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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에 이르는 훈련 (디모데전서 4장 6절~16절)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 James Abram)가 하이럼 전기공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입니다. 어떤 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건의를 한 가지 하였습니다.
"제 아들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보니 이 학교에서는 공부를 너무 심하게 시키는 것 같습니다. 교과과정을 좀 단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학생들이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한 가필드의 대답이 유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 쓰시고자 하실 때에는 백 년을 두고 키우십니다. 호박 하나를 키워내는데는 불과 한 달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 재단 이사장은 말문을 닫은 채 돌아갔다고 합니다.
현대 생활의 중요한 특징이 오토메이션(Automation)입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하고 있습니다. 점점 편해지고 있습니다. 편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기계로 작업하고 자동차, 비행기를 타고 다닙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옛날사람들은 억울하겠구나. 이렇듯 편리하고 신통한 것들을 모르고 살았으니……' 과연 우리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엄청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을 돌려서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살던 시골의 고향에는 동네 한가운데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습니다. 땅에서 마구 솟아오르는 물이 그대로 바다를 향해 흘러갑니다. 둥그렇게 만들어놓은 이 연못의 물은 더없이 맑고 좋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물을 길어다 먹었습니다. 자기 집에 우물을 파놓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저를 마흔 한 살에 낳으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였으니까요. 어머니는 벌써 연세가 높으셨지만 그 어머니를 도와 물을 길어올 사람이라고는 저밖에 없었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물동이를 이고 지는 것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안돼서 제가 나서서 물을 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에 물통이 달린 물지게를 지려면 균형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뒤뚱거리면서 아침마다 세 차례씩 물지게를 지고 가서 연못의 물을 길어오다 보니 차츰 익숙해져서 마침내는 물지게를 지는 데 선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세 지게를 길어다 큰 독에 채워놓으면 어머니께서 참 흐뭇해하셨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효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는 수고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물 길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사이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듭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고작 해서 효도관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효도입니까? 돈 몇 푼 쓰는 것으로 효도가 되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새는 몸을 움직여서 할만한 효도가 없습니다.
요즘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학교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학에 잘 들어가면 그것도 효도가 됩니다. 저는 입학하는 학생들보고 축하인사 할 때에 말합니다. "너 정말 큰 효도했다!" 칭찬인지라 좋아합니다. 내가 내 공부한 것 가지고도 효도가 됩니다. 아무튼 요즘은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서 이렇다하게 할 것이 없습니다. 효도할 것도 없고 효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편리해진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모든 일에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이렇다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남편이 부인을 위해 선물을 사왔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은 오히려 면박을 줍니다. "이런 걸 뭣하러 사왔어요?" 하고 영 시덥잖아합니다.
사랑의 징표가 없는 세상입니다. 심볼(symbol)이 없습니다. 살기는 넉넉합니다. 편리합니다. 대신에 사람은 못되어갑니다. 인간성이 못되어갑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편리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보아도 차를 타고 다니느라 활동이 적기 때문에 점점 병약해집니다. 다리를 쓰지 않아 배만 볼록 나오고 다리는 점점 가늘어집니다. 조금만 부딪쳐도 뚝하고 부러집니다. 힘이 빠진 까닭입니다. 걷지 않아서입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1년 동안만 걷지 않아도 아주 걷지 못하게 됩니다. 쓰지 않는 부분은 다 약해지는 법입니다. 몸, 정신, 도덕성, 심지어는 심령까지도 약해집니다. 형편없이 빈약해집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계산기는 똑똑 누르기만 하면 복잡한 계산을 정확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아이들의 암산력이 마비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아이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 영어는 못할지언정 수학은 만점을 받았습니다. 수학의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미국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전자계산기 누르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암산을 못합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머리는 자꾸 써야만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 쓰는 것이 귀찮다고 그저 누르는 것만 알아서야 되겠습니까?
