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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과 정치(롬13:1~7)

by 【고동엽】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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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정치(롬13:1~7)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인과 정치에 관한 문제를 우리에게 말씀 해주는 아주 원리적인, 본질적인 말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정치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될까?'하고 늘 많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치가 전적으로 선할 때도 있지만, 독재자나 좋지 않은 정치가들이 나타날 때마다 정치가 부패하고, 타락하고, 악정을 행하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또 자신들은 타락하고 향락하게 되니까요. 이런 일들로 인해서 우리는 언젠가부터 정치가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라고 하면 어딘가 모르게 우리를 '우리를 보호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그러니까 1963년에 미국으로 처음 유학을 갔을 때, 미시간주에 있는 아나버라는 곳에서 몇 달 동안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어떤 때에는 밤 12, 또는 새벽 1시쯤에 나와서 숙소까지 한 20분 걸어오곤 했지요. 밤길이라 해도 무서운 일은 없었지마는, 남의 나라 땅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하지만 숙소로 가자면 걸어가는 수밖에 없어서 할수없이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어쩌다 순경이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그가 저쪽에서 손전등을 비추면서 지나가고 있으면, 굳이 부르지도 않더라도 '형님'하고 싶을 만큼 반가워요. 그 분들이 무엇을 하나 보았더니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문을 잠그었나 안 잠그었나 일일이 흔들어봅니다. 문을 안잠그었으면 그 집에 들어가서 "문 잠그세요"하고는 가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좋은지 몰라요.

그 때에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순경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지난날 내가 이렇듯 고맙게 생각해본 일이 있었던가?'-그렇지 못했어요.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녁의 공산치하에 있을 때에도 그랬어요.

언제든지 '정치가' '정치'하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실 알게모르게 우리가 정치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중산층 이상이 되면 정치에 관해서는 항상 여당 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지금 은행에 저금을 하고 있거나 혹은 땅문서를 가지고 있거든요. 집문서, 땅문서, 은행통장…… 그것, 정치가 한 번 곤두박질치면 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을 보장해주는 거예요.

815광복 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지개혁이다 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땅을 하루아침에 다 몰수했어요. 저희 아버지도 땅문서를 꽤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잘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뒤적뒤적 하셨지요. 어떤 분은 피난 오면서까지 땅문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는 "이걸 어떻게 모아둔 건데……"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짱 헛것입니다. 정치가 흔들리면 이것이 다 흔들립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잠깐 잊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무릇 정치가 안정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가 안정되고야 은행의 돈도 내 것이요, 내 이름으로 된 저 땅도 내 것입니다. 정치가 바뀌면 어떤 문서도 소용없어요. 아무리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도 하루아침에 내 것이 아니될 수도 있는 것이에요. 정치가 이 모든것을 보장해주는 것이에요. 이렇듯 알게모르게 우리는 지금 엄청난 정치의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그저 있는대로 욕을 하려고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구나 요새 중국이라든가 파키스탄, 인도, 혹은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던 나라들을 주욱 살펴보면 그실 정치를 잘못 해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합니다. 달리 그런 것이 아니예요. 한번 정치체제를 잘못 잡아서 공산주의 했다가 몇십 년을 후퇴해 가지고 다시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 어떻게든 잘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것의 고마움을 우리는 알고 지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뭔가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만큼 안 된다고 해서 무조건 욕하지 마세요. 그래도 현 정권, 현 정치의 통치하에서 우리가 이만큼 자유와 평안과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이에요. 또 소유를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정치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1)"라고 정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선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에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땅을 정복하라." 땅을 정복하라-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맡겨진 위임장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cultural mandate가 있어요. 신임장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대단히 고귀한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요, 이상적 존재요, 도덕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존재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에 권세가 있고, 아래에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네가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질서가 있어요. 수직적 질서가 있고 수평적 질서가 있어요. 가정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고, 내가 있고, 내 밑에 아들딸이 있고, 손자 손녀가 있어요. 이게 다 엄연한 질서예요.

