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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실천적 무신론자들 -시14:1-7

by 【고동엽】 2022. 7. 5.
실천적 무신론자들
시14:1-7
(2014/9/28)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크게 두려워한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 윤똑똑이
주님의 은총 속에 한 주간을 보내고 우리가 다시금 모였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많은 이들과 만났고, 꽤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 삶이 이웃들에게 선물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하며 사셨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좋겠지만 저는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취향과 지향이 다르다는 말일 겁니다. 인간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가 될 터인데 문제는 '사이'입니다. 그 사이가 너무 벌어져도 문제고 틈 없이 달라붙어도 문제입니다. 사이가 적당한 것을 일러 '사이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좌절합니다. 맥없고 위축된 듯 보이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한 사람을 보면 슬며시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도 자리 자리에 태산처럼 든든히 서있는 이들을 보면 안도감이 느껴지고,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답답해집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사물에 어둡고 지능이나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어리석다의 옛 말은 '어리다'입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어리다'라는 형용사에 다른 말 밑에 붙어서 사람과 사물을 뜻하는 의존명사 '이'가 결합된 말입니다. 어린이라는 말 속에는 어리석다는 뜻이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는 셈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참견이 귀찮을 때면 '어린 게 뭘 안다고!' 하면서 무질러 버리곤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공부 못하는 사람, 아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유한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인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뻔뻔하고 건방진 자'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theoretical atheists)이 아니라, 유신론자를 자처하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 즉 실천적 무신론자들(practical atheists)입니다. 그들은 자기로 가득 차 있어서 남을 위한 여백 없이 살아갑니다. 남들이야 고통을 받든 말든 나만 평안하면 그만입니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도 꺼리지 않습니다. 윤똑똑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거칠어집니다. 윤똑똑이는 '저만 잘나고 영리한 체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윤똑똑이들의 행태가 마뜩찮아 혀를 차는 사람들이 보이는 듯합니다.

• 과녁을 빗나가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실을 시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1b)

언어에 예민한 분들은 알아차렸겠지만 바로 앞에 나오는 '하나님이 없다 한다'는 구절과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구절이 '없다'는 단어를 통해 서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이 바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속속들이 썩은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수인 세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2-3)

땅을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라는 구절은 기대감을 부풀게 하지만, 3절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일축하며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른 길로 빗나갔고, 하나같이 썩었기 때문이랍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죄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타(chattath)입니다. 이것은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어떤 과녁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란 그러니까 그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빗나간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는 것, 누군가의 동료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만화가 찰스 슐츠(Charles M. Schulz)의 <피너츠>(Peanuts)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소년 찰리 브라운이 담벼락을 향해 활을 쏩니다. 그리고는 담벼락으로 달려가 화살이 맞은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과녁을 그립니다. 그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슐츠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우리의 버릇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의 특색은 '자기'에 붙들려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늘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짐을 나눠지기 위해 몸을 낮춥니다. 그런 실천을 통해 더 깊은 우주심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중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꾸만 더 큰 세계를 향해 길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영혼의 확장이 아니라 축소로 나타납니다. 신앙의 왜소화입니다(thinned out faith). 이 시에서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고 있는 '썩음', '더러움', '빗나감', '죄악'의 뿌리에는 자아 확장의 욕망이 있습니다. 제 욕심 차리느라 이웃을 괴롭게 하고, 제 욕망을 채우느라 소중한 이웃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만족을 구하느라 남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 대들어라, 부닥쳐라
시인은 묻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생각은 있어도 그렇게 살 내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세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너 혼자 잘난 척 해봐야 너만 손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 말에 저항하려고 애도 써보지만, 거듭되는 좌절은 우리를 자포자기적인 상태로 몰아갑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타협이 시작됩니다. 타협하며 산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완고함과 무감각으로 무장합니다. 무감각해지면 타인의 고통이 그렇게 아프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4b)

자기 잇속에만 발밭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라도 주님을 멀리합니다. 외국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불륜을 저지르려는 이들이 슬그머니 결혼반지를 빼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책감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익 앞에서 십자가를 슬쩍 내려놓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나 삶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입니다. 저 또한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함석헌 선생님의 '흰 손'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집니다. 장시의 일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 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주님의 피가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배지 않는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질문은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무뎌진 양심을 타격합니다. 함 선생님은 예수의 피가 묻어있지 않은 우리의 '흰 손'을 향해 말합니다.

"너 살고 싶으냐?/대들어라, 부닥쳐라./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대속이 무슨 대속이냐?//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그의 삶 네 삶 되기 위해/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정통이니 이단이니 날마다 따지지만 말고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이들은 낯설기 이를 데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다니는 이들, 이슬람권에서 온 아시안 게임 출전 선수들에게 성경책을 건네는 이들, 여성은 안수를 받을 수 없다며 신학대학원의 입학을 거부하는 신학대학교, 엄청난 빚을 지면서 지어진 화려한 예배당을 보며 예수님이 흐뭇해하실까요? 제게는 이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4b) 왜곡된 신앙의 위험을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은 선한 삶이 번성하도록 돕는 신선한 샘물이 되기보다 독이 든 우물이 되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악덕보다도 더 큰 해를 끼쳤다."(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Ivp, p.26)

• 징표로 서다
희망은 없는 걸까요? 모두가 다른 길로 빗나간 세상, 속속들이 썩어서 더럽게 된 세상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이들 말입니다. 광화문에는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잠든 양심을 깨우기 위해 30일 넘게 금식하며 기도를 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몸의 욕구를 거부하고,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고, 밤의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그들이 그 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일종의 몸부림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십사 비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몸으로 하는 탄원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말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크게 두려워한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5-6)

이 말을 믿습니다. 이 믿음조차 없다면 삶을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악자'와 '주님', '좌절시킨다'와 '보호하신다'가 마주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속들이 썩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좌절시키는 세상에서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십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은 잿빛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순간 희망의 빛이 움터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탄식에서 시작한 시는 구원에 대한 기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7)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잿빛 가슴에, 그리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현실 속에 자꾸만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생을 축제로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마다 '식탁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주님은 낯선 사람들이 함께 생을 경축하며 기뻐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속속들이 썩었다고 탄식만 해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적당히 길들여진 채 사는 것은 믿음의 배신입니다. 새로운 공간과 기운을 만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저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사19:19)

거대한 이집트 땅에 세워진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 그리고 돌기둥 하나는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허무에 굴복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이제는 실천적 무신론자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모신 사람의 당당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적중하는 화살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9월 28일 11시 58분 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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