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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 새끼를 모으는 암탉 /마태복음 23 : 29 - 39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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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를 모으는 암탉

마태복음 23 : 29 - 3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십자가 사건을 불과 사흘 앞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끝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하시게 됩니다. 따라서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지막 하신 말씀의 내용이 매우 비참한 것으로 되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거듭 거듭 "화 있을찐저"라는 저주스러운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위선과 거짓과 외식으로 살아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을 하셨는가하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심으로 아주 심판해 버리는 이야기로 끝을 내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좀더 깊이 상고해 보면 여기에는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있으며, 결론은 사랑의 계시로 끝내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책망도 하시고 경고도 하시며 어 때에는 저주스러운 심판적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뜨거운 사랑 긍휼과 자비가 있음을 밝히시면서 말씀의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미 앞장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회칠한 무덤이여!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위선자여!"라고 무섭게 책망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저들을 일컬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며 참으로 저주스러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뱀이나 독사의 새끼라는 말에 담겨진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세례 요한이 그 사역을 시작할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3:7)이라고 외치면 저 복음을 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동안의 전도사업을 마무리하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말씀으로 그 끝을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독사라고 하는 말의 뜻을 묻는다면 물론 독이 있고 한번 물리면 죽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일단은 먼저 뱀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뱀이라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아 하나 같이 물고 모두가 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뱀 중에 독이 있는 것이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미국에 있는 수백 종류의 뱀 가운데 독이 있는 것이라고는 네 가지 종류의 뱀 밖에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물면 정말 죽을 수 있는 뱀은 몇 가지가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몇 가지 때문에 뱀만 보면 무섭고 기분이 나쁜데 그것은 우리의 선입관에서 오는 것입니다. 뱀에 대한 선입관이 전혀 나쁘지 않은 순수한 관점에서 뱀을 보게 되면 뱀은 참으로 아름다운동물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뱀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뱀의 가죽으로 된 것은 좋아하는 이유를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처럼 뱀은 피부가 곱고 그 색깔이 아름답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나쁜 선입관을 가지고 봄으로 언제 보아도 무섭고 징그럽고 싫은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3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뱀을 설명하고 있는 "간교하다"는 말은 원문의 뜻으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한 말로서 그 하나는 아름답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간사하다는 듯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뜻을 따라 해석을 한다면 사실에 있어 뱀의 색깔이 아름답듯이 이는 아름답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면서도 그 속에는 독이 있는 그것이 바로 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저들에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겉으로 대단히 진실하고 거룩한 척 아름답게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뱀과 독사라고 하는 이 비유로서 선지자들을 죽인 자가 바로 너희들이다라는 무서운 심판과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말에도 독이 있고 행동에도 독이 있으며 심지어는 웃는 얼굴과 칭찬 속에도 독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 행위인 거룩한 의식 속에도 독소가 있고 특별히 종교적 교훈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 속에 독소가 있어서 이것을 먹으면 영혼이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뱀이요. 독사의 새끼라는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화 있을찐저"라는 결정적인 심판을 내리심으로 마지막 말씀을 끝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마지막 자리에는 긍휼과 자비가 있고, 아가페적인 깊은 사랑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배반하는 그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친히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암탉이 그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하여 날개 아래 모으는 것과 같이 내가 너희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이면 어린 시절에 많이 보았던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장면을 연상해 보고는 합니다. 그때에 보면 한 마리의 어미 닭이 열 댓 마리씩이나 되는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독수리나 매 같은 것이 한번 나타나게 되면 이 암탉이 곤두선 모습으로 병아리들을 모으느라 꼬! ! ! 소리를 연발하게 되면 병아리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게 되는데 그 장면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책에서 읽은 것으로 625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불타버린 집에서 새까맣게 타서 죽은 한 마리 닭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모습 그대로 굳어 있기에 "이 닭은 죽어서도 앉아 있구만"하면서 ""하고 발길질을 해 보았더니 그 속에서 병아리 몇 마리가 나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끼를 보호하면서 자신은 그대로 타 죽은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를 극진히 사랑하는 동물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집안에서 키우는 개를 비롯하여 볼품없는 고슴도치도 그러하며 세상에 제일 미련하다고 하는 곰도 자기 새끼는 제일 사랑한다고 까지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자기 새끼를 극진히 사랑한다고 하는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비유란 평범하고도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서 일상 생활에서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이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경험하고 보아온 생활 속의 한 장면을 들어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비유인 동시에 계시적인 말씀이 됩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쉬이 볼 수 있는 동물들의 세계에서 누구나 한 번씩 감격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을 소재로 하여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19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날개로 덮어 인도해 내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좀 희귀한 일이기에 한참 동안 설명을 해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독수리의 세계에서는 높은 벼랑의 둥지에다 알을 까놓은 후 새끼들이 날 때 쯤 되면은 어미 독수리가 이 새끼들을 둥지로부터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새끼 독수리들은 별 수 없이 푸드덕거리면 저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때에 어미 독수리는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새끼 독수리가 땅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순간 날개로 받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훈련을 반복시킴으로 마침내 오랫동안 잘 날 수 있는 독수리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내가 이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보호하지 않았느냐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할 때 오늘 본문에서 암탉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은 이러한 것으로, 먼저는 무방비적인 연약한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아리를 두고 생각할 때 이것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의 것입니다. 