그런가하면 형제 자매가 있고, 사촌이 있고, 친구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굉장한 것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이라 그 말이에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정치와 함께 우리에게 주신 바가 있습니다. 바로 '다스리는 기쁨'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이 또한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나름대로 얼마간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요. 가정에서 보면 아버지는 왕이요, 어머니는 여왕이요, 아이들은 백성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가정이라고 하는 질서가 있어요. 이 다스리는 기쁨, 지배하는 기쁨이 되에 가서는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정치적 욕망을, 능력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한 기쁨을 주셨어요. 다스리는 기쁨-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여러분, 택시를 타보았습니까? 택시를 타면 우리가 기사한테 "어디로 갑시다"라고 말합니다. 돈 얼마를 내면서요. 이것도 정치예요. 그것, 신나는 일이지요. 우리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하나, 정치적으로 이런 것만이 있는 게 아니예요. 정치라고 하는 우산, 정치라고 하는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기쁨이 있어요. 내가 다 참관하지 못해도, 내가 다 주관하지 못해도 '저 분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그 속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어요. 이 정치 지배 하에서 안정과 위로와 평안과, 어떤 때에는 자유를 누를 수 있어요. 정치가 보장해주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이요, 기쁨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질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스리라-다스리는 기쁨도 누려라, 지배하는 기쁨과 행복도 너희의 것이요, 지배 받는 행복도 너희 것이다, 지배받는 속에서 자유하라, 이렇게 큰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다스리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그러나 그 다스리는 일은 사람에게 맡기셨어요. 이 말씀은 죽이라, 혹은 소유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다스리라, 즉 돌보라는 말씀이에요. '라다하'라는 이 히브리말의 뜻은 억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복하도록 돌보아주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유하도록, 모두가 평안하도록 질서를 관장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장 밖에 나가면 자동차를 타게 됩니다. 그 거리에 순경이 서 있지요. 오늘같이 미끄러운 날은 순경이 길 한가운데 서서 이리 가십시오, 저리 가십시오, 하면 얼마나 우리한테 의지가 됩니까? 그 분이 하라는 대로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자유할 수 있어요.

