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복음의 확증(로마서 5장 5절~11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은 종교개혁 47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개혁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개혁 의지나 혁명 의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타락,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세상적이며 영웅적인 발상에서 발원된 것도 아닙니다. 또한 혁명을 일으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의지가 종교개혁을 종교개혁 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한 경건한 수도사의 깊은 고뇌에서 비롯됩니다. 그 깊은 고뇌로 말미암아 참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확실한 구원의 방법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하게 된 것이 그 시발이 되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여기를 고쳐야 하겠고, 저기를 고쳐야 하겠고,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하겠고, 심지어는 누가 죽어야 하겠고----갖가지 생각을 합니다마는 여전히 말에서 말로, 시비에서 시비로 그치고 맙니다. 이렇다 할 결실은 없습니다. 여러분, 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내 인격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나의 나됨을 하나님 앞에 바로 하지 못한 상태로는 어떤 개혁이나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시끄러울 뿐더러 문제만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작은 마을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분이 낮아서 동정련업(銅精鍊業)에 종사했지만 아들 하나만은 공부를 잘시켜서 가문을 빛낼 인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귀족계급의 법률가가 되어주기를 소원합니다. 루터는 이러한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과대학에 입학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로서 열심히 학업을 닦습니다.
그러던 그가 19세 때, 여름방학을 맞아 다정한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에르푸르트라는 곳에서 인생의 목표를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면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친 벼락에 잠시전까지도 청운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 죽은 친구의 처참한 몰골을 본 순간, 루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 정신없이 기도합니다. 그날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던 그는 마침내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남달리 금식을 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등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하루에 무려 일곱 번이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고해성사란 아시다시피 카톨릭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공중전화부스 같은 곳에 들어가서 신부님의 귀에 대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일곱 번이었다고 합니다마는 어떤 기록에는 스무 번이나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렇듯 그는 줄기차게 자신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그토록 지었겠습니까? 죄를 지으려 해도 지을 수 없는 곳이 수도원입니다. 살인을 합니까 도적질을 합니까, 간음을 합니까 거짓말할 일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부님을 불러내 고해를 합니다. 눈물로 자복(自服)합니다. 시기․질투․증오․의심, 특히 정욕에 대한 모든 죄를 자복 합니다. 내 죄, 내 죄, 내 죄……하면서 괴로워하고 통회(痛悔)합니다. 어느 날 그의 고해성사에 지친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너라." 여러분,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토록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는 27세가 되던 1511년, 로마를 방문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로마를 방문하면 으레 라테라노(Lateran) 대성당을 빼놓지 않고 찾습니다. 라테라노 성당에는 28계(階)의 '성 계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재판받으러 오르셨던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계단입니다.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왕의 권위를 빌려 로마로 뜯어 옮기고 거기에 성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다 닳아버린 대리석 계단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통회 자복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고 합니다. 루터도 계단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면서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고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고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번개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을 계기로 그는 마침내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 저도 라테라노 성당을 방문했는데, 그 계단을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루터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가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루터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 대하여 강렬한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확실하게 재발견합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믿고, 신뢰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belief, confidence, commitment----온전히 하나님 앞에 의탁합니다. 그 결과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무서운 신앙적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됩니다. 그 일로 고발되어 1521년, 그를 단죄할 목적으로 열린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에 서게 되었을 때, '지금 가면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친구들이 충고합니다. 이 때에 그는 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거기에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가 있다 해도 나는 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생사를 가릴 무시무시한 '재판정'으로 나아가 또다시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OH! Here I stand.)." 이렇듯 철저히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용기있게 종교개혁을 단행한 결과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그 용기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구원받은 용기, 의롭다 함을 받은 용기,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용기입니다. 그로써 불의와 맞설 수 있었고, 죽음도 환난도 핍박도 고난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말고는 아무데도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5절과 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서 기꺼이 견디어냅니다. 지금 그 사랑의 강한 증거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절, 3절, 11절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얼마나, 또 무슨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세상의 잡다한 고민에는 매이지 않습니다. 내 죄에 내리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고민 말고 다른 고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진정한 고민의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행과 불행이 어디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돈 몇 푼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에 누워 있다고 해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아무리 좋은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지 않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한들 편안하겠습니까? 행복은 죄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죄가 있으면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아무도 없건만 고민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리밍거 박사는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경험한 바를 이렇게 술회합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만 줄 수 있다면 그중의 75퍼센트가 그 다음날로 퇴원하게 될 것입니다." 의사와 상담을 하고 치료를 열심히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문제는 죄입니다. 죄를 사함받았다는 확신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만 있다면 환자의 대다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제간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든 고민의 심연에는 죄가 있고 그 죄에 대한 가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겁 많은 이 사람은 감옥살이할 것이 두려워서 도망을 다니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끌었습니다. 