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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이 매임에서 푸는 것(누가복음 13장 10절~17절)

by 【고동엽】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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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임에서 푸는 것(누가복음 13장 10절~17절)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전쟁과 평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Tolstoi, L.N : 1828-1910)가 쓴 장편소설의 제목입니다.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은 것입니까? 러시아어를 모르기에 부득불 번역서를 읽어야 했습니다마는 그 번역하는 과정이 늘상 문제입니다. 번역이라는 단계를 거쳐오면서 작품의 본질이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을 액면 그대로 소화할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자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자유는 인생의 가장 고귀한 욕망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와 '자유하다' '자유케 하다'라는 말은 각기 그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자유에도 변증법적 원리가 있다고 합니다. 곧 세 가지의 원리 안에서 자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리는 계약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법과 질서의 보장을 받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무한한 자유는 불안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와 불안의 개념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유는 평안하지 못합니다.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마는 막상 자유 하게 되면 불안해합니다. 더 괴롭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가 --- 아주 중요한 변증법적 문제에 도달합니다. 문제는 자유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에 대한 공포가 사람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법질서의 보호를 받을 때, 법에 순응하며 사는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킹슬레이(Kingsley, Charles) 목사는 그의 설교 가운데 두 가지의 자유를 거론한 바 있습니다. 그 하나가 '거짓된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방종의 노예가 되고, 허무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무서운 속박에 빠집니다. 그 둘이 '참된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연후에 그가 참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침 몇 시에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어느 가정에서나 기상시간 때문에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일어나라고 깨우면 조금 더 자겠다고 저마다 꾀를 부리는 통에 심지어 싸움까지 벌어집니다. 아무튼 학교 가야 할 아이들이나 직장 나가야 할 남편이나 깨우는 주부나 모두가 이 문제로 참 피곤해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번 자유를 부르짖어봅시다. 출근해야 할 시간에 '자유다, 이제 나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하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직장에는 결근을 했습니다. 이 사람, 의지박약증 환자입니다. 이제는 양심에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말할 수 없는 속박을 느끼게 됩니다. 결코 자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자는 것은 마음대로 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아주 부자유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대의 경우로,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납니다. 물론 좀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좀은 부자유한 것 같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먹고 합니다. 그는 이제 자유를 느낍니다. 저는 밤참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분명 먹지 말아야 하는데 입맛이 당깁니다.

또한 주위에서 자꾸 먹으라고 합니다. 먹을까 말까 하다가 먹는 것은 내 자유지 하고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버립니다. 틀림없이 다음날 아침 일어날 때에 몸이 무겁습니다. 뻔히 어찌될 줄 알면서도 그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겠습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이렇듯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며 보장할 때에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하여 남을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는 나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정의를 얻기 위하여 열 가지의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자유한 것까지는 좋습니다마는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부자유하게 되면 내 자유도 진정 자유가 아닐 뿐더러 그나마 지켜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당면한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면서 내가 자유롭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유케 한 연후에야 내가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내 자유--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희망 안의 자유입니다. 철학적 자유를 누리는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이야 속박으로 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내 마음이 선택한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가령 연애결혼을 예로 들어봅시다.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해서 한 결혼이므로 중매결혼에 비하여 당연히 원만해야 되겠는데 오히려 이혼율이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결혼을 했느냐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의 생활을 내가 선택해나갈 때에, 그 선택한 하루하루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느낄 때에 나는 진정 자유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 어떻게 한 선택일지라도 나는 그 선택 안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령상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요,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자유는 자유를 느끼는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대로 다 하는 것 같으면서도 무한한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한 불쌍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고쳐주시자 회당장이 안식일의 병고침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6절)." 영적인 통찰력으로 사건 그대로를 진실되이 보시는 예수님의 안목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임의 존재보다 매였다고 하는 상태를 보신 것입니다. 언제 어떠한 이유로 매이게 되었느냐고 따져 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과거를 덮어둔 채 오늘만을 보셨습니다. 매였다고 하는 이 상태만을 진실되이 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을 묻기 전에 먼저 그 상태 자체를 이해하려는 진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옛날의 노예들은 극단적으로 속박된 존재였습니다. 가위 부자유의 대명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마는 오늘날에도 그 옛날의 노예에 못지 않게 속박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여 끌려 다닙니다. 흡연을 예로 들어보십시다. 담배 피우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마는 그 담배 피우는 것으로 노예만큼이나 불쌍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세계적으로 금연을 권장하는 터라 어느 나라 공항 대합실이건 거의 금연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흡연실을 한쪽 구석에 유리로 막아 따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방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웁니다. 신세가 참으로 처량합니다. 동물 우리에 갇힌 바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입니까? 