간간이 그 분이 하라는 대로 안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파요. 그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분이 지도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우리가 다같이 평안할 수 있는 거예요. 다같이 무사 할 수도 있고 자유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다스림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돌보라 하십니다.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갖지 못한 동물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조금 더 잘 알 수 있어요. 그런고로 모르는 동물을 인도해야지요. 때로는 동물만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제가 탄자니아에 갔을 때에 참 신비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큰 분화구가 있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많은 동물들이 살아요. 마사이족들이 원시적으로 수백 마리의 소를 먹이고 있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일주일에 두 번씩 이 소들이 소금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늘 풀만 먹다가도, 그냥 물만 마시다가도 꼭 일주일에 두 번씩 소금물을 먹으로 가는데, 이 때에는 못 말린답니다. 누가 인도하는지 소들이 떼를 지어 소금물을 먹으러 가요. 더욱이 산 한가운데에 소금물 연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오묘하게 만드셨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동물이 사람보다 똑똑할 때도 많아요. 사람들은 지진이 나는 것을 미처 모르잖아요? 그런데 동물들은 민감해서 땅이 vibration하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울기 시작해요. 다 피해요. 동물 피하는 것보고 사람들도 피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에는 사람이 동물만도 못해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다스리라는 말은 사람이 더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지시도 있고, 경험도 있고, 또 이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동물들을 다스리라 함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본 것입니다마는, 흔히들 시골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겨울에 눈이 아주 많이 오면 할아버지나 할머니, 이런 어른들이 옥수수를 나뭇가지 위에다 매달아놓습니다. 왜요? 눈이 하얗게 쌓이니까 새들이 먹을 게 없잖아요? 사람이야 온 천하가 하얗게 됐으니 구경하기 좋지요. 그러나 동물들은 이 때가 배고픈 때예요. 그런고로 동물들이 먹으라고 옥수수를 여기저기 매달아놓는 것이에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고파서 찾아온 동물들을 때려 잡으려고 하다니, 그것은 나쁜 짓입니다. 잡아봐야 먹을 것 없어요. 비쩍 말랐어요. 뼈만 남아 있어요. 굶었으니까요. 너무도 배가 고프니까 얻어먹겠다고 동물들이 사람 사는 동네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먹여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사람에게 주신 다스림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셨고, 또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어요. 이런 동물 저런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싸울 때에 우리가 교통정리를 해주어야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만물을 다스리라, 지배하라--이 말씀은 행복하라, 질서를 유지하라, 또한 우리가 책임지라 함입니다. 우리는 이 생태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해요.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문화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 이것을 문화적 위임이라고 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왕을 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어요.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에 들어간 다음에 저들에게는 '사사'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왕과 비슷하기는 하지마는 왕은 아니예요. 제사장적인 의미도 있고 선지자적인 의미도 있어요. 그러나 사사의 특별한 의미는 '재판장'입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일어날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예요. 그런고로 왕은 없어요. 모두가 자유롭게, 그저 평안하게 사는 거예요. 각각 자기 영업을 하면서, 자기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누가 쳐들어온다'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누가 다투었다'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렇게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셨고, 아무에게도 중간층 권력구조를 허락치 않으셨어요. 편안하게, 평화스럽게 살았어요. 요샛말로 하면 무정부 상태입니다. 사실은 무정부 상태가 좋은 거예요. 법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예요. 법이 너무 많으면 복잡해요. 그저 자율적으로 지키는 것이 좋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에는 이방사람들이 왕을 모시고 군사들로 하여금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고 점령하고 하는 것이 보기 좋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왕을 달라고 합니다. 사무엘에게 가서 부탁을 해요. '우리도 왕을 모십시다!'-그래,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하셨습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내가 왕인데 또 왕이 필요하냐, 왕은 필요없다, 그런데 왜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왕이 있으면 너희들은 모두 왕의 노예가 될 것이고, 또 왕은 권력으로 인해서 교만해지고 방탕하게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억압적인 일들이 생길 텐데 왜 왕을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끝까지 왕을 달라고 조릅니다. 마침내 사무엘상 8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십니다. 왕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는 이를 마지못해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일단 허락하신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왕을 이용하십니다. 왕을 고용하시고 왕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도 세우시고, 왕도 세우시고, 선지자도 세우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름 붓는다'라고 합니다. 기름 붓는다-어떤 기름을 어떻게 붓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왕으로 지명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친히 임명하셨다, 하는 뜻입니다. 이사야 451절에 보면 고레스 왕도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이방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이 아니에요 페르시아 왕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귀한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고레스 왕은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를 중요한 일에 쓰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간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사울 왕을 이스라엘의 제 1대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십니다. 그 모든 왕, 왕의 질서, 왕의 권력을 통해서 이제 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직접 다스리시던 것을 이제는 왕을 통해서 다스리십니다. 이런 결과가 왔어요. 그런고로 '나라'나 혹은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백성들의 뜻을 이루는 사환입니다. 하나님 밑에서 심부름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입니다. minister, 봉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워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참 왕은 하나님뿐이시오, 그 밑에서 세상의 왕이 심부름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역사하는 사람들이다 함입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2)."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착한 왕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냐?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는 악한 왕도 많아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악한 왕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세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선지서를 주욱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얘기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만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 왕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바벨론 왕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페르시아 왕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애굽 왕도 하나님 자신이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 악한 느부갓네살 같은 왕은 하나님께서 왜 세우셨을까?-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악한 자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악한 왕이 필요해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심판하실 때에 선한 자를 통해서 심판하시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가 피를 묻히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그런고로 악한 자를 처벌하고 악한 자를 진멸하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더 악한 자를 쓰세요.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10:12)"-느부갓네살 왕을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만이 아니라 온 인류 역사를 모면 선한 정치가보다는 나쁜 정치가가 더 많아요. 악한 왕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그냥 내버려두셨느냐?-하나님께서 쓰셨어요. 하나님이 백성의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악한 자를 다스리시기 위해서 더 악한 자를 쓰셨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고용하셨다-이 원리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원리적이요, 원칙적인 것입니다. 정치는 마땅히 이래야 하고, 백성과 정치의 관계는 이래야 한다-이렇게 원리적인, 아주 principle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는 아직 로마제국이 교회를 핍박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울을 핍박했고 바울은 로마정치의 보호를 받았어요. 로마정치가 그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었을 거예요. 로마정치가 오히려 사도 바울을 보호해주었어요. 전도의 길을 지켜주었어요. 바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이스라엘 백성, 유대사람들이었어요.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대로, 바울한테는 이 정치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면에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성경에서 그는 원리적으로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에, 혹은 베드로서에 보면 정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에 네 군데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1절 이하에서는 왕을 위하여 기도하라, 위에 있는 권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가 고요함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디도서 31절 이하에서는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13절로 17절은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이렇게 네 곳에서 정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첫째로,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굴복하라-헬라어로 '슈퍼타스 쎄스데스 쎄스데오'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들든 안들든 위에서 명령하는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 정하신 바라-헬라어로 '테탁메나이'라고 하는 이 말은 기름 부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까 하나님께 향한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런고로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정하셨으므로 저를 거스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심판을 자처하게 되리라 함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고,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에 있고, 하나님의 허락이 거기에 있고, 하나님께서 고용하셔서 쓰시는 사람이 라는 말입니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 권력자를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저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다-성경은 아주 깊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왕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요, 저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본문이 자세히 주는 말씀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선한 일을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지 않느냐, 선을 행하고 두려워하지 말라-이것은 사실입니다. 선을 위하여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행하고 바르게 살면 무서워할 게 없잖아요? 여러분이 교통법규를 잘 지켜서 운전을 하고 있다면 교통순경을 무서워할 까닭이 없어요. 살살 못된 짓을 하니까 순경이 무섭지, 바르게 하면 무서울 게 없다는 말이에요. 이와 같이 내가 해야 할 국가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의무로부터 자유하고, 나아가서는 권력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 악을 막기 위하여 정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정치라는 것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이 많습니다. 악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또 누가 잘못했을 때에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노량진에서 우회 램프를 타고 돌아 내려와서 이쪽 강남으로 와야겠는데, 차들이 꽉 차 있는 바람에 도저히 빠져 나올 길이 없어서 일차선에 있다가 우회전을 했어요.

