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유업을 나누게 하소서 (누가복음 12장 13~21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루는 링컨 대통령이 아침 산책을 나섰다가 때마침 두 어린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 세웠습니다. 아주 귀엽게 생긴 이 어린이들은 서로 형제간이었습니다. 링컨은 손에 쥐고 있던 호두 세 개를 동생 되는 어린이에게 주면서 둘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라고 일렀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은 형에게 그 중의 한 개를 건네주면서 말합니다. "대통령께서 내게 주셨으니까 내가 두 개 갖고 형은 한 개만 가져." 그러나 형은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안 돼. 나는 형이니까 두 개 가지고 너는 동생이니까 한 개만 가져야 돼."이래서 그때까지 사이좋아 보이던 형제가 그만 대통령 앞에서 다투기 시작합니다. 링컨은 '이거 괜한 것을 주어서 싸움을 붙여 놓았구나' 하고 난처해했습니다. 그 때 장관 한 분이 다가와 묻습니다. "각하, 저 아이들이 왜 싸웁니까?" 대통령이 대답합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세계 문제로 싸우고 있다오. 국제 문제로 말이오."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세계 문제는 결국 이 어린이들처럼 서로가 조금 더 먹자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배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GNP가 1,500불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적 빈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지만 1,500불에 가까워 오면서부터는 상대적 빈곤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GNP가 얼마나 높아져야 문제가 해결되나 궁금해서 더 읽어보니까, 그 논문은 끝에 가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즉 GNP가 1,500불을 넘어서면 사람들이 잘살아 봐도 별것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기 시작하고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이 분배 문제 및 상대적 빈곤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논문의 추측이 제대로 들어맞을지 어떨지, 어디 두고 보도록 하십시다.
절대적 빈곤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입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상대적 빈곤이라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에는 먹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마는, 사실은 배고픈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오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생활 수준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집이 없이 이리저리 셋방살이 다니는 사람들은 비록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이 소원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조그마한 내 집을 가지게 되면 이번에는 남의 큰 집에 비해 너무 초라한 내 집이 못마땅해집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배가 고프다든지 하는 육신의 고통이지만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마음의 아픔입니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몸이 죽고 상대적 빈곤에서는 기가 죽습니다. 마음이 죽고 기가 죽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들이 우리 앞에 첩첩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내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 안정되고 보면 그 다음에는 또 정신적 문화적 빈곤의 문제가 고개를 쳐듭니다.
아울러 더욱 엄청난 문제, 곧 도덕적 빈곤의 문제가 밀려옵니다.
알코올과 마약이 인성(人性)을 파괴합니다. 복마전(伏魔澱)을 능가하는 온갖 퇴폐와 타락이 판을 칩니다.
도덕적 빈곤의 문제와 아울러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소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복지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예배당은 크게 지어 놓았는데 교인은 없습니다. 교회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멀리 내다볼 때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살아 보세' 하고 경제 문제만 풀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상대적 빈곤의 문제, 인권 문제, 문화적 빈곤의 문제, 도덕적 빈곤의 문제, 나아가 영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겹겹이 가로놓여 있음을 예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형제가 분배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생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遺業)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고 말합니다. 분배 문제에 대한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알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형에게 명령을 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변수(變數)는 내게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앞에 놓고 "내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지를 않고 "저 사람들을 감동시켜 움직여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들 요구하고 있습니다.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좀 조용히 있어 달라고 합니다. 없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마음을 좀 고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은 가만히 둔 채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변화됨으로 해결이 있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에 어려운 문제가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생이라는 자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와서 그런 식으로 나오자 예수님께서는 직접 개입을 거부하십니다. 주님은 더 근본적이고 깊은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본문의 내용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습으로는 형제가 유산을 나누는 경우, 형이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3분의 1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왜 분배 문제가 대두되고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경우입니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문제될 것이 없겠는데 유언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형이 유산을 제 마음대로 움켜쥐고 앉아 동생한테는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둘째로, 형이 형 노릇을 못하여 평소에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다면, 이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 몫의 두 배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이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으니, 동생으로서는 자기가 형보다 많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형제가 둘 다 부모를 모시지 않았던 경우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이 자기 몫의 두 배를 차지할 이유가 없으니 반씩 나누어 가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자, 이제 묻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하겠습니까? 이 형제가 어떻게 분배를 해야 올바른 분배라 할 수 있을까요? 