안 피우면 그만일 것을, 그것을 끊지 못하여 구박과 창피스러움을 무릅쓰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제가 잘 알고 지내는 미국인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부인이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언젠가 한번 찾아가서 만나보았더니 목이 쉬어 남자인 제 음성보다도 더 굵습니다. 후두가 거반 상했는데도 계속 줄담배를 피우는 것입니다. 끊어보라고 했더니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교회 일로 바삐 나다녀서 혼자 심심풀이로 피우기 시작한 것이 그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피웁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담배만이 아닙니다. 술에 노예된 사람, 습관에 노예된 사람, 자존심에 노예된 사람, 열등의식에 노예된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이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가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더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저를 무시해서 옆에 앉지 않았다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참으로 여러 가지 입니다. 이 사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분명 무엇인가가 가슴에 응어리져서 거기에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쉽사리 돈의 노예가 되고 게으름의 노예가 됩니다. 몇푼어치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피차가 고생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더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성을 보셨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아온 한 불쌍한 여자를 보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정신병자요 게다가 꼽추까지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내 병 좀 고쳐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 불쌍하고 쓸모 없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아'--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매인 바를 보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본래성, 또한 은혜를 더한 다음에 있을 미래성--깊은 곳에 있는 진실과 잠재되어 있는 귀한 존재를 보시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자유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는 예수님은 지금의 이 부자유한 모습과 그의 본래의 모습을 별개로 보신 것입니다. 악마에게 붙들려 있을 뿐이지 악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8년 동안이나 붙들려 있었어도 그는 악마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러합니다. 매인 바를 사실 그대로 보시고 그 안에 자유 하고자 하는, 자유 해야 하는 하나님의 딸을 보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술에 취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술에 취해 있을 때에는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이 깬 다음이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번번이 술 취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술독입니까? 그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청년의 아버지는 술로 인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자 자녀들이 모여서 저들은 절대로 술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낮에는 고등학교에, 밤에는 성경학교에를 다니며 열심으로 살아갔습니다. 저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갔으면 하고 적잖이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마는 웬걸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이젠 아버지보다 더 마십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그 청년이 술에 만취하여 저의 집, 더구나 목사 집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겠느냐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하무인입니다. 오히려 부전자전이라느니, 피는 못 속인다느니, 구제불능이라느니 하며 몸부림을 칩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다음, 무슨 교역자 수양회엔가 강연을 하러 갔다가 바로 그곳에서 목사가 된 그 청년을 만났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망나니 같던 그가 목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단지 매인 바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사람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독자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병자일 뿐이요 매여 있을 뿐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헬렌 켈러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이었습니다. 그렇듯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설리반 선생을 만나게 되어 오늘날의 헬렌 켈러 박사로 남게 된 것입니다. 설리반 선생도 실은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수술을 받고 그 암흑의 세상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완전한 시력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겠다'라는 결심으로 마땅한 일을 찾고 있을 때에 퍼킨스학교 교장의 소개로 헬렌 켈러를 만납니다. 당시 헬렌 켈러의 나이 7세였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발악하고 있는 헬렌 켈러에게서 그는 내면을 보았습니다. 속에 하나님의 딸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매인 바로부터 하나하나 자유케 하였고, 마침내 헬렌 켈러 박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실망하고 계십니까? 다 끝난 것입니까? 아주 버려졌습니까?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 있던 환자에게도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자유케 하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종교, 잘못된 신앙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네팔에 가보면 사람들이 외양간 같은 곳에서 사는 것을 봅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소․돼지․개와 같은 짐승들과 함께 잡니다. 도대체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이기 때문입니다. 윤회설을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소가 되었다, 삼촌이 죽어서 개가 되었다---이럴진대 밖으로 내몰 수 있겠습니까? 같이 자고 먹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잘못된 종교가 사람을 이토록 우습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저는 책에서만 읽었습니다마는 티베트에 직접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땅에 묻으면 그 죽은 사람이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고, 독수리가 그 시체를 다 먹어버려야만 비로소 극락세계로 가는 것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못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숨이 끊어지기 전에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다 몸을 난도질하여 놓으면 독수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뜯어먹습니다. 얼마나 많이 그랬는지 산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들은 피와 기름으로 반질반질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영혼이 극락세계로 갔다며 며칠씩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사상, 잘못된 종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러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폭력만이 정의를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그것만이 의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요, 세계를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누구도 저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매여 있을 뿐입니다. 잘못된 사상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 잘못된 철학--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오는 이 여자는 18년이나 귀신에 매여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당시 유대사람들은 형식적 종교에 매여 지극히 형식주의적이요 비도덕적이요 위선적이요 폐쇄적이었습니다.