용케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만 공소시효(公訴時效) 이틀을 앞두고 체포당합니다. "아이고, 그 사람 참 재수없구나. 이틀만 더 지났으면 일없었을 것을"----보통사람이라면 다들 이렇게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쇠고랑을 차고 가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10년이란 세월이 그에게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체포되는 순간에 비로소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무엇으로 고민하십니까? 얼마나 깊이 회개해보셨습니까? 절망해보셨습니까?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고 싶고, 그 죽는 것 때문에 고민해보셨습니까? 죄책감의 종말은 4D----자기 의지의 상실(depression),절망(despair),좌절(defeat), 파멸(destruction)로 결론맺는다고 합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성녀 글라라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그녀는 죄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치와 타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 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깊이 회개합니다. 손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손목에 쇠고랑을 차고 지냅니다. 얼굴이 죄를 지었다고 하여 목에 쇠멍에를 만들어서 답니다. 발목에도 쇠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고행을 합니다. 심지어 침대도 딱딱한 판자로 만들어 고단한 잠을 잡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실수를 합니다. "당신은 위선자요"라는 말에 역정을 내며 상대방을 욕하고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내가 아직 멀었구나, 죄가 너무 많구나' 하고 다시 회개합니다. 혀가 말썽이라 하여 송곳으로 혀를 두 번이나 찔러서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참회해보셨습니까? 깊은 탄식과 회개는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그 확증을 발견하기 전에는 아무도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루터는 다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비롯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깨닫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이요 여기에 참된 증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믿어야 효력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으라----믿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증거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십시오. 십자가에는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모습이 저렇구나' '내 죄가 참으로 많구나' '나야말로 십자가에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구나' ----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십자가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십니다. 내 생의 의미와 소중한 가치가 그 사랑 안에 숨기어 있습니다. 내 생명이 신비롭게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고, 죽으시고, 화목케 하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첫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싸움을 많이 하는 부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화해할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목사님께 상담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앞에서도 싸웁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다 주었어요." 아내가 말합니다. "나도 당신을 위하여 집을 주었고, 돈을 주었고, 옷을 주었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주었소." 다 주었다고 남편도 맞받습니다. 다시 아내가 말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주었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주지 않았어요." 여러분, 나 자신을 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주고 내 중심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물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달라고 하는 물질과 돈을 안주시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둘째,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요, 구속을 의미합니다. 대신 죽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거듭해서 말씀합니다. "죽으셨도다…… 죽으심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자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내가 원수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정죄받는 대신 그가 정죄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대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만큼 사랑하고, 이해하고나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도 없고 그로써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생명 대 생명의 문제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새 한 마리를 잡아 새장에 넣어가지고 오는 것을 목사님이 보았습니다. "너 새를 어떻게 잡았느냐?" "덫으로 잡았습니다." "뭐할 거냐?" "우리 고양이 먹이로 줄 겁니다." 어린아이의 대답을 들은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새를 달라고 합니다. 결국 많은 돈을 주고 새장까지 사고 맙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정원으로 가지고 와서 놓아줍니다. 여러분,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서도 이렇듯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감상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희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의를 사랑하는 자가 지불해야 합니다. 지불하지 않고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 화목케 하셨습니다. 자격 없는 자를 불러 자격 있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의를 옷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봅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그 아버지 역시 탕자입니다. 명예와 재산을 다 낭비해가면서 그 아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화목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까? 자기 의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마음에 번민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르짖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람,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계시된 의들 수용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게 되고 중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개혁하고 가정을, 사회를, 세상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과 그 약속이 개혁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확증(로마서 5장 5절~11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은 종교개혁 47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개혁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개혁 의지나 혁명 의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타락,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세상적이며 영웅적인 발상에서 발원된 것도 아닙니다. 또한 혁명을 일으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의지가 종교개혁을 종교개혁 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한 경건한 수도사의 깊은 고뇌에서 비롯됩니다. 그 깊은 고뇌로 말미암아 참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확실한 구원의 방법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하게 된 것이 그 시발이 되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여기를 고쳐야 하겠고, 저기를 고쳐야 하겠고,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하겠고, 심지어는 누가 죽어야 하겠고----갖가지 생각을 합니다마는 여전히 말에서 말로, 시비에서 시비로 그치고 맙니다. 이렇다 할 결실은 없습니다. 여러분, 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내 인격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나의 나됨을 하나님 앞에 바로 하지 못한 상태로는 어떤 개혁이나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시끄러울 뿐더러 문제만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작은 마을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분이 낮아서 동정련업(銅精鍊業)에 종사했지만 아들 하나만은 공부를 잘시켜서 가문을 빛낼 인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귀족계급의 법률가가 되어주기를 소원합니다. 루터는 이러한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과대학에 입학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로서 열심히 학업을 닦습니다.
