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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율법(마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본문에서부터 시작하여 5장 끝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우선 총론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구월심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곳은 베들레헴이다"하는 예언의 말씀에 따라 처녀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가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만큼 그들은 메시아가 그 땅에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당신이 메시아이니까?"하고 거듭해서 질문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했고, 이어서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하시자 지금까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는 다른 그의 말씀의 위력에 백성들은 놀랐고, 따라서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온 땅에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따르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권세를 누렸던 자기들의 종교적인 권위가 완전히 하락되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는 했습니다만 언제나 그 교훈 중에 자기들을 포함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해석하면서 될 수 있는 한 어렵게 복잡하게 만들어, 그 법을 지키는 자신들은 위대하고 지키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멸시 감을 주도록 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말하게 됩니다. 가령 자기가 가난하면, 가난해야 예수를 잘 믿는 것이고 물질이 가난한 자만이 마음도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부하면 뒤집어서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밤낮 가난하기만 하느냐고 비웃으며 예수를 잘 믿으면 이 정도는 부하게 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를 내세웠는데, 특히 윤리적인 범주를 내 놓을 때 자기를 기준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종교 행사가 그들의 본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들의 입장에 중심을 두고 율법을 강론했으니 일반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까다롭고 복잡한 규율 등을 보통사람들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천국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까지 만들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책이 많은 것이 아니어서 일반적으로는 율법을 알 길이 없고, 오직 율법교사들이 가르쳐 주는 것에만 의존했으니, 그들 방식대로라면 구원은커녕 그 법의 십분의 일도 행하지 못한 채 율법에 얽매여 고통만 당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종교적인 율법을 해석하고 있는 대행인들의 지배하에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율법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구원까지도 외면하고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교훈은 아주 쉬웠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무거운 짐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시면서 율법을 재해석하시는데, 말씀마다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면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으면 넓은 길로 가려는 경향이 있고, 어려운 일과 쉬운 일이 있으면 쉬운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과 지름길이 있다면, 이왕이면 지름길로 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심리로 이 당시의 대중들도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어려운 길을 피하여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마침내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교훈, 자유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쌓였던 율법의 짐을 예수께 나오면 다 벗겨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인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날로 늘어나는 예수님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예수는 자유주의자다, 또는 율법을 파괴하는 자다"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주된 죄목도 율법을 파괴한 죄목입니다. 그들은 정죄하기를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참람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파괴했다는 죄목은 예수님을 모략 중상해서 올라가는 인기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낸 억지 죄목임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율법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율법을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율법을 위배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러 온 자"라고 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율법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셨습니까? 본문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라는 말씀은 조금 해석이 필요합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된 성경은, 제목이 성경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의 이름이 율법과 선지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모세 5경은 율법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선지서라 하기 때문에 이것을 합해서 율법과 선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원래의 뜻으로 고치면 "내가 구약성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완성하러 왔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사람들은 예수님과 충돌해서 율법을 파괴하러 온 자라고 오해를 했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유대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율법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성경말씀 그대로의 율법이고 또 하나는 그 율법을 해석하는 미쉬나인데, 미쉬나는 구약보다 훨씬 더 큰 책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넓히면 탈무드도 포함이 됩니다. 아무튼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생활윤리 전부를 기록해 놓은 전통적 전승까지도 율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만 그 율법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도 율법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원뜻 (original meaning)만 율법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나는 대로 율법의 첫째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근본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복잡한 교훈에서 정말 깊은 본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에게는 본래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할 때에 안식을 왜 지키라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었단 말입니다.
단지 지키라고 율법에 있으니, 지켜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전승입니다. 전승이란 타부로서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교훈이 있으면 왜 먹지 말라는지 설명이 따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아직도 어떤 날은 이사해서 안 된다는 그런 류의 전승이 있습니다. 왜 안 되느냐고 물으면 좌우간 좋지 않다니까 안 가는 것이라고 합리적인 이론 없이 밀고 나갑니다. 이것이 타부요, 전통입니다. 이처럼 유대사람들도 본래는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었던 법이, 이제 와서는 본래의 의도는 아랑곳없이 그 규범만 잔뜩 남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자 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지 그 근본을 생각하고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안식일에는 이런저런 일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이 전승에 대한 율법을 위배한 자가 되고, 율법의 근본정신의 입장에서는 율법을 완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어떤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쉬운 길(easy way, easy going)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가령, 믿음으로 구원하는 길이 있고 행함으로 구원하는 일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이것은 둘 다 신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한번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더 쉽다고 느껴집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행함으로 구원 얻기보다는 믿음으로 구원 얻기가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이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행함의 관계는 따지고 보면 믿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네 가지 악이 있었고 여섯 가지 선이 있었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믿음이란 전적으로 믿음이라야만 합니다.
믿음에 대한 마틴 루터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루터가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그의 개가 무릎 위에 앉아서 밥 먹는 손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루터의 손이 식탁으로 가면 식탁을 보고, 입으로 가면 입을 보는 그 개의 열심에 감동이 되어 루터는 고기조각을 개에게 주다가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면"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개는 고기조각을 든 그의 손을 보는 동안에는 일체의 다른 생각이 없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이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들의 율법의 멍에가 무거우냐, 그래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이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말씀 속에는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 문화를 파괴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키는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고, 좀더 온전한 율법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옛날에 중국 본토에 가서 전도할 때에는 메세지 속에 반드시 효에 대한 내용을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효에 대한 사상이 어느 민족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교훈 가운데서 가장 지주가 되는 것도 효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효자가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 세상에서 백 번 잘해 드리는 것보다는 부모를 천당에 가게 하는 것이 더 큰 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전통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충․효․진실등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게 하러 주님은 오셨습니다. 우리의 진실도 완성하고, 우리의 인격도 완성하고, 우리의 덕도 완성할 것입니다.