병아리는 집안에서 키우기에 그만한 것이지 이것을 밖에서나 들에서 키운다면 아예 짐승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날짐승들이 알을 많이 낳고 새끼도 많이 까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몇 마리 되지가 않습니다. 웬만한 것은 모두 독수리나 매와 같은 육식 조류의 밥이 되어 다 잡혀 먹히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병아리는 무방비 상태의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리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매우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이란 말입니다. 무방비적인 이스라엘! 이것은 어미가 보호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시골에서 닭을 키우고 병아리를 키우면서 보면 독수리가 물어가고 매가 물어 가는가 하면 이웃집 개가 물기도하고 여우는 물론 심지어 쥐까지도 와서 뜯어먹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노라니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는 몇 마리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약한 이스라엘! 어느 순간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 남을 수 없는 존재! 그런데 문제는 이 병아리가 자기가 그렇게 약하다고 하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결코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자유 분망 하며 방종합니다. 그러다가 감당 못할 짐승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야 당황하여 어미닭의 날개 밑으로 달려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오다가 걸음이 모자라게 되면 그대로 잡혀 먹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비록 병아리가 아닌 어미 닭이라 하더라도 닭이란 매우 약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닭과 독수리를 비교한다면 큰 닭 작은 닭, 암탉, 수탉 할 것 없이 독수리와는 상대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간혹 암탉이 독수리와 더불어 싸우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무섭게 싸우는 것을 봅니다. 몸에 털이 다뽑히고 심지어 목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는 데에도 끝까지 병아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독수리에 대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닭이 독수리에게 대어 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어 들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자기의 병아리를 지키는 것이 어미 닭의 모습이요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연약한 자를 계속 보호하시는 하나님! 더욱이 연약한 것 차 모르고 계속 방종하는 그 이스라엘을 계속희생을 지불해 가면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과 그 사랑을 오늘 여기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다음 또 한가지는 인내하시는 사랑입니다. 내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하시는 이"몇 번이냐?"는 곧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내가 동반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 지말아야 합니다. 이 인내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원치아니하였도다"하신 것과 같이 저들이 사랑을 원하지 않더라도 계속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도 창조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만한 대상을 찾아 헤매는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조금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우리네 사람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마음도 변덕스러우시다면 모든 일은 끝났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 때에 그런 것을 느끼느냐하면 어머니 등에 업혀 가는 아이가 마구 떼를 쓰며우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요즈음은 아이 업는 띠를 이상하게 만들어 아이들이 어깨도 제대로 못쓰게 된 것 같습니다만 옛날에는 그저 대충 대충 업었던 것인데 이렇게 하고 업고 가노라면 이 녀석이 울며불며 발버둥을 치면서 어머니 등을 때리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까지 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어머니 입장에서 좋다 그러면 내려놓자"하고서 던져버리면 끝나는 일이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네가 날 몰라주면 내동댕이치고 말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 어머니가 아이들이 울며 등을 때린다고 하여 그대로 내동댕이치는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도 암탉이 병아리를 대하듯이 그가 원치 않더라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사랑이요 인내하는 사랑이며 창조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열심을 냄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오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일은 이미 다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면서도 사랑하시고 미움과 원망을 들으면서도 사랑하시는 그 아름다운 창조적인 사랑을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뜻을 알든 모르든 또한 사랑의 필요성을 알든 모르든, 받는바 사랑에 감사를 하든 않든 간에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바로 여기에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에는 시간적인 인내가 있고 질적으로의 인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보적 사랑은 자기 희생을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의 의 곧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며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이토록 아픔이 동반되고 희생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 여기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이러한 사랑을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하는데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원치 않는 못된 병아리! 