관례를 따르기도 애매하고, 법을 따르자니 그도 분명치 않고, 현실적으로도 어떻게 해야 합리적일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좀처럼 쉽게 풀 수 없는 답답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시온 산언덕, 예루살렘 성전의 터전에 얽힌 전설입니다. 농사 짓는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혼자서 살고, 동생은 딸린 식구가 여럿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각자 추수를 해서 밭에다 보릿단을 잔뜩 쌓아 두었습니다. 동생은 혼자 사는 형이 측은해서 밤중에 몰래 자기네보릿단을 형네 밭으로 많이 옮겨 놓았습니다. 형은 동생네 식구가 많은 것을 생각해서 역시 밤을 타 자기네 보릿단을 동생네 밭으로 꽤 많이 옮겨 놓았습니다. 서로가 이렇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 보면 보릿단의 분량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서로가 또 그렇게 하다가 결국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혼자서 쓸쓸하게 살아가시니 양식이라도 많이 있어서 여유를 가지고 사셔야 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보릿단을 보태드리려고 했습니다." 하고 동생이 말하자 형은 말합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딸린 식구가 많으니 나보다 양식이 더 넉넉해야지." 마침내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형제 사랑을 기리어서 그 밭에다 성전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저는 대학에서 늘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30년 해 오면서도 간간이 마음 아프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시험지 채점할 때가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남에게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시험지 채점은 남을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하지 않을 수 없는 판단 행위인 것입니다. 게다가 답안이 주관식으로 된 것이라서 제 생각에 따라 A학점도 주고 B도 C도, 그리고 낙제점도 주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남을 평가할 때마다 '이거, 내가 공평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회의(懷疑)를 하게 됩니다. 전부 100점을 주면 가장마음이 편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야 없지 않습니까? 공부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점수를 많이 주고 공부를 게을리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낙제점을 주어야지요. 당연한데도 역시 회의는 남습니다.
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말 공정한 것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공평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또, 공평하다고 해서 모두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까? 말은 쉽지만 '공평(公平)'이란 그렇게 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탐심(貪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탐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아무리 공평하게 분배해주어도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탐심이 있는 한에는 어떤 경우도 공평하다고 수긍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십계명에서도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그리고 탐내지 말라---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어떻게든 제거한 다음에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그래야만 공정한 분배도 성립하고 공평한 것을 공평하다고 수긍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옛 중국의 제나라에 금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시장 바닥에 금을 펼쳐 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와 넋빠진 듯 금을 들여다보더니 다짜고짜 금을 한 덩이 집어들고는 냅다 달아납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하는 시장 바닥이니 얼마 못 가서 젊은이는 붙잡혔습니다.
관가에 끌려가 재판을 받는데, 재판장이 묻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서 그걸 들고 달아나는 바보가 어디 있나!" 이에 도둑은 천연스럽게 대답합니다. "금을 보는 순간, 내 눈에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습니다." "저런, 쯧쯧……" 그러므로 몹쓸 것이 탐심입니다.
탐심이 있는 한, 의(義)도, 나라도, 겨레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도 장래의 일도, 진리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못 보게 됩니다. 탐심의 노예가 되면 이처럼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격도 이성(理性)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탐심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는 공평이고 평등이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의 단평란에 인용된 이야기 한 토막을 읽고 혼자서 한참 웃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질을 갔어요. 푸른빛을 띤 이상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았습니다.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애원을 합니다.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줄 터이니 나를 도로 놓아주십시오. 나는 용왕의 아들이어요." 낚시꾼은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놓아주지" 하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안 됩니다. 세 가지밖에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럼 네 가지만." "세 가지밖에 안 됩니다.""그럼 세 가지 반만……" 이렇게 시비하는 사이에 물고기는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뭍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기 때문이지요. 세상만사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탐심을 물리쳐야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수(變數)가 나 자신에게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공평할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이 나를 얼마나 공평하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소유는 별개입니다. 행복과 소유도별개의 것입니다. 미국의 재벌 록펠러도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 주급 3불을 받아 가지고는 하도 귀하게 여겨져서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세어보곤 했는데, 천하를 얻은 듯이 가슴 뿌듯하게 여기던 그 때 그 순간의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많은 재산도 다 내어놓겠다!" 그렇습니다. 록펠러의 이 말은 그냥 해보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거짓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행복이란 그 소유와 동행하는 것이거나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집사님 가운데 판사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두 남녀가 1년 동안 결혼생활 하다가 이혼을 하겠다고 왔는데, 왜 헤어지려 하느냐고 물어 보니, 결혼식 때 아내가 남편에게 준 선물이 '롤렉스' 시계가 아니었다는 데서 문제가 빚어진 것입니다. 신혼 여행을 가서 첫날밤을 맞았는데, 신랑이 자기가 받은 선물이 롤렉스시계가 아니어서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하다며 투덜거리자 주거니받거니 시비가 붙기 시작했고, 이런 시비가 결국 1년 내내 계속되어서 끝내 이혼까지 마음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스운 이야기로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 천덕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판사님이 신부를 보고 "롤렉스시계에다 생명을 걸고 행복을 두는 이런 남자하고 살아서 뭐하겠소? 