의 이유가 안 됩니다. 신앙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마음에 평화와 위로가 있습니다.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미래가 보입니다. 마음속으로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앙 때문에 사람이 죽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믿든지 어떤 종류의 신앙이든지 신앙생활은 자유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믿도록 둬야지 신앙 때문에 핍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신앙을 마음대로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스데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서 믿는 것은 다 믿었습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메시아까지 믿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을 죽인 것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있으나 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종교가 하나의 시스템이요, 종교가 하나의 율법인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종교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사람을 해치거나 죽인다면 진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슬림은 개종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닙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자기 자식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그 자식의 장사를 지내 버립니다.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 임해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남이 고생을 할 때 공감해 주지 않습니다. 냉정합니다. 아픔을 부추깁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으니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핍박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이 됩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하며 용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죽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며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닙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했습니다.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 이것이 신앙입니다. 법은 정의요, 신앙은 자비와 긍휼과 인자와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경건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는 경건한 사람들은 태도가 다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8:2) 남의 고통과 아픔과 시련에 동참하고 같이 아파해 주고 울어 주는 것이 신앙이요 경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 이야기’에서도 경건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한 둘째 아들이 회개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정의파 형은 “저 따위 아들을…” 하며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 동생을 저주했습니다. 정의파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을 품고 용서했습니다. 잔치를 베풀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종교인이요 한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경건한 사람과 경건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속에 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어떤 때는 아버지가 됐다가, 어떤 때는 형이 됐다가, 어떤 때는 동생이 되기도 합니다. 내 한 사람 속에 동생처럼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모습,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경건하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의 훈련을 하게 하셔서 우리들은 언제나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고 그들을 위해 같이 울어주고 손잡아 주는 경건한 모습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닥쳤습니다. 사울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남자, 여자들을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 사람들은 집에 있지 못하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갔다고 했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 그런데 고난 속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집을 잃고 도망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만 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핍박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결과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8:4) 사도만 예루살렘에 남고 나머지 평신도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평신도 목회’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예루살렘에 있고 평신도들은 흩어져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려운 여건과 형편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여건도 복음 전하는 기회로 만듭니다.

   한국 교회의 믿음의 조상들도 일제시대에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갔지만 감옥이 집이나 교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감옥에서도 억울해하지 않고 걱정 없이 평안한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감옥에 와서도 저렇게 편안할 수가 있을까….”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감옥이 복음화 되고 감옥이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경건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 있어도 예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교우가 차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아픔을 잘 견디며 너무도 아름답게 그 상황을 이겨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옆의 환자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수술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이 환경을 잘 감당하는가?” 늘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가 옆에 있던 고등학생 환자를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간증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이 상황 가운데 성령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케 하옵소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다른 도시로 간 사람들은 복음을 전했고 믿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속에 구원의 기쁨이 생긴 것입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 사람들이 가는 동네가 아닙니다.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심지어 개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근처를 지나가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서 반대편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면 천한 사람이 없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귀하게 보입니다. 예수 믿고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은 사람인데, 아직 하나님을 모를 뿐이야.” 천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조차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사회적 편견이 없어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8:5,6)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생깁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한국 교회 초기에 왕실로부터 천민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아주 천한 사람으로 여겼던 백정 가운데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교회로 나오자 양반들은 천한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그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교회 안에 문제가 있으니 당분간 교회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백정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여서 회의하는 가운데 “이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셔서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종도 없고 남녀도 하나인데 어떻게 백정이라고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안된다!”고 결의를 하고 당회에서 그들을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편견이 없어집니다.

   빌립이 예수를 전하고 사람들이 변화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 얻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를 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많은 문제와 단점을 가진 사람들인데 아무도 간음한 여자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 편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기쁨이 있더라.”(8:8)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도 기적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6-8)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주관하시고 기적을 베풀 수 있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 삶 속에 계시고 그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적적인 삶에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자신은 능력이 없습니다. 기적이란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내 능력의 부족함과 내 한계를 깨뜨리고 넘어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 속에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때마다 내 한계를 깨뜨리게 되고 안 될 것도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삶의 한계를 느끼고 계십니까? “내가 이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위기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역사하셔서 기적의 기쁨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기도하는 삶은 기적을 일으키는 삶입니다. 핍박과 어려움이 있고 고난과 슬픔과 한숨이 있을지라도 그 호흡으로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은 살아계셔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 구원의 기쁨이 있었고 핍박 가운데 기적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시대의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구원의 기쁨이 생기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기적의 기쁨들이 곳곳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출처/김상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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