잘못된 종교사상에 매인 나머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이 귀한 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고 하여 시비를 벌입니다. 예수님께는 안식일보다, 그들의 규례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매임에서 푸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절)"--과감하고 생동력 있게 말씀하시고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의 문제로 저들과 자주 충돌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친 예가 7번이나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 그리고 오늘의 말씀인 누가복음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린 사람을, 14장에서는 고창병 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환자를,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일이 모두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이래서 갖은 비난을 다 받으십니다. 여러분, 선하고 의로운 일에는 비난과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들과 자신의 마음을 동일시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서둘러서 귀한 역사를 이루시려 할 때에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관습과 제도를 초월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철학과 충돌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자유케 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물질이나 경제의 문제이기보다는 사상의 문제요 영의 문제입니다.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않느냐'--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기독교인은 가장 자유 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가장 강한 사슬에 매인 노예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미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는 딱한 일입니다만 본인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미쳐야 합니다. 바른 사상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중보하심,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3,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의에 미친 사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붙들린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령만이 자유케 합니다. 그때에 주님의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참자유를 느낍니까? 나에게 자유가 있는 것 같습니까? 매인 바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유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참자유를 누리고 자유케 하는 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누가복음 13장 10절~17절)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전쟁과 평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Tolstoi, L.N : 1828-1910)가 쓴 장편소설의 제목입니다.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은 것입니까? 러시아어를 모르기에 부득불 번역서를 읽어야 했습니다마는 그 번역하는 과정이 늘상 문제입니다. 번역이라는 단계를 거쳐오면서 작품의 본질이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을 액면 그대로 소화할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자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자유는 인생의 가장 고귀한 욕망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와 '자유하다' '자유케 하다'라는 말은 각기 그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자유에도 변증법적 원리가 있다고 합니다. 곧 세 가지의 원리 안에서 자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리는 계약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법과 질서의 보장을 받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무한한 자유는 불안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와 불안의 개념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유는 평안하지 못합니다.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마는 막상 자유 하게 되면 불안해합니다. 더 괴롭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가 --- 아주 중요한 변증법적 문제에 도달합니다. 문제는 자유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에 대한 공포가 사람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법질서의 보호를 받을 때, 법에 순응하며 사는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킹슬레이(Kingsley, Charles) 목사는 그의 설교 가운데 두 가지의 자유를 거론한 바 있습니다. 그 하나가 '거짓된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방종의 노예가 되고, 허무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무서운 속박에 빠집니다. 그 둘이 '참된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연후에 그가 참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침 몇 시에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어느 가정에서나 기상시간 때문에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일어나라고 깨우면 조금 더 자겠다고 저마다 꾀를 부리는 통에 심지어 싸움까지 벌어집니다. 아무튼 학교 가야 할 아이들이나 직장 나가야 할 남편이나 깨우는 주부나 모두가 이 문제로 참 피곤해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번 자유를 부르짖어봅시다. 출근해야 할 시간에 '자유다, 이제 나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하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직장에는 결근을 했습니다. 이 사람, 의지박약증 환자입니다. 이제는 양심에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말할 수 없는 속박을 느끼게 됩니다. 결코 자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자는 것은 마음대로 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아주 부자유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대의 경우로,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납니다. 물론 좀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좀은 부자유한 것 같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먹고 합니다. 그는 이제 자유를 느낍니다. 저는 밤참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분명 먹지 말아야 하는데 입맛이 당깁니다.