헤어지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것을 깨닫기가 이토록 힘이 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태는 언제 가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어떤 문제에도 해결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40개쯤 되는데, 그 중에서 16개가 돈과 소유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하워드 헨드릭(Howard Hendrik)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보다 돈에 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소유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소유하는 것만큼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그릇된 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행복도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깨닫고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요컨대 내 소유 안에서 얼마나 질적으로 행복을 창조하느냐---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셨다(눅 12 : 16-20, 공동번역성서 )."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문제를 처음부터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 해서 그것이 다 '내것'인 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또한 재산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재산을 바로 보존하는 길은 베푸는 데 있습니다. 바로 쓰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다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끔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마는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먹어버렸으니 내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내 앞에 차려진 밥상에 놓인 것도 내 입으로 떠 넣기 전에는 아직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자유롭게 쓴 것---그것만이 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 쌓아 두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만 넓히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큰 착각인데, 더구나 이것을 가지고 향락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향락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의 큰 잘못이요,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라고 하는 소유격이 한글 성경에는 세 번 영어 성경에는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네 번 나옵니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 이 이기적인 생각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종말론적인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수의(壽依)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주먹을 쥐고 나온답니다. 온 세상을 손안에 쥘 것처럼……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에는 손을 펴고 간답니다.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간다고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생명 문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요, 인격이, 양심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하지 못한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늘나라 천국에 재물을 쌓아 둘 줄 아는 사람, 바른 소유의 지혜를 가진 사람---그런 사람이 바른 사람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말씀에 깊이 귀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사람의 행복도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로서 오는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그 영광만이 영생의 의미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유업을 나누게 하소서 (누가복음 12장 13~21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루는 링컨 대통령이 아침 산책을 나섰다가 때마침 두 어린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 세웠습니다. 아주 귀엽게 생긴 이 어린이들은 서로 형제간이었습니다. 링컨은 손에 쥐고 있던 호두 세 개를 동생 되는 어린이에게 주면서 둘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라고 일렀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은 형에게 그 중의 한 개를 건네주면서 말합니다. "대통령께서 내게 주셨으니까 내가 두 개 갖고 형은 한 개만 가져." 그러나 형은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안 돼. 나는 형이니까 두 개 가지고 너는 동생이니까 한 개만 가져야 돼."이래서 그때까지 사이좋아 보이던 형제가 그만 대통령 앞에서 다투기 시작합니다. 링컨은 '이거 괜한 것을 주어서 싸움을 붙여 놓았구나' 하고 난처해했습니다. 그 때 장관 한 분이 다가와 묻습니다. "각하, 저 아이들이 왜 싸웁니까?" 대통령이 대답합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세계 문제로 싸우고 있다오. 국제 문제로 말이오."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세계 문제는 결국 이 어린이들처럼 서로가 조금 더 먹자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배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GNP가 1,500불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적 빈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지만 1,500불에 가까워 오면서부터는 상대적 빈곤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GNP가 얼마나 높아져야 문제가 해결되나 궁금해서 더 읽어보니까, 그 논문은 끝에 가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즉 GNP가 1,500불을 넘어서면 사람들이 잘살아 봐도 별것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기 시작하고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이 분배 문제 및 상대적 빈곤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논문의 추측이 제대로 들어맞을지 어떨지, 어디 두고 보도록 하십시다.
절대적 빈곤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입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상대적 빈곤이라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에는 먹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마는, 사실은 배고픈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오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생활 수준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집이 없이 이리저리 셋방살이 다니는 사람들은 비록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이 소원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조그마한 내 집을 가지게 되면 이번에는 남의 큰 집에 비해 너무 초라한 내 집이 못마땅해집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배가 고프다든지 하는 육신의 고통이지만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마음의 아픔입니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몸이 죽고 상대적 빈곤에서는 기가 죽습니다. 마음이 죽고 기가 죽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들이 우리 앞에 첩첩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내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 안정되고 보면 그 다음에는 또 정신적 문화적 빈곤의 문제가 고개를 쳐듭니다.
아울러 더욱 엄청난 문제, 곧 도덕적 빈곤의 문제가 밀려옵니다.
