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화의 갈림길
눅6:20-26
(2014/10/19)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 본문의 배경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전 생각이 막혀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함석헌 선생님이 내셨던 <씨알의 소리> 영인본을 붙잡았습니다. 함 선생님이 책머리에 쓰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찾아 읽다가 이런 인사말과 만났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1974년 6월호에 나온 글입니다. 엄혹했던 시기,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던 때 함 선생님은 독자들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인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속에 편입된 이후에 제 정신을 차리고 살기 참 어렵습니다. 신분사회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값을 매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돈이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습니다. 너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과제일 텐데, 우리는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치부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이고 인간의 전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본래 우리 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다 잃어버리고, 때가 되면 시들 수밖에 없는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느라 분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물이 날 뛸 때 우리도 날뛰고, 바람이 외칠 때 우리 마음도 따라 비명을 지르곤 합니다.
이러면 정말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삶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대비하여 평지설교라고 부르는 단락의 첫 대목입니다.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은 날이 밝아올 무렵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셨습니다. 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전위대가 조직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 서시자, 큰 무리의 제자들이 다가왔습니다.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으려고 몰려왔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통해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에게 고통을 받던 이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 이상한 복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20-23)
네 가지의 복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대개의 서양말이 그런 것처럼 헬라어 원어를 번역하면 우리 말과 어순이 반대가 됩니다. 첫 번째 복만 원어의 순서대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복이 있다'는 선언이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단언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구가 반복되기에 강렬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스'를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셨던 김교신 선생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 안에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도를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김교신 전집4, <성서연구>, 노평구 편, 제일출판사, 1991, p.32).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요즘으로 치면 영 복 같지 않은 복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요? 이것은 오히려 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지금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보다는 상처를 받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마치 주님이 불의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엄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 때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네 가지의 복은 24절부터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선포를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은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24-26)
이 대목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언급됩니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 이 구절도 얼핏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감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려면 상상력이 조금 필요합니다. 여기서 화가 있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타자' 혹은 '이웃'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남과 공감할 줄 모릅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이 맞이할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옛 어른들은 어쩌다가 고기를 구워 먹으려 해도 옆집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고기 연기가 담장을 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바나나 하나만 먹어도 옆집의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서 그 껍질을 종이에 싸서 버렸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염려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출세가 모든 이들의 목표가 되면서 염치와 타자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원로가수 김용만 씨가 1964년에 발표한 '회전의자'는 이러한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아~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출세하기 위해서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밟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출세를 한 이들의 눈에 다른 이들이 보이겠습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내면화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속이 허한 사람일수록 허세 부리기를 좋아합니다. 지난 10월 7일, 우리는 압구정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경비 노동자로 일하던 54세의 이 아무개씨가 입주민들로부터 받은 수모를 견디지 못한 채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길래 그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입주민 가운데는 추석 선물이라며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벗어주는 이도 있었고, 유통 기한이 지난 쿠키를 선물로 건네는 이도 있었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 상태가 잘 되어있지 않다면서 폭언을 하고, 5층에서 음식을 던져주며 '어이, 경비. 이거 먹어'라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대할 때마다 사탄의 냉소적인 웃음을 본 듯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크기를 자기 존재의 크기로 생각합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인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웃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삶은 병든 삶입니다. 그런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회대학교의 김찬호 교수는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우리 사회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성이 사회적 관성으로 고착"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진정한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대체 누구이길래 하나님의 작품인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그런 이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조금의 유보적 태도도 없습니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부유한 사람들, 모든 배부른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사람들, 그들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행복을 누리려는 이들의 운명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 희년을 살아내는 삶
주님은 반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십니다. 가난함 자체가 복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나 명예에 의지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이들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난하기에 다른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 자기도 아팠던 경험이 있기에 지금 고통당하는 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여러 날 굶주린 아이의 천막을 방문하여 음식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음식을 들고 어디론가 나갔다 돌아왔습니다. 어디 다녀왔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기 친구도 여러 날 굶었기에 음식을 나누어 먹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나사렛 회당에 가셨을 때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주님의 영이 내렸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년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언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다가올 때 과연 이 길을 계속 가야할지 주춤거리게 됩니다. 본능적 반응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가함으로 그 꿈을 무지르려 합니다. 감시하고, 위협하고, 가두고, 죽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길을 걷다가 겪는 시련을 그저 참아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나같이 작은 사람이 예언자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런 생동감입니다. 명랑하게 싸워 이겨야 합니다. 찬송가 487장이 떠오릅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잊지 마십시오. 진정한 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은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누릴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모두가 욕망의 벌판을 달리고 있지만, 이제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곳을 생명과 평화의 벌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추수할 때가 이미 다가왔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의 열매를 거두는 성실한 추수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10월 19일 12시 01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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