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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 그의 피(요 6:52~59)

by 【고동엽】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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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 그의 피(6:5259)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6:1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그 사건에 관계된 말씀을 중심으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보아왔습니다. 왜 이 사건이 이렇게도 놀랍고 굉장한 사건입니까?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첫째 이 기적은 한두 사람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오천 명을 앞에 놓고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있을 수 있는 영적 체험이나, 환상이나,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었다는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희미하고 불투명한 사건이 아니고 똑똑하고 분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대부분의 기적들은 특정인 한두 사람에게만 경험이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으로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일어섰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사자인 앉은뱅이는 직접 경험해서 일어났지만 옆에서 본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기가 경험한 것처럼 느낄 수는 없습니다. 대개 병이 나았다는 기적은 환자만의 경험으로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제한적인 불리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이와 같은 입장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장님이 기적적으로 눈을 떴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궁금하여 묻고 또 묻습니다. 이 때 눈을 뜬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장님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며,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경험한 본인은 더 이상 설명도 필요 없이 확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엇인가 불분명하여 자꾸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오천 명이 동시에 같이 경험했습니다. 눈으로 보았거나 느낀 것이 아니라 다같이 직접 먹고 경험한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그토록 굉장한 사건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무려 71절이나 되는 긴 내용으로 모두가 이 사건을 위해 기록되어 있고, 이 문제에 대해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표적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사건이 말해주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오직 영에 대해 관심이 많고 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속해 있는 부분이 다르면 몇십 년을 살았어도 타인입니다.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의 구별은, 보는 것과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전혀 다르므로 쉽게 구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무엇을 깨닫는다고 할 때, 이 깨달음도 그가 가진 관심에 기준해서 깨닫게 되며 무엇을 보아도 관심대로 보여집니다. 같은 것을 놓고 보더라도 육에 속한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진리로 보여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남편이 은근히 옆집에 사는 부인을 좋아해서 그 집 음식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 보이고 맛있다고 해서 부인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꾀를 내어 그 부인은 옆집에서 김치를 얻어 밥상에 올려놓고 김치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이걸 김치라고 만들었느냐"고 짜증을 내며 맛이 없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다음 날은 자기 집 김치를 내놓으며 옆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 남편은 맛을 보자마자 "이것이 바로 김치다"라고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입맛까지도 마음가는 대로 맛이 납니다. 하물며 보고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관심, 세계관에 의해 나타남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관심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면 서로 막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 관계가 서로 단절되어 통할 수가 없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앞에서 공부한 니고데모의 이야기도 결국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태어나야겠다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가느냐고 엉뚱한 말을 해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라고 하셨을 때 이 여인은 그 물을 저에게도 좀 주세요,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말입니다,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우리들도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 상황에서는 그들과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6:52). 이들이 왜 이토록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지 현상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한 젊은이가 아주 잘 생겼기에 한 마디 했습니다. "자네는 누워서 먹을 팔자구먼" 이 젊은이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감이 잔뜩 달려 있는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얼굴이나 배 위에 떨어져서 입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리 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하다 못해 삿갓에 구멍을 뚫어 입에 대고는 있어야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말해 주었답니다. 비록 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그 만큼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은 새겨서 들어야 그 뜻을 바로 알게 됩니다. 둘째, 자기 정욕에 끌리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에 붙들려 있으면서 어찌 남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부부 관계를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개념과 방법이 다르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오해가 생기고 부부 싸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사랑할 때 그저 알뜰히 보살피는 모성적인 사랑으로 관심을 주고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붙들고 묻습니다. "오늘 점심하셨어요? 뭘 잡수셨어요? 어디 가서 누구하고, 맛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돈은 누가 냈어요"까지 묻다가 남편의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태도에 섭섭해하고 자기 관심도에 대해 배신을 당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사실 남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일단 가정에 오면, 직장에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고 피곤함을 씻고 싶은데, 아내의 질문으로 인하여 직장 일을 다시 상기해야 하니 서로가 통하질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서 대화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 내 생각만을 말하면 아무리 열심이고 좋은 말이라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내 생각은 잠깐 지우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여 "저 쪽은 어떤가?" 하고 잘 살피는 것이 서로 통하는 지름길입니다. 상대방의 언어, 관심, 상대방의 세계관까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대화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실까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먹고 배부른 일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는 살을 주신다고 하니, 무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것에만 치우쳤기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 둘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하나님 앞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세부터 다릅니다. 너 좋고 나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신앙적인 이해라야 참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대화가 아니면, 자존심을 세우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어떻게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옛날 로마에서도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를 몹시 박해했었습니다. 그 당시 왕들이 서로 주고받은 지령이나 문서 속에 박해한 이유들이 적힌 공문서들은 최근에 발견했는데 그 이유는 정말 어이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핍박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일 때마다 피와 살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여 생기는 오해는 참으로 많습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옛날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초신자가 장로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담장이나 대문이 제대로 있는 집이 아니고 모든 것이 거의 오픈 되어 있는 집이기에 초신자는 장로님 댁의 마당으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여러 장로님과 목사님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한 잔 더하시오, 한 잔 더 하지요" 하는 음성이 약간 열려있는 문 사이로 흘러 나왔습니다. 처음 믿는 이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생각하기를 "옳지, 우리들에게는 술담배를 금하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다 하는구나" 하고 오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차를 마시며 "한 잔"이라고 한 말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 데서 생긴 오해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예수를 모르는 로마 사람들이 문밖에서 "이것은 내 피다, 이것은 내 살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니,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하고 형편없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해가 가져온 무서운 결과입니다.