그러던 그가 19세 때, 여름방학을 맞아 다정한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에르푸르트라는 곳에서 인생의 목표를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면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친 벼락에 잠시전까지도 청운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 죽은 친구의 처참한 몰골을 본 순간, 루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 정신없이 기도합니다. 그날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던 그는 마침내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남달리 금식을 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등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하루에 무려 일곱 번이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고해성사란 아시다시피 카톨릭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공중전화부스 같은 곳에 들어가서 신부님의 귀에 대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일곱 번이었다고 합니다마는 어떤 기록에는 스무 번이나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렇듯 그는 줄기차게 자신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그토록 지었겠습니까? 죄를 지으려 해도 지을 수 없는 곳이 수도원입니다. 살인을 합니까 도적질을 합니까, 간음을 합니까 거짓말할 일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부님을 불러내 고해를 합니다. 눈물로 자복(自服)합니다. 시기․질투․증오․의심, 특히 정욕에 대한 모든 죄를 자복 합니다. 내 죄, 내 죄, 내 죄……하면서 괴로워하고 통회(痛悔)합니다. 어느 날 그의 고해성사에 지친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너라." 여러분,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토록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는 27세가 되던 1511년, 로마를 방문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로마를 방문하면 으레 라테라노(Lateran) 대성당을 빼놓지 않고 찾습니다. 라테라노 성당에는 28계(階)의 '성 계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재판받으러 오르셨던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계단입니다.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왕의 권위를 빌려 로마로 뜯어 옮기고 거기에 성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다 닳아버린 대리석 계단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통회 자복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고 합니다. 루터도 계단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면서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고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고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번개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을 계기로 그는 마침내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 저도 라테라노 성당을 방문했는데, 그 계단을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루터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가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루터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 대하여 강렬한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확실하게 재발견합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믿고, 신뢰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belief, confidence, commitment----온전히 하나님 앞에 의탁합니다. 그 결과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무서운 신앙적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됩니다. 그 일로 고발되어 1521년, 그를 단죄할 목적으로 열린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에 서게 되었을 때, '지금 가면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친구들이 충고합니다. 이 때에 그는 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거기에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가 있다 해도 나는 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생사를 가릴 무시무시한 '재판정'으로 나아가 또다시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OH! Here I stand.)." 이렇듯 철저히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용기있게 종교개혁을 단행한 결과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그 용기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구원받은 용기, 의롭다 함을 받은 용기,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용기입니다. 그로써 불의와 맞설 수 있었고, 죽음도 환난도 핍박도 고난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말고는 아무데도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5절과 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서 기꺼이 견디어냅니다. 지금 그 사랑의 강한 증거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절, 3절, 11절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얼마나, 또 무슨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세상의 잡다한 고민에는 매이지 않습니다. 내 죄에 내리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고민 말고 다른 고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진정한 고민의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행과 불행이 어디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돈 몇 푼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에 누워 있다고 해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아무리 좋은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지 않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한들 편안하겠습니까? 행복은 죄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죄가 있으면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아무도 없건만 고민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리밍거 박사는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경험한 바를 이렇게 술회합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만 줄 수 있다면 그중의 75퍼센트가 그 다음날로 퇴원하게 될 것입니다." 의사와 상담을 하고 치료를 열심히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문제는 죄입니다. 죄를 사함받았다는 확신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만 있다면 환자의 대다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제간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든 고민의 심연에는 죄가 있고 그 죄에 대한 가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겁 많은 이 사람은 감옥살이할 것이 두려워서 도망을 다니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끌었습니다. 용케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만 공소시효(公訴時效) 이틀을 앞두고 체포당합니다. "아이고, 그 사람 참 재수없구나. 