또한 주위에서 자꾸 먹으라고 합니다. 먹을까 말까 하다가 먹는 것은 내 자유지 하고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버립니다. 틀림없이 다음날 아침 일어날 때에 몸이 무겁습니다. 뻔히 어찌될 줄 알면서도 그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겠습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이렇듯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며 보장할 때에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하여 남을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는 나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정의를 얻기 위하여 열 가지의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자유한 것까지는 좋습니다마는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부자유하게 되면 내 자유도 진정 자유가 아닐 뿐더러 그나마 지켜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당면한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면서 내가 자유롭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유케 한 연후에야 내가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내 자유--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희망 안의 자유입니다. 철학적 자유를 누리는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이야 속박으로 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내 마음이 선택한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가령 연애결혼을 예로 들어봅시다.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해서 한 결혼이므로 중매결혼에 비하여 당연히 원만해야 되겠는데 오히려 이혼율이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결혼을 했느냐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의 생활을 내가 선택해나갈 때에, 그 선택한 하루하루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느낄 때에 나는 진정 자유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 어떻게 한 선택일지라도 나는 그 선택 안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령상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요,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자유는 자유를 느끼는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대로 다 하는 것 같으면서도 무한한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한 불쌍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고쳐주시자 회당장이 안식일의 병고침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6절)." 영적인 통찰력으로 사건 그대로를 진실되이 보시는 예수님의 안목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임의 존재보다 매였다고 하는 상태를 보신 것입니다. 언제 어떠한 이유로 매이게 되었느냐고 따져 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과거를 덮어둔 채 오늘만을 보셨습니다. 매였다고 하는 이 상태만을 진실되이 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을 묻기 전에 먼저 그 상태 자체를 이해하려는 진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옛날의 노예들은 극단적으로 속박된 존재였습니다. 가위 부자유의 대명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마는 오늘날에도 그 옛날의 노예에 못지 않게 속박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여 끌려 다닙니다. 흡연을 예로 들어보십시다. 담배 피우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마는 그 담배 피우는 것으로 노예만큼이나 불쌍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세계적으로 금연을 권장하는 터라 어느 나라 공항 대합실이건 거의 금연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흡연실을 한쪽 구석에 유리로 막아 따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방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웁니다. 신세가 참으로 처량합니다. 동물 우리에 갇힌 바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입니까? 안 피우면 그만일 것을, 그것을 끊지 못하여 구박과 창피스러움을 무릅쓰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제가 잘 알고 지내는 미국인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부인이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언젠가 한번 찾아가서 만나보았더니 목이 쉬어 남자인 제 음성보다도 더 굵습니다. 후두가 거반 상했는데도 계속 줄담배를 피우는 것입니다. 끊어보라고 했더니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교회 일로 바삐 나다녀서 혼자 심심풀이로 피우기 시작한 것이 그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피웁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담배만이 아닙니다. 술에 노예된 사람, 습관에 노예된 사람, 자존심에 노예된 사람, 열등의식에 노예된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이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가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더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저를 무시해서 옆에 앉지 않았다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참으로 여러 가지 입니다. 이 사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분명 무엇인가가 가슴에 응어리져서 거기에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쉽사리 돈의 노예가 되고 게으름의 노예가 됩니다. 몇푼어치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피차가 고생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더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성을 보셨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아온 한 불쌍한 여자를 보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정신병자요 게다가 꼽추까지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내 병 좀 고쳐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 불쌍하고 쓸모 없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아'--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매인 바를 보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본래성, 또한 은혜를 더한 다음에 있을 미래성--깊은 곳에 있는 진실과 잠재되어 있는 귀한 존재를 보시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자유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는 예수님은 지금의 이 부자유한 모습과 그의 본래의 모습을 별개로 보신 것입니다. 악마에게 붙들려 있을 뿐이지 악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8년 동안이나 붙들려 있었어도 그는 악마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러합니다. 매인 바를 사실 그대로 보시고 그 안에 자유 하고자 하는, 자유 해야 하는 하나님의 딸을 보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술에 취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술에 취해 있을 때에는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이 깬 다음이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번번이 술 취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술독입니까? 그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청년의 아버지는 술로 인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자 자녀들이 모여서 저들은 절대로 술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낮에는 고등학교에, 밤에는 성경학교에를 다니며 열심으로 살아갔습니다. 