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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복음 6장 22절~24절)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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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복음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헬라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힐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도 안 보인다는 말이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불꺼진 등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거짓된 철학자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들고 다니는 것, 뿐만 아니라 애당초 자기 자신을 위한 등불을 들어야 하는데 자기는 못 보면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겠다며 등불을 비추는 것, 이것이 바로 거짓철학입니다. 참스승이 아니라 거짓된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등불을 밝히되 그것이 누구를 위한 등불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 자신을 위한 등불이며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먼저 내 눈을 밝힌 연후에 남을 밝히도록 힘써야지 자신은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 보게 하겠다고, 오히려 다른 사람만 잘못 본다고 탓하고 원망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난 시간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말씀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이제 빛과 눈의 관계에 한층더 심오한 뜻이 있음을 함께 생각해야

우리가 사물을 보려면 눈은 일단 떠야 합니다. 눈을 감고 사물을 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눈을 떠도 밖이 어둡다면 못 보게 됩니다. 빛이 있어야만 보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눈을 뜨고 있다해도, 또 그 눈이 밝다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은 이렇게 빛과 눈이 항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객관적 계시''주관적 계시'라고 말합니다. 내 눈으로 보기도 하지만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도 빛이 없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음이요 빛이 밝아도 눈이 어두우면 역시 아무 것도 못 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의 눈은 우리가 지금 뜨고 있는 육신의 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동시에 마음의 눈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의 눈과 영적인 눈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라고 하는 한마디 말속에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말씀하는 줄 압니다.

'본다'라는 문제도 여러 면에서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밝게 보아야지 흐리게 보면 안됩니다.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또한 멀리 보아야 합니다. 밝게는 보는데 멀리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좀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 마는, 목욕탕에서 가만히 보면 목욕을 하면서도 안경을 쓰신 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안경만 벗으면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잘못하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기에 목욕하는 시간에도 안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멀리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예배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는 53미터입니다. 꽤나 긴 거리입니다마는 앞에서부터 뒤에까지 모두 볼 수 있어서 끝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넓게 사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많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앞의 몇 사람밖에 못보고 저 끝에는 누가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충대충 살아오는 사람, 뿌옇게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저에게는 좋은 눈을 주셔서 저쪽에 있는 시계의 초침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초침 없는 시계가 걸려 있지만 그전에는 초침이 있었거든요. 저는 저 2층에 앉으신 분들도 누구인지를 압니다. 가끔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2층에 앉아 있었지요?"하고 물으면 "목사님, 그럼 제가 조는 것도 보셨겠군요" 합니다. 저는 이렇게 예배에 누가 왔는지 대충 볼 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면 그처럼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겨우 5미터, 10미터 앞만 본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멀리 100미터나 200미터 앞은 볼 수 있어야 다가오는 차를 살피면서 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눈대로 살아갑니다. 이미 길들여졌기에 모르고 있는 것이지 사실은 멀리 본다는 것과 멀리 못 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육안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눈, 영적인 눈, 지혜의 눈을 생각해야 합니다.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멀리 내다보면서 처사하는 사람은 실수가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에 다가온 다음에 비로소 당황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롭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밝게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밝게 보고 멀리 보고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바로 보지 못하고 삐딱하게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못보고 항상 뒷모습이나 옆모습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큰 잘못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못보고 보나마나한 것만 보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보아야 하는데 바로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는, 집중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멀리 있는 것을 대충대충 보면서도 초점을 맞출 줄 아는,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린 시각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의 원리-밝게 보고, 멀리 보고, 바로 보고, 집중적으로 보고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고 나면 지식과 지혜가 생깁니다. 더욱 중요하게는 힘도 효력을 냅니다.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보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모든 것의 근본은 바로 보는 것에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22, 23)"-주님께서는 이렇듯 성한 눈과 나쁜 눈을 비교하여 대조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좋은 눈과 좋지 못한 눈을 말씀하심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쁜 눈은 소경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눈은 떴지만 나쁜 눈과 좋은 눈이 있다고 두 가지로 대조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한 눈, 좋은 눈이란 사랑과 애정이 있는 눈, 자비가 있는 눈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것을 볼 때에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과 사랑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긍휼이 있는 눈으로 보는 것과 긍휼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해가 다릅니다. 그래서 좋은 눈이란 언제든지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이요, 쓸만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상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보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랑의 눈에 병이 들면 좋아 보이던 모든 것이 나쁘게 보입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답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없어지면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찌기 이스라엘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성한 눈은 자비와 긍휼과 애정이 있는 눈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이기심에 취한 눈, 탐욕과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 욕심이 가득찬 눈을 나쁜 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이른바 돈독이 오른 눈에는 보이는 것이 돈밖에 없습니다. 음란한 눈, 음욕이 가득찬 사악한 눈은 몹쓸 눈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좋지 못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 만사가 그렇게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옷을 입었다고 합시다. 어떤 친구는 이 옷을 보고 색깔이 어떻다 거니 몸에 맞거니 안 맞거니 디자인이 어떻다거나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먼저 "이 옷 얼마짜리냐?"며 가격부터 묻습니다. 특별히 제일 나쁜 것은 친구끼리 모여서 결혼반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는 보통 20만 원이 넘습니다. 꼭 다이아반지를 껴야 하는 것도 아닌데 크다느니 작다느니 하며 말들이 많습니다. 결혼주례를 하다보면 어떤 반지는 끼나마나한 것도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반지를 끼었는데 친구들끼리 모이면 엉뚱하게도 가격부터 묻습니다. 분명 그것은 실례입니다. 남의 결혼반지가 얼마짜리인지는 알아서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결혼반지의 값어치를 돈으로 가늠할 것입니까?