그토록 애끓는 마음으로 계속 저들을 끌어 모으려 애를 쓰지만 이리 저리 도망을 다니다가는 끝내는 물리거나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안타까운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의 거절은 곧 심판과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는 왜냐하면 사랑의 거절이란 다름 아닌 불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있어서도 이쪽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나오면 저쪽에서도 "정말 고맙습니다"할 수 있어야 소위 말하는 연애가 될 수 있는 것이지 그와는 반대로 이쪽에서는 진지하게 "사랑합니다"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는 "웃기고 있네"하고 나온다면 이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이란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대체로 보면 의심 많은 사람이 목적 없이 노처녀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인데 이것은 딸들을 가르치는 어머니들게도 책임과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머니로서 딸들에게 대단히 잘못 가르치는 것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남자는 다 도둑놈이다" 혹은 "남자는 다 늑대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당한 것만 생각하면서 이렇게 가르쳐 놓았으니 보는 남자마다 다 늑대인데 어떻게 늑대하고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혼이잘 안될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하고서도 늑대 콤플렉스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보면 때로는 한쪽에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언짢은 소리가 오고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랑에 대한 의심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남편이건, 아내건, 또는 자식이건 간에 사랑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달리 못 받아들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의심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만사가 문제입니다. 그래서는 칭찬도 문제요, 친절한 말을 하더라도 이말 뒤에는 또 무슨 놀음이 숨어있나 하고 오히려 불순한 관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무슨 말, 무슨 일을 해도 좋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사랑에는 의심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믿어준다면 다른 문제는 물론 풀리지 않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의심하고 불신하기로 시작하면 그 이후의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풀어나갈 재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시고, 아들을 보내시며, 심지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실 수 있는 전부를 다 했지만 끝까지 안믿는데야 도리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나 믿는 사람이 볼 때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는 불경스러운 표현 그대로 말해 "누가 죽으라고 했었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남녀 사이에 사실을 고백하는 표현으로 "당신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이는 그렇게 말을 하게 되면 상대편에서 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에서는 그런 말을 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면 저편에서는 "마음대로 해"하고 나오는 터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말이든지 사랑으로 받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의 거절이란 사랑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하는 일을 오해하며, 사랑을 간섭으로 잔소리로 생각합니다. 그 예가 바로 부모의 관심에 대한 자녀들의 오해와 무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본문 말씀은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하심으로 정면적인 사랑의 거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은 성실과 정절입니다. 진정 사랑을 한 것이라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사랑에 대하여 직선적으로 응답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응답은 곧 정조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저의 사랑을 알고, 또한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또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이것이 사랑이겠습니까? 이를 위해 호세아서를 보면 참으로 기막힌 장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32절 말씀에 보면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이 나오게된 배경을 보면 선지자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고멜이라고 하는 한 창녀를 아내로 맞아 사랑을 하게 되어 아들 딸 각각 하나씩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집을 나가서는 다시 창녀가 되고 맙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호세아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하십니다. 이에 호세아가 돈으로 값을 치른 후 데려와 하는 말이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발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는 말아다오! 나도 너만 사랑할 터이니 너도 나만 사랑해다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응답은 정절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며, 죄와 짝하는 처지라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아닌 거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끝까지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사랑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는 마지막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마지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적 계시자요 최후의 통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통첩까지 거절하고 나면 이제 다시는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이 마지막 선언이 있은지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완전히 망하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번 더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굳이 멸망에 대한 예고가 필요한 것이며 망하는 데에도 준비가 필요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하신 이 말씀도 알고 보면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만약 저들이 이 마지막 말씀만 듣고라도 회개를 하였더라면 구원의 길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구약성서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면 요나서에 기록된 니느웨 성의 사건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성 니느웨에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 : 3)고 하는 간단한 통지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짤막한 한 마디의 통첩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기르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재에 않아 회개를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언하신 심판의 계획을 취소하시어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통첩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본래 진짜 멸망에는 통첩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도 여기에 주신 말씀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렇다면 언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회가 있고 그 기회가 자그마치 40년이나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종말적인 말씀의 선언이 떨어진 이후 40년이라고 하는 소중한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망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속에도 깊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그 사랑이 우리를 당신의 나래 아래로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마지막에 하신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신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든 이 말씀만은 듣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주님의 날개 아래서만 쉬기를 원합니다하는 간절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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