둘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파괴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말세의 심판은 불로 행해진다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앞으로 잘 살아보도록 하자는 정책에 대해 반대로써 파괴주의적이라고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네로 황제는 자신들이 불을 저질러 놓고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들을 죽게까지 한 것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인들은 비인도주의라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의 철학으로 보면 자유인은 자유인이요, 노예는 노예로서 분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는데 기독교인은 노예를 사랑하므로 있을 수 없는 비인도적인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노예는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취급하였으므로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라는 비난인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곡해요 오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어떻게 자기 살과 피를 주어 먹게 하고 마시게 할 것인가 하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영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과 오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과감하게 같은 내용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3장에 보면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과 같이 아마 오늘 여기서도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 깨닫기를 바라시며, 또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들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하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결국에 가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은 중단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들 때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미사여구나 달콤한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계속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60절에 보면(오늘 본문은 아닙니다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고 제자들도 어렵다고 수군거렸고 많은 군중들도 이해하지 못하여 물러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굽히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의도를 두 가지 관점에서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죽을 때까지 깨닫고 다시 깨닫고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말해주는 최고의 상징적 용어가 살과 피로서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가룟 유다를 아주 미워했다고 합니다. 스승을 팔아 십자가에 못박게 한 나쁜 놈이라고 있는 대로 욕을 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꿈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장면을 환히 보았습니다. 피가 가시 면류관에서 철철 흐르는데 갑자기 웬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십자가로 가까이 가더니 예수님의 가슴에 또 못을 박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올라가 그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끌어내고 보니 그가 바로 자기 얼굴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깬 그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회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항상 새로워야 합니다. 이 관계의 최고의 상징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피와 살입니다.

우리 육신은 하루도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간혹 금식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물은 마시면서 기도합니다. 사실 본래의 금식이란 물도 먹지 않고 음식 냄새를 맡아도 안 됩니다. 그래서, 아랍 사람들이나 히브리 사람들은 대개 한끼 정도나 아니면 하루 정도 금식을 하며 우리처럼 길게 하지 않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삼각산에서 어느 분이 정식으로 40일간의 금식을 작정하고 물도 전혀 마시지 않고 기도하다가 12일 만에 죽었다고 합니다. 전혀 먹지 않으면 탈수 현상이 오고 마지막에는 창자가 붙어버립니다.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셨다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죽은 사람도 살리는 그 능력이 아니고서는 40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최소한 물은 마셔야 육신은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물은 마셔야 합니다. 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이처럼 육신이 물을 먹고 끼니마다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안 될 정도의 관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또는 심령이 가난하고 배고픈 자처럼 갈급해 하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 즉 그 생명의 역사를 성찬의 의미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예수님의 살과 피는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필수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공로가 아니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54절에서도 계속해서 피와 살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그 자체가 순종이요 믿음입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십자가를 경험할 수 있는 그만한 믿음과 겸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식을 행하실 때, "갖다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먹지 않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나 "이제는 받아 먹으라" 하셨을 때 야고보는 눈물로 회개하며 받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떡과 잔을 들면서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역사가 내 영혼에 부딪쳐 생명의 역사로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그만한 겸손, 그만한 믿음, 그만한 순종이 있을 때 거기에 구원의 역사가 재생됨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래야만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6:54 후반절)라고 종말론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약이고 생명의 약으로 먹고 마셔야만 반드시 마지막 날에 가서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6:55). 참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해, 이 양식 이외의 것은 다 거짓되다는 말입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먹는 양식은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고 결국은 썩어 버립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인 예수의 피와 살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며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헛된 양식은 끝없이 먹어야 하고 결국에 가서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양식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논법에 의하면 참 양식은, 즉 참으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오직 이것뿐으로 그 외의 것은 모두가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필자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 아주 감격적인 만남을 하나 소개하면, 모 대학 총장님으로 계시던 분이 후두암으로 4년 동안 고생을 하며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전혀 할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유언을 하시라고 부인께서 종이와 펜을 드렸더니 "예수 잘 믿으시오, 기도 많이 하시오"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 믿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임종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이것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필자가 찾아가서 전도를 하고 함께 감격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내 앞에 사망의 그늘이 올 때 누가 나를 위로해 줄 것입니까? 나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어라, 그것이 가장 좋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출세하라, 그것이 최고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직 하나, "예수 잘 믿으라, 기도 많이 하라" 이것뿐이어야 합니다. 오로지 참 양식을 위해서 우리는 수고해야 합니다.

다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6 : 56),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독을 마시면 독에 취해서 죽지만 예수님의 피를 마시면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어 내 생명에 연합되어 내 생명 중심부에서 나를 주관하시게 됩니다. "먹으라, 그러면 내가 네 속에 들어가 너를 주관하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6:57).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고,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가 아니면 순간도 살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 본문의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8)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 떡은 신령한 떡으로 영에 속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계속적으로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생명에 연합된 영생을 오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보이는 것에만, 현상적인 것에만 얽매여 자기 중심적인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말씀에 항상 주리고 목마른 자들처럼 말씀에 취해서 사는 건강한 심령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건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맛있게 먹습니다.

그러나, 젓가락을 들고 헤매며 얼굴을 찡그리며 입맛이 없어 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벌써 병이 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제나 말씀이 달고 오묘하고 감사하여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역사와 생명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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