다음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율법을 생각하려 합니다. 원래 율법은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와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의식법(ceremonial law)입니다. 구약의 레위기서 등에 보면 제사법이 대단히 복잡한데, 피를 바르는 것, 불사르는 것, 또한 붓는 것, 또 어떤 것은 절반은 불사르고 절반은 같이 먹는 것 등으로 유대사람들에게 주어진 제사법의 형식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그 형식은 지켜지지 않습니다만 그 의미는 살아 있습니다. 여기에 절대적인 의미는 "거룩케 함"으로, 오직 피만이 거룩케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민법과 형법(judical law)입니다. 도적질한 자는 그 물건을 뺏고 네 배로 갚아야 하며, 어느집 소가 사람을 받으면 그 소를 죽이고 주인은 어떻게 벌주고, 살인하면 어떻게 하고 등등 형법이 대단히 복잡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강간을 당했을 경우 동리에서 당했으면 남여를 다 벌하고 그 밖에서 당했으면 남자만 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리 안에서 당한 것은 여자가 소리를 질러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절반은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이며, 오늘날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일리가 있는 그런 측면에서 법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성경에서 로마법이 나왔고 로마법에서 독일법이 나왔고 독일법에서 일본법, 일본법에서 한국법이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함무라비 법전이나 구약성경이 모든 민법의 기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덕적인 법(maral law)입니다. 이것을 흔히 율법이라고 하는데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등의 교훈을 담은 윤리적인 내용입니다.
이상으로 율법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이 모든 법을 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법으로부터 풀려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는 오히려 더 완전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극히 부분적이기는 합니다만 일명 구원파라는 이단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빚진 것도 갚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사해 주시고 자유하므로 일반적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억지 해석을 합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완전케 하러 오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더 완전하게 더 철저하게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좁은 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민법에서는 도적질하는 것이 물론 죄입니다만 구제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제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남을 해하는 것은 당연히 죄입니다만 사랑하지 않은 것까지는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민법이나 형법에 걸려서 아직도 바동거린다면 이것은 한창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법들에서는 훨씬 넘어서서 좀더 좁고 좀더 높은 법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완성케 하러 왔노라" 대단히 귀한 교훈입니다. 로마서 10: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율법을 어떻게 완성하셨겠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서 그 가르침을 받은 자로 하여금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으셨고, 제사를 드렸으며, 안식일을 지키시는 등 율법을 친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든 법을 지키시며 완성하신 것입니다. 세째는 우리를 통하여 완성하십니다.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교회를 통하여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음, 본문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 18)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실로'라는 말은 히브리말로써 '아멘'인데, '참으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강조하시면서 완전케(fulfill)하러 왔노라. 즉 충족했다, 채웠다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율법이나 선지자는 미완성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예표적인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미완성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말씀드린 율법과 예수께서 완성하신 법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되겠습니다. 첫째 의식법(ceremonial law)인 속죄제, 속전제, 번제등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는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본체가 없는 그림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만일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많은 제사법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으므로, 즉 피흘림이 있음으로써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사건으로 완성되었기에 그 이후로든 다시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형법(judical law)입니다. 이 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값는 것이므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보상도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만인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대가를 치루어서 보상하셨기에 이 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막스주의에 보면 만유균형의 원리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 놀고먹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 쪽에서는 반드시 일하면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하고 먹는 사회를 만들려면 일하지 않으면서 먹는 사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공산당의 이론입니다. 즉 만유균형의 원리인데, 이것이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원리를 그대로 구원론에 옮겨 봅니다. 잘 아는 대로 의인은 구원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 한 사람이 벌을 받았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의인이 벌을 받았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의인이 구원받고 죄인이 멸망한다는 것은 당연한 원리인데, 의인이 멸망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완성하신 의인인 예수께서 죽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무참히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의 교리입니다.
셋째, 윤리적인 법(moral law)으로써, 이 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실천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썩어지고 변질화 된 우리 심령들이 소생하여 비로소 미약하지만 그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율법을 완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페의 사랑에 감명된 사람들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제 그 사람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해석자가 되시어 도덕적인 법을 이루셨습니다.
즉, 복잡한 것들은 다 제거하시고 알맹이만 취하셔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근본이다"라고 재해석하시어 그 본의를 가르치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유대사람들의 문화적인 복잡한 계율에 의해서가 아닌 근본적인 것을 가르치시어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의미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점 일획(jot or on title)이란 히브리 말로 요드(')라고 하는데 아주 작은 점같이 생긴 글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작은 점 하나라도 즉 어떠한 글자 하나라도 없어지지 않겠다는 말이며, 또한 어떠한 제목 하나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겠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구약에서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결코 새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려온 계승으로 낡은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끝장까지, 즉 창세부터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는 꼭 같습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생명으로 구원받는다는(피를 흘림으로 구원받는다)교리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가 변했습니까?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선지의 완성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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