저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갔으면 하고 적잖이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마는 웬걸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이젠 아버지보다 더 마십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그 청년이 술에 만취하여 저의 집, 더구나 목사 집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겠느냐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하무인입니다. 오히려 부전자전이라느니, 피는 못 속인다느니, 구제불능이라느니 하며 몸부림을 칩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다음, 무슨 교역자 수양회엔가 강연을 하러 갔다가 바로 그곳에서 목사가 된 그 청년을 만났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망나니 같던 그가 목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단지 매인 바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사람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독자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병자일 뿐이요 매여 있을 뿐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헬렌 켈러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이었습니다. 그렇듯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설리반 선생을 만나게 되어 오늘날의 헬렌 켈러 박사로 남게 된 것입니다. 설리반 선생도 실은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수술을 받고 그 암흑의 세상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완전한 시력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겠다'라는 결심으로 마땅한 일을 찾고 있을 때에 퍼킨스학교 교장의 소개로 헬렌 켈러를 만납니다. 당시 헬렌 켈러의 나이 7세였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발악하고 있는 헬렌 켈러에게서 그는 내면을 보았습니다. 속에 하나님의 딸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매인 바로부터 하나하나 자유케 하였고, 마침내 헬렌 켈러 박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실망하고 계십니까? 다 끝난 것입니까? 아주 버려졌습니까?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 있던 환자에게도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자유케 하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종교, 잘못된 신앙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네팔에 가보면 사람들이 외양간 같은 곳에서 사는 것을 봅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소․돼지․개와 같은 짐승들과 함께 잡니다. 도대체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이기 때문입니다. 윤회설을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소가 되었다, 삼촌이 죽어서 개가 되었다---이럴진대 밖으로 내몰 수 있겠습니까? 같이 자고 먹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잘못된 종교가 사람을 이토록 우습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저는 책에서만 읽었습니다마는 티베트에 직접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땅에 묻으면 그 죽은 사람이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고, 독수리가 그 시체를 다 먹어버려야만 비로소 극락세계로 가는 것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못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숨이 끊어지기 전에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다 몸을 난도질하여 놓으면 독수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뜯어먹습니다. 얼마나 많이 그랬는지 산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들은 피와 기름으로 반질반질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영혼이 극락세계로 갔다며 며칠씩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사상, 잘못된 종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러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폭력만이 정의를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그것만이 의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요, 세계를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누구도 저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매여 있을 뿐입니다. 잘못된 사상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 잘못된 철학--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오는 이 여자는 18년이나 귀신에 매여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당시 유대사람들은 형식적 종교에 매여 지극히 형식주의적이요 비도덕적이요 위선적이요 폐쇄적이었습니다.

잘못된 종교사상에 매인 나머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이 귀한 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고 하여 시비를 벌입니다. 예수님께는 안식일보다, 그들의 규례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매임에서 푸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절)"--과감하고 생동력 있게 말씀하시고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의 문제로 저들과 자주 충돌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친 예가 7번이나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 그리고 오늘의 말씀인 누가복음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린 사람을, 14장에서는 고창병 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환자를,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일이 모두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이래서 갖은 비난을 다 받으십니다. 여러분, 선하고 의로운 일에는 비난과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들과 자신의 마음을 동일시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서둘러서 귀한 역사를 이루시려 할 때에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관습과 제도를 초월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철학과 충돌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자유케 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물질이나 경제의 문제이기보다는 사상의 문제요 영의 문제입니다.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않느냐'--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기독교인은 가장 자유 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가장 강한 사슬에 매인 노예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미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는 딱한 일입니다만 본인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미쳐야 합니다. 바른 사상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중보하심,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3,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의에 미친 사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붙들린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령만이 자유케 합니다. 그때에 주님의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참자유를 느낍니까? 나에게 자유가 있는 것 같습니까? 매인 바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유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참자유를 누리고 자유케 하는 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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