이름난 재벌의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에 시아버지되는 분이 다이아반지를 해준다고 하자 한사코 거절합니다. "제 남편은 대학원생이라 아직 수입이 없으니 5만 원 정도의 상징적인 반지면 족합니다.

나중에 남편이 돈을 벌어 다이아반지를 해주면 그 때 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아버지, 며느리가 하도 대견스러워 저한테 자랑을 합디다.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해주는 결혼반지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시아버지가 해주는 반지가 아무리 비싼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모름지기 남편이 땀흘려 번 돈으로 해주어야만 구리반지든 다이아반지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반지에 땀과 수고가 깃들었을 때에라야 값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돈만 알고 재물만 밝히는 사람은 도둑질한 것일지라도 비싸기만 하면 오케이입니다. 세상 욕심과 정욕에 취한 눈은 이토록 나쁜 것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28:22)"-재물만 생각하고 욕심만 부리는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재물밖에 모르지만 그렇다고해서 재물이 반드시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프랑스 소설에 도둑질하는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양복 파는 집에서 옷 한벌을 입어보다가 바지를 입고는 그대로 내달려 도망쳤습니다. "도둑이야!"하고 주인이 뒤쫓자 길에 있던 순경도 같이 뒤쫓습니다. "거기 서라!" 순경이 뒤쫓으면서 소리칩니다. 그래도 도둑이 줄행랑을 치니까 이번에는 충을 겨누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하고 소리칩니다. 위로 쏘면 죽을까봐 아래쪽으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쫓아오던 주인은 "위로 쏘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래쪽으로 쏘면 바지에 구멍이 날까봐 걱정해서였습니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기네 바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헬라어적으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성한 눈이란 헬라어로 '하플루스'입니다. 영어로는 single 또는 simple이라는 뜻입니다. 즉 초점이 분명한 눈, 한가지만 집중적으로 보는 눈, 이것이 성한 눈입니다. 단순해야 바로 볼 수 있다 함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보든지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 곳을 보면서 다른 생각에 이끌리면 어느새 초점이 흐려집니다. 바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선입관적이고 몰이해적인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단순하게 보았을 때에 비로소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이야기나 오해한 일들, 과거에 실패했던 것들 모두 버물어서 보기에 똑바로 못 봅니다. 사람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물건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흐려진 눈인 것입니다. 성한 눈은 단순하게 보는 눈, 초점이 한 곳으로 모인 눈입니다.