이틀만 더 지났으면 일없었을 것을"----보통사람이라면 다들 이렇게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쇠고랑을 차고 가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10년이란 세월이 그에게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체포되는 순간에 비로소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무엇으로 고민하십니까? 얼마나 깊이 회개해보셨습니까? 절망해보셨습니까?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고 싶고, 그 죽는 것 때문에 고민해보셨습니까? 죄책감의 종말은 4D----자기 의지의 상실(depression),절망(despair),좌절(defeat), 파멸(destruction)로 결론맺는다고 합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성녀 글라라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그녀는 죄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치와 타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 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깊이 회개합니다. 손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손목에 쇠고랑을 차고 지냅니다. 얼굴이 죄를 지었다고 하여 목에 쇠멍에를 만들어서 답니다. 발목에도 쇠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고행을 합니다. 심지어 침대도 딱딱한 판자로 만들어 고단한 잠을 잡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실수를 합니다. "당신은 위선자요"라는 말에 역정을 내며 상대방을 욕하고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내가 아직 멀었구나, 죄가 너무 많구나' 하고 다시 회개합니다. 혀가 말썽이라 하여 송곳으로 혀를 두 번이나 찔러서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참회해보셨습니까? 깊은 탄식과 회개는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그 확증을 발견하기 전에는 아무도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루터는 다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비롯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깨닫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이요 여기에 참된 증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믿어야 효력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으라----믿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증거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십시오. 십자가에는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모습이 저렇구나' '내 죄가 참으로 많구나' '나야말로 십자가에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구나' ----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십자가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십니다. 내 생의 의미와 소중한 가치가 그 사랑 안에 숨기어 있습니다. 내 생명이 신비롭게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고, 죽으시고, 화목케 하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첫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싸움을 많이 하는 부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화해할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목사님께 상담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앞에서도 싸웁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다 주었어요." 아내가 말합니다. "나도 당신을 위하여 집을 주었고, 돈을 주었고, 옷을 주었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주었소." 다 주었다고 남편도 맞받습니다. 다시 아내가 말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주었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주지 않았어요." 여러분, 나 자신을 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주고 내 중심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물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달라고 하는 물질과 돈을 안주시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둘째,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요, 구속을 의미합니다. 대신 죽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거듭해서 말씀합니다. "죽으셨도다…… 죽으심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자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내가 원수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정죄받는 대신 그가 정죄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대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만큼 사랑하고, 이해하고나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도 없고 그로써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생명 대 생명의 문제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새 한 마리를 잡아 새장에 넣어가지고 오는 것을 목사님이 보았습니다. "너 새를 어떻게 잡았느냐?" "덫으로 잡았습니다." "뭐할 거냐?" "우리 고양이 먹이로 줄 겁니다." 어린아이의 대답을 들은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새를 달라고 합니다. 결국 많은 돈을 주고 새장까지 사고 맙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정원으로 가지고 와서 놓아줍니다. 여러분,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서도 이렇듯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감상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희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의를 사랑하는 자가 지불해야 합니다. 지불하지 않고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 화목케 하셨습니다. 자격 없는 자를 불러 자격 있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의를 옷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봅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그 아버지 역시 탕자입니다. 명예와 재산을 다 낭비해가면서 그 아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화목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까? 자기 의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마음에 번민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르짖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람,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계시된 의들 수용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게 되고 중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개혁하고 가정을, 사회를, 세상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과 그 약속이 개혁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사야 56장 1절~8절) (0) | 2024.09.08 |
---|---|
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장 5절~10절) (0) | 2024.09.08 |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갈라디아서 4장 12절~20절) (0) | 2024.09.08 |
열매맺는 생활의 비결(요한복음 15장 1절~8절) (0) | 2024.09.08 |
살아 있는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16절) (0) | 2024.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