알코올과 마약이 인성(人性)을 파괴합니다. 복마전(伏魔澱)을 능가하는 온갖 퇴폐와 타락이 판을 칩니다.
도덕적 빈곤의 문제와 아울러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소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복지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예배당은 크게 지어 놓았는데 교인은 없습니다. 교회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멀리 내다볼 때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살아 보세' 하고 경제 문제만 풀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상대적 빈곤의 문제, 인권 문제, 문화적 빈곤의 문제, 도덕적 빈곤의 문제, 나아가 영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겹겹이 가로놓여 있음을 예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형제가 분배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생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遺業)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고 말합니다. 분배 문제에 대한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알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형에게 명령을 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변수(變數)는 내게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앞에 놓고 "내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지를 않고 "저 사람들을 감동시켜 움직여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들 요구하고 있습니다.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좀 조용히 있어 달라고 합니다. 없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마음을 좀 고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은 가만히 둔 채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변화됨으로 해결이 있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에 어려운 문제가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생이라는 자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와서 그런 식으로 나오자 예수님께서는 직접 개입을 거부하십니다. 주님은 더 근본적이고 깊은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본문의 내용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습으로는 형제가 유산을 나누는 경우, 형이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3분의 1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왜 분배 문제가 대두되고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경우입니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문제될 것이 없겠는데 유언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형이 유산을 제 마음대로 움켜쥐고 앉아 동생한테는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둘째로, 형이 형 노릇을 못하여 평소에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다면, 이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 몫의 두 배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이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으니, 동생으로서는 자기가 형보다 많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형제가 둘 다 부모를 모시지 않았던 경우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이 자기 몫의 두 배를 차지할 이유가 없으니 반씩 나누어 가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자, 이제 묻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하겠습니까? 이 형제가 어떻게 분배를 해야 올바른 분배라 할 수 있을까요? 관례를 따르기도 애매하고, 법을 따르자니 그도 분명치 않고, 현실적으로도 어떻게 해야 합리적일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좀처럼 쉽게 풀 수 없는 답답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시온 산언덕, 예루살렘 성전의 터전에 얽힌 전설입니다. 농사 짓는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혼자서 살고, 동생은 딸린 식구가 여럿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각자 추수를 해서 밭에다 보릿단을 잔뜩 쌓아 두었습니다. 동생은 혼자 사는 형이 측은해서 밤중에 몰래 자기네보릿단을 형네 밭으로 많이 옮겨 놓았습니다. 형은 동생네 식구가 많은 것을 생각해서 역시 밤을 타 자기네 보릿단을 동생네 밭으로 꽤 많이 옮겨 놓았습니다. 서로가 이렇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 보면 보릿단의 분량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서로가 또 그렇게 하다가 결국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혼자서 쓸쓸하게 살아가시니 양식이라도 많이 있어서 여유를 가지고 사셔야 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보릿단을 보태드리려고 했습니다." 하고 동생이 말하자 형은 말합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딸린 식구가 많으니 나보다 양식이 더 넉넉해야지." 마침내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형제 사랑을 기리어서 그 밭에다 성전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저는 대학에서 늘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30년 해 오면서도 간간이 마음 아프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시험지 채점할 때가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남에게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시험지 채점은 남을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하지 않을 수 없는 판단 행위인 것입니다. 게다가 답안이 주관식으로 된 것이라서 제 생각에 따라 A학점도 주고 B도 C도, 그리고 낙제점도 주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남을 평가할 때마다 '이거, 내가 공평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회의(懷疑)를 하게 됩니다. 전부 100점을 주면 가장마음이 편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야 없지 않습니까? 공부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점수를 많이 주고 공부를 게을리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낙제점을 주어야지요. 당연한데도 역시 회의는 남습니다.
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말 공정한 것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공평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또, 공평하다고 해서 모두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까? 말은 쉽지만 '공평(公平)'이란 그렇게 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진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탐심(貪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탐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아무리 공평하게 분배해주어도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탐심이 있는 한에는 어떤 경우도 공평하다고 수긍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십계명에서도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그리고 탐내지 말라---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어떻게든 제거한 다음에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그래야만 공정한 분배도 성립하고 공평한 것을 공평하다고 수긍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옛 중국의 제나라에 금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시장 바닥에 금을 펼쳐 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와 넋빠진 듯 금을 들여다보더니 다짜고짜 금을 한 덩이 집어들고는 냅다 달아납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하는 시장 바닥이니 얼마 못 가서 젊은이는 붙잡혔습니다.