그렇다면 나쁜 눈은 어떠한 눈이겠습니까? 이것은 헬라어로 '포네로스'이며, 약하다는 뜻입니다. 곧 인색한 눈, 이기심에 취한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볼 때에는 깨끗한 눈으로 단순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어른의 눈과 아이들의 눈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쩌다 우연하게 지나가면서 본 것도 기억합니다마는 어른들은 잊어버립니다. 기억을 못합니다. 너무나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만나도 누구라는 사실보다는 누구를 닮았다느니 관상이 어떻다거니 팔자가 어떻다거니,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옳게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부유와 가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다 평가한 다음에도 제대로 볼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게 볼 줄 압니다. 머리 속에 그대로 사진 찍히듯 각인 됩니다. 그것이 어른과 아이의 차이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아이들처럼 단순한 눈으로 밝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눈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눈과 몸을 인생 자체로 보는 견해입니다. 즉 눈이 성하다는 말은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다, 생의 목표가 분명하고 밝은 사람은 온 생이 밝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의 목적이 분명치 못한 사람은 생활이 온통 흐리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내가 왜 사는 건지, 생의 목적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생활 전체가 단정합니다. 생이 전부 밝아집니다. 그러나 왜 사는지 모르는, 생의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정리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한마디로 갈짓자걸음을 걷습니다. 그날그날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생이 엉망이요 전부가 흐려진 것입니다. 심지어 결혼생활도 그렇습니다. 가끔 복잡한 가정을 보면 결혼의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왜 결혼했는지, 좀더 나아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결혼은 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결혼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적이 흐려진 삶, 곧 인생관이 뚜렷하지 못한 사람의 생활은 온통 엉망입니다. 옷입는 것, 자는 것, 집이든 뭐든 전부가 어지러워지고 맙니다. 가치관마저도 흔들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눈이 선한 사람, 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생활 전부가 밝을 것이로되 생의 목적이 분명치 못한 사람은 그 생의 전부가 흐려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사람들의 눈에 대한 네 번째 해석은 신령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한 눈은 곧 신령한 것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깊은 세계를 봅니다. 신령한 것을 보기에 그는 지혜를 얻습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면서 사는 사람일수록 보이는 세계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는 그 사랑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질의 세계도 바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물질만 보고 사랑은 못 봅니다. 정성이나 진실도 보지를 못합니다. 의도 보지 못하며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못 봅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물질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사회주의가 바로 그렇습니다. materialism, 유물사관입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봅니다. 사람 역시 '고등동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는 사랑을 설명하려니 도대체 설명이 되겠습니까?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유명한 진화론자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종족보존 본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려운 용어 같지만 그실 그다지 중요한 말이 아닙니다. 종족보존 본능이란 동물들끼리 제 새끼를 낳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동물로 물질로 보고 보면 전혀 신령한 세계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를 먼저 본다면 비로소 물질의 세계도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눈이 성해야 온몸을 밝게 볼 수가 있다 라고 하신 본문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 신령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나서 세상을 볼 때에야 비로소 밝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로 인해서 눈이 흐려지고 나면 하나님과 물질의 두 세계를 모두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 통찰력, 곧 멀리 보는 눈입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눈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그의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바울은 항상 요단강 건너 주님 앞에 갔을 때,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에 마음의 눈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하는 시험, 오늘 당하는 고생, 오늘 당하는 비난, 오늘 당하는 갖가지 시련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스데반 역시 그리스도께 그의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돌에 맞아서 죽는, 순교하는 순간입니다. 그 시각, 그는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스데반은 시선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못박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순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아집니다. 비록 돌에 맞아서 온몸에 피가 흐르고는 있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스데반을 증오하며 이를 가는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를 향하여 '배신자'라고 소리지르면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리함으로 그는 그 몹쓸 고난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종말론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저 위에 있는 천국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보았어야 합니다.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만을 보았어야 합니다. 가나안에 초점을 맞추고 현재를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당장에 당하는 시련에만 시선을 두었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이러한 현실적 욕망으로 눈이 모두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가나안땅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내게 행하신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깊이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나쁜 눈은 어떤 눈입니까? 지극히 근시안적인 눈으로 순간 순간만을 봅니다. 현재와 찰나만을 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시행착오가 생깁니다. 저는 간간이 임종이 가까운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든 살이 넘도록 사시고 입원하여 임종을 기다리는 분들은 그래도 오래 사셨으니 특별히 가슴이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혹 마흔 살이 갓넘은 젊은 사람이 사고나 병으로 죽음을 앞에한 것을 보면 퍽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 사연으로 임종을 앞둔 분들이 하는 말 가운데 한결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있을 줄을 알았더라면 지난날 살아온 것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이런 임종의 순간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과거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이 말이 저를 그렇게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후회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후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멀리 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임종을 맞는 순간이 없을 줄로 알았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반드시 이 순간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보아야 하고, 종말론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종말론적인 눈이 없으면 온몸이 흐려지고, 온 생활이 엉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22)"-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축복이란 소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성한 것이 축복입니다. 많이 가진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밝히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많이 소유하는 것, 높은 지위, 권력, 지식, 욕심만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밝히 보는 눈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밝은 눈을 가졌으면 적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한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만은 엄청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많이 가져서 부자될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22)"-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밝은 눈이요 신령한 눈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소경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 육신의 눈은 떴으나 신령한 눈은 감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을 뜨고 있기에 신령의 눈도 뜬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여기서 '본다'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눈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는 신령한 눈이 중요함을, 신령한 눈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내게 있는 신령한 눈을 열어주시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내게 밝은 눈을 주시면 밝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 성한 눈을 주소서. 밝은 눈을 주소서. 그리하여 밝히 보게 하여주시고, 온몸이, 온 생활이 밝게 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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