인격의 성장에는 결코 마술적인 변화(magical change)가 없습니다. 사람이 점점 향상하는 변화,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것은 그렇게 마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보면 한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확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치 마술사들이 '얏'하는 기합으로 보자기 속에서 계란도 나오게 하고 비둘기도 나오게 하듯이 만사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무엇인가 이적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공부를 안 했으면서 시험 잘 보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가하면 기계적 변화(mechanical change)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주의 신앙입니다. 모든 것이 이론대로만 되고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만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여기에 매여서 문제를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건이 문제다, 가난하니까 악해지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절망한다, 이렇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환경에 돌립니다.
그래서 환경을 좋게 해달라고 소원합니다. 이것은 유물주의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인격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것이 많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더 강해지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더 진실해집니다. 환경이나 여건으로 모든 것을 미루어보려는 생각은 역시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발전하느냐, 어떻게 변화하느냐,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나느냐---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충실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한 결과는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인내와 이에 따르는 고통은 싫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수고 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만을 바라며 그에 따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원하지를 않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고는 그 목표에 달할 수가 없습니다. 인내와 고통, 이 수고가 있고야 그 결과가 따르는 것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사람, 가을의 추수는 바라면서 땀 흘리기는 싫어하는 농부, 이것이 바로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급함이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급함 그 자체가 마귀다.' 무엇을 급하게 바라는 마음, 너무 쉽게 바라는 마음, 이 조급한 마음 그 자체가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8절)."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는 goodness, 선하다는 뜻입니다. 기쁘다는 말도 되고 복이라는 말도 됩니다. '세베이아'는 놀랍다, 두렵다고 하는 말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선한 응답, 공포에 대한 선한 응답이 바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단어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경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마음이 아니요 두려워하는 마음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하나님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사랑이 언제나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남편의 마음에 아픔을 줄까 해서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두려움입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혹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해서 함부로 말을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과 두려움이 항상 공존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될 때에 참으로 그를 두려워합니다. 형벌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요 저주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의 능력 앞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대하게 됩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 경건을 다른 말로 '영성 개발'이라고도 하고, 심리학적으로는 '각성'이라고도 합니다. 이 경건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을 그로셸(Groschel)이라는 학자는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본문말씀과 퍽 흡사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세 단계로 발전합니다.
첫째는 정결함의 단계입니다. 우선 깨끗해져야 됩니다. 이것은 타락성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자면 자기부정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허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속에 엄청난 악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로마교인들에게 자신을 천명하고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이렇게 솔직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내 마음에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극과 극이다.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 오직 은혜로써만 내가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를 얼마나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디까지 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한번은 박목사님이라는 분이 오셔서 채플을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설교시간에 받은 은혜를 아직까지 못 잊고 있습니다. 박목사님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간증 삼아 하셨는데 앞으로 목사 될 사람은 조심하라며 해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모님이 암으로 고생하여 무려 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생을 다한 것 같고 썩은 내마저 나는 부인을 속수무책으로 놔둘 수가 없어 효험이 있건 없건 무슨 약이든 달여다가 매일 아침마다 대접합니다. 그날도 정성껏 달인 약을 짜서 사발에 담아 들고 문턱을 넘어서는데 이상한 생각이 납니다. '이럴 바에야 빨리 죽기나 할 것이지, 뭣하러 오래 살아서 남을 고생시키는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왜 이러나?' 그는 죄스러운 마음이 되어 부인에게 약사발을 줍니다. 그런데 그 약을 먹고 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목사님은 펑펑 우십니다. '어찌하여 내가 8년 동안 좋은 마음으로 대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르러 나쁜 마음을 가졌던가'하는 참회의 눈물입니다. 빨리 죽어라 하는 마음, 곧 살인하는 마음을 가졌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없었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느 정도 진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얼마나 악하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됩니다. 살인자가 따로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단 인정해야 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울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물으신다면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더 나아가 의로우려고 하는 그 의지마저 깨끗이 포기해야 됩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정결함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용서 못 받을 죄인이로소이다 --- 여기서부터 경건이 시작됩니다. 아무도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따타부타 세상에 대하여 따질 말이 전혀 없습니다.