관가에 끌려가 재판을 받는데, 재판장이 묻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서 그걸 들고 달아나는 바보가 어디 있나!" 이에 도둑은 천연스럽게 대답합니다. "금을 보는 순간, 내 눈에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습니다." "저런, 쯧쯧……" 그러므로 몹쓸 것이 탐심입니다.
탐심이 있는 한, 의(義)도, 나라도, 겨레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도 장래의 일도, 진리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못 보게 됩니다. 탐심의 노예가 되면 이처럼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격도 이성(理性)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탐심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는 공평이고 평등이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의 단평란에 인용된 이야기 한 토막을 읽고 혼자서 한참 웃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질을 갔어요. 푸른빛을 띤 이상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았습니다.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애원을 합니다.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줄 터이니 나를 도로 놓아주십시오. 나는 용왕의 아들이어요." 낚시꾼은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놓아주지" 하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안 됩니다. 세 가지밖에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럼 네 가지만." "세 가지밖에 안 됩니다.""그럼 세 가지 반만……" 이렇게 시비하는 사이에 물고기는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뭍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기 때문이지요. 세상만사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탐심을 물리쳐야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수(變數)가 나 자신에게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공평할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이 나를 얼마나 공평하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소유는 별개입니다. 행복과 소유도별개의 것입니다. 미국의 재벌 록펠러도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 주급 3불을 받아 가지고는 하도 귀하게 여겨져서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세어보곤 했는데, 천하를 얻은 듯이 가슴 뿌듯하게 여기던 그 때 그 순간의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많은 재산도 다 내어놓겠다!" 그렇습니다. 록펠러의 이 말은 그냥 해보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거짓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행복이란 그 소유와 동행하는 것이거나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집사님 가운데 판사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두 남녀가 1년 동안 결혼생활 하다가 이혼을 하겠다고 왔는데, 왜 헤어지려 하느냐고 물어 보니, 결혼식 때 아내가 남편에게 준 선물이 '롤렉스' 시계가 아니었다는 데서 문제가 빚어진 것입니다. 신혼 여행을 가서 첫날밤을 맞았는데, 신랑이 자기가 받은 선물이 롤렉스시계가 아니어서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하다며 투덜거리자 주거니받거니 시비가 붙기 시작했고, 이런 시비가 결국 1년 내내 계속되어서 끝내 이혼까지 마음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스운 이야기로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 천덕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판사님이 신부를 보고 "롤렉스시계에다 생명을 걸고 행복을 두는 이런 남자하고 살아서 뭐하겠소? 헤어지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것을 깨닫기가 이토록 힘이 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태는 언제 가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어떤 문제에도 해결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40개쯤 되는데, 그 중에서 16개가 돈과 소유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하워드 헨드릭(Howard Hendrik)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보다 돈에 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소유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소유하는 것만큼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그릇된 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행복도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깨닫고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요컨대 내 소유 안에서 얼마나 질적으로 행복을 창조하느냐---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셨다(눅 12 : 16-20, 공동번역성서 )."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문제를 처음부터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 해서 그것이 다 '내것'인 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또한 재산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재산을 바로 보존하는 길은 베푸는 데 있습니다. 바로 쓰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다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끔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마는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먹어버렸으니 내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내 앞에 차려진 밥상에 놓인 것도 내 입으로 떠 넣기 전에는 아직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자유롭게 쓴 것---그것만이 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 쌓아 두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만 넓히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큰 착각인데, 더구나 이것을 가지고 향락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향락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의 큰 잘못이요,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라고 하는 소유격이 한글 성경에는 세 번 영어 성경에는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네 번 나옵니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 이 이기적인 생각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종말론적인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수의(壽依)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주먹을 쥐고 나온답니다. 온 세상을 손안에 쥘 것처럼……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에는 손을 펴고 간답니다.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간다고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생명 문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요, 인격이, 양심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하지 못한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늘나라 천국에 재물을 쌓아 둘 줄 아는 사람, 바른 소유의 지혜를 가진 사람---그런 사람이 바른 사람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말씀에 깊이 귀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사람의 행복도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로서 오는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그 영광만이 영생의 의미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자기 극복이다(고린도전서 13장 1절~7절) (0) | 2024.11.07 |
---|---|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장 1절~10절) (0) | 2024.11.01 |
효도에 약속된 복(잠언 4장 1절~9 절) (0) | 2024.11.01 |
일하는 자의 복(요한복음 6장 26절~33절) (0) | 2024.11.01 |
분복을 아는 자의 지혜(전도서 5장 10절~20절) (0) | 2024.1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