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찾아라 사1:10-17 (2014/10/26, 종교개혁기념주일)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7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 'reformation'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에 가깝습니다. 이 단어는 '다시'를 뜻하는 're'와 '형성'을 뜻하는 'formation'이 결합된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얼키고설켜 시종과 본말을 구분할 수 없게 된 당시의 기독교를 철저히 다시 사고하고, 다시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기존 질서로부터 특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이 볼 때 개혁자들은 평지풍파를 만들어내는 불순분자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황은 파문교서에서 루터를 가리켜 주님의 밭을 망치는 '멧돼지'라고 조롱했습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물러설 줄 몰랐던 루터의 저돌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그 표현이 전혀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루터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풀지 못해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롬1:17)라는 구절과 만났고, 그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번민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의인'은 행위가 올바른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임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법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의 '탑 체험'이라 일컫습니다. 탑에 있는 골방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붙인 이름입니다. 탑 체험을 저는 마음 깊은 곳에 기둥 하나가 세워진 것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똑바로 선 기둥은 어떤 무게가 얹혀도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탑 체험을 거울로 삼아 당시의 교회를 비춰보자 문제투성이였습니다. 특히 루터를 분노하게 했던 것은 면벌부(indulgence) 판매였습니다. 흔히 면죄부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은 죄가 아니라 벌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면벌부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면벌부의 문제는 '은혜'가 아니라 '공적'을 구원의 길로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추론이지만 돈만 많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언제라도 면벌부를 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베드로 대성당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고안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종교가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금도 변형된 면벌부가 교회에서 발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관인이 찍힌 문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는 면벌부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의 눈을 빌어 오늘의 현실을 가늠해보려 합니다. • 쭉정이 종교 이사야는 그 첫 장부터 매우 신랄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죄를 꾸짖습니다. 조금의 유보도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청한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의 패역한 삶을 고발합니다.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사1:4)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시대를 부패와 폭력에 찌들었던 노아 시대와 다를 바 없이 묘사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거칠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 언어가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당도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일까요? 이사야의 비판이 겨누는 것은 지도자들만이 아닙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욕망의 법을 맹종하고 있었습니다. '소돔의 통치자', '고모라 백성'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소돔의 죄를 '남색'에서 찾으려 합니다. 남색(sodomy)을 뜻하는 단어가 소돔에서 유래된 것만 보아도 그런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타자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세태에 분노하셨습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보편 질서에 속합니다. 이웃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이 엄중한 사실 하나만 명심해도 세상이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현실은 소돔과 고모라인데 종교적 열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으로 나아가 즐겨 제물을 바칩니다. 수양을 불살라 바치고, 살진 짐승의 기름과 피를 바칩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복과 화를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비위를 맞춰드려야 할 분이 아닙니다. 비위만 맞춰드리면 어떤 행동을 하든 오불관언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이 배제된 종교 행위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지적하면서 '지겹다',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사를 바치러 나오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나의 뜰만 밟을 뿐'(12)이라고 냉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불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만 가중시킬 따름입니다. • 지치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이들이 바치는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 이르십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저자는 우리가 바치는 봉헌물 가운데는 교회 재정 장부에는 기록되지만, 하나님께는 이르지 못한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헛된 제물'이란 그런 것일 겁니다. 하나님은 돈에 굶주린 분이 아닙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날을 정하여 바치는 예배도 가증하다고 하십니다. 초하루, 안식일, 대회로 모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날들을 지키면서 악을 행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13) 교회에서 혹은 연합회에서 이런 저런 집회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참된 복음이 선포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옷 두 벌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과 옷을 나누고, 세상이 만들어낸 분리의 빗금들이 철폐된다면 하나님도 춤추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웃음거리고 만들고, 헌금을 강요하고, 그것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차마 그런 현실을 참아내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을 가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의 손에서 주님은 피를 보고 계십니다. 마치 땅에서 외치는 아벨의 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저는 해방신학자 성정모 교수의 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유려한 언어로 분석해냈습니다. 제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이들이 종교적인 언어를 차용하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였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시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알고자 하는 것이 혼란을 만들어낸다'. 선악과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말고 시장의 기능을 믿어라. 그러면 최선의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장에 대한 믿음으로 대치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면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이제는 쇼핑센터를 찾아갑니다. 쇼핑센터는 이미 종교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쇼핑센터에 가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쇼핑센터 건물에 종교적 건축의 대명사인 아치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용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는 우리 손에 묻은 피를 씻으라고 요구합니다. 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손이 더러워졌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선택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그런 삶에 동조 혹은 방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죄로 얼룩진 우리 손을 씻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욕망은 힘이 셉니다. 무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힘을 발휘합니다. 욕망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며칠 전 미국에서 오신 어느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 곁에 다가가 그들을 삶의 든든한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과거에 미국에서 사업을 할 때 그분은 골프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골프를 치지 않습니다. 확고한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 재미 있어서 그만 골프를 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행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지속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사야는 악한 행실을 버리고 옳은 일 행하는 것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논어의 첫 대목은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입니다. 열심히 배우고 또 그것을 시시때때로 몸에 익게 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악한 행실을 버리고 옳은 일 행하는 것을 날마다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실한 신앙인은 못됩니다. 그 배움의 방향은 명백합니다.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라'.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믿음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종교개혁 기념 주일인 오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삶을 지시하고 계십니다. 힘겹더라도 그런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행복을 맛볼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껍질만 남은 종교성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믿음 생활하고 있다는 헛된 자기 위안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삶으로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교회가 먼저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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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10월 26일 12시 06분 25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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