그러니까 순경이 저만치에서 부릅니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안 되는데 왜 하셨습니까?" 그래, 제가 잘못했으니까 딱지 떼라고 면허증을 줬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다른 차들도 전부 그렇게 가는 것이에요. 상황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여보시오, 저것 좀 보시오. 저 사람들도 전부 다 그렇게 하지 않소?" 그랬더니 순경이 저한테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합니다. "저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짓는다고 다 감옥에 갑니까? 마찬가지로 잘못했다고 해서 다 딱지 떼는 게 아닙니다. 대표로 몇 사람만 떼는 것이지요. 저도 여기 서서 고민이 많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은 딱지 떼면 안되겠고, 가만히 봐서 딱지 떼도 괜찮을 사람만 골라서 땝니다." 그래, 그와 악수를 하면서 "잘하십니다. 나 같은 사람한테 딱지 떼고, 하루벌이 하는 사람은 떼지 마세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이 그래요. 만일에 죄 짓는다고 다 감옥에 간다면 감옥이 세상보다 더 클 거예요. 그래서 감옥에 가는 사람마다 억울하다, 나는 희생양이다-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할말이 아니예요. 바로 감옥에 안 간 우리가 할말이지요. '우리가 다 죄인인데 당신이 가서 안됐소'하고 말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감옥에 가면서 그 소리 할 입장은 아니예요. 마땅히 갈 데를 간 것이지요. 희생양은 무슨 희생양입니까? 말할 사람이 있고, 들을 사람이 있어요.

갈 사람 간 거예요. 그런데 마치 내가 대표해서 가는 것처럼, 누구를 대신해서 가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에요. 자기가 갈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라고해서 다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예요. 일벌백계-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경고해서 그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정치는 하나님의 왼손이요, 교회는 하나님의 오른손이다'-사랑과 은혜를 대표하는 것은 오른손이요, 율법, 정치, 형벌, 이런 것은 왼손이다, 이 둘이 바른 균형을 잡고 서로 긴장관계에 있으면서 우리가 교육을 받는 것이다,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어요.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5)"--벌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굴복할 것이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순종하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 피할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니예요. 도망가지 못해서 내가 법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내 양심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에요.

이것을 지킴으로써 내가 자유할 수 있으니까요. 내 양심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고 권력에 복종하는 그러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세금의 의무까지 다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정치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다,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다, 또 공의의 기구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치가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겠고, 또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믿고 순종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정치에 대한 바른 이해요, 정치가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정치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바른 정치는 어떤 것이냐-성경은 이것을 말씀해줍니다. 동시에 정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해줍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앙적으로 순종할 것이요, 양심을 위해서 복종할 것입니다. 정치를 통해서 억압을, 고통을 느낄 것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하나님의 보호를 느끼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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