이 때에야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고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밝아짐의 단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 모든 죄와 고통과 불안에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 단계, 해방의 단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확실한 계시를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모든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이 자유함의 단계가 경건입니다.
셋째는, 한 걸음 나아가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과 그 모든 역사를 조금도 불평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게 오신 주님을 영접하면서 주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음을 깊이 깨달으면서 감사하게 되는 '감사'와 '기쁨'의 단계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일치의 단계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이 경건에 도달하기 위하여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운동선수, 육체를 훈련하는 사람들과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연습하라'는 헬라어로 '굼나조'입니다. 이 말을 제가 인용하는 이유는 체육(gymnastics)이라는 단어가 이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굼나조 --- 연습이요 훈련입니다. 운동선수가 훈련하는 것은 정신적인 훈련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전심전력해야 됩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몸의 건강을 위하여 '조깅'을 합니다. 조깅은 산책이 아닙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면서 조깅한다고 합니다마는 제가 자세히 책을 읽어보았더니 원래 조깅이라는 것은 귀에 바람소리가 윙윙 나도록 걷는 것이라고 합니다. 산책과 조깅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지팡이 짚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고 운동이 되겠습니까? 귀에 바람소리가 윙윙 나게 걸어야 운동이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운동입니다.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순종하는 연습입니다. 제발 말 좀 그만 합시다. 현대는 PR시대라고 해서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실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지식(knowledge), 수용(acceptance), 연습( practice)의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먼저 이치에 맞으면 납득을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동의를 하고 수락합니다. 그 다음에는 익숙해질 때까지 훈련을 합니다. 반드시 훈련을 해야 됩니다. 행동이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전부가 헛것입니다. 흔히 우리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실험실에서 공부한 것은 없고 그저 교과서만 줄줄 외도록 교육하였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동, practice가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행동으로 옮겨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깨닫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이론으로 훈련합니까? 몸으로 익힙니다. 이것이 훈련입니다.
셋째는, 계속적인 훈련입니다. 시간, 경력(career)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몇 년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해보면 압니다. 처음 2, 3년 동안은 무척 힘듭니다. 그러나 한 10년쯤 타고나면 운전을 즐기게 됩니다. 결코 노동만은 아닙니다. "목사님, 피곤하실 텐데 운전기사를 두시지요?"하고 가끔 제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을 왜 남한테 줍니까?" 제가 운전을 18년 간 해왔습니다. 운전이 즐거워지려면 이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노동이라고 해도 많은 경력이 쌓이면 내게는 그것이 즐거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연륜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 진리를 더욱 잘 압니다. 한번의 경기를 위하여 얼마나 수고합니까? 많고 많은 시간을 애를 쓰며 훈련을 쌓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권투시합 하는 것을 가끔 보면 아나운서가 해설하는 내용이 참 재미있습니다. 권투선수들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보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연습량에 따라 저절로 손이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손이 저절로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 기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갈 수 있을 만큼 긴 훈련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는 응답이 있다 없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10년을 하루같이, 20년을 하루같이 꾸준하게 신앙의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훈련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어 40년 동안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40년 동안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자로 키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신앙과 함께 언덕 위에 놓여 있는 수레와 같아서 위에서 끌지 아니하면 밑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이 점점 적어집니다. 신령한 욕구가 상실됩니다.
마음이 점점 나태해져 죄에 대한 경각심이 점점 흐려집니다. 그 다음에는 죄를 변명하는 사람이 되고 세상 유혹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줄기차게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는 버리는 훈련입니다. 정욕과 세상 것을 버리는 훈련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7절)"라는 말씀 그대로 늙은 여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떠드는 허탄한 신화,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는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훈련이요 충성의 훈련이요 순결의 훈련입니다. 아가페(agape), 로열티(loyalty), 퓨어리티(purity)의 훈련입니다.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누구까지 사랑할 수 있느냐, 사랑을 훈련합니다. 충성을 훈련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정결할 수 있는 정결을 훈련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우리의 경건의 진보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진보를 나타내는 성숙한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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