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를 노래 신31:19-21 (2014/9/21)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여라. 이 노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뒤에, 그들이, 살이 찌도록 배불리 먹으면, 눈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업신여기고, 나와 세운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온갖 재앙과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한, 이 노래가 그들을 일깨워 주는 증언이 될 것이다. 비록 내가 아직 약속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전이지만, 지금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 노래에 담긴 시대정신 갑자기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하늘은 맑고 대기도 신선합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투표에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한 주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분리 독립안이 부결되었습니다만 세계 각지에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 사람들에게 분리 독립의 꿈은 쉽게 스러질 것 같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영연방에 속한 나라이지만, 수백 년 동안의 해묵은 갈등의 기억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마치 국가처럼 부르는 노래가 '스코틀랜드의 꽃'이라고 합니다. "오 스코틀랜드의 꽃이여/너와 같은 꽃을/언제 다시 만날까/네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위해/싸우고 죽어간 꽃이여/그리고 거만한 에드워드의 군대에 맞서/꿋꿋이 서 있던 꽃이여/그리고(침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낸 꽃이여" 이 노래를 부를 때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과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일 당시 조국을 위해 기꺼이 산화한 전사들의 거친 호흡을 느낄 것입니다. 1996년에 나온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14세기 초 영국 왕의 폭정에 저항한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국화로 여기는 꽃은 엉겅퀴(thistle)입니다. 거친 땅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꽃이기 때문일까요? 작가 서해성은 역사를 담고 있는 노래를 가리켜 "노래 부르는 이들을 가슴 깊은 전사로 빚어내는 용광로 같은 무형의 조국"이라 말합니다. "화살이나 총알과 달리 불발탄이 없는 것이 노래"(서해성, <300년 전쟁>, 한겨레신문 9월 13일 자 칼럼)라는 것이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지역에 따라 아리랑의 가락과 가사는 천차만별입니다. 짙은 한이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해학적이면서도 신명나는 것도 있습니다. 여하튼 부르는 노래가 운명이 되는 법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에 잠시 머물 때 공원 옆에 있는 야외 음식점에 앉아 아마추어 가수들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노래는 강건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애상의 느낌이 일체 배제된 노래를 들으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즐겨 듣고 부르는 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댄스곡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는 있는 곡들도 있지만 대개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은 있지만 공동체는 없습니다. 아픔과 죄에 대한 고백은 있지만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북돋는 노래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심을 북돋는 노래는 불온시 되기 일쑤입니다. 과거에는 그런 곡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노래들은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습니다. 노래는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시대 정신을 이끌기도 해야 합니다. • 풍요의 덫 오늘 본문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여라." 하나님은 모세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모세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기왕 자신이 시작한 일을 완수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견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싶지만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할 때 멈출 줄 모르면 교만해지게 마련입니다.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는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거둔 세속적 성공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로마 장군인 스틸리코는 부하들을 시켜 자신에게 매일 '모멘토 모리'(momento mori)라는 말을 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대중들의 환호를 받을 때 사람들은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환호는 덧없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스러질 수 있습니다.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기를 대단한 사람처럼 여기는 순간 그의 몰락은 시작됩니다. 환호 속에서 성찰적 지성을 발동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 수 없습니다. 얘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생의 정점에서 죽을 수 있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래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는 신명기 32장에 나옵니다. 모세는 그 노래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분노하실 때는 언제인지, 불의한 세상과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시는지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숙지하는 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런 노래를 지으시라고 하신 뜻을 아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을 속속들이 잘 아십니다. 요즘 들어 "주님께서는, 사람의 속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주님, 주님께서 꾸짖으시고 주님의 법으로 친히 가르치시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시94:11-12)라는 시편 구절을 자꾸만 곱씹게 됩니다. '사람의 속생각이 허무하다'는 말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실임을 저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질정(叱正) 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꾸짖어 바로잡아 주는 사람 말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꾸지람을 듣고, 주님의 법으로 친히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복이 많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백성들이 처하게 될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계십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뒤에, 그들이, 살이 찌도록 배불리 먹으면, 눈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업신여기고, 나와 세운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신31:20) 백성들이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원인이 여기 분명하게 적시되고 있습니다. '살이 찌도록 배불리 먹으면…'. 결국 문제는 배부름입니다. 만족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옛사람들이 동원한 수사는 '배부르고 등 따스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내 배가 부르고 내 등이 따뜻하면, 배고픈 사람들과 등 시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20:3)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은 다른 민족이나 부족들이 섬기는 신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하는 신들'입니다. 저는 가끔 한국 교회의 실상을 진단하는 자리에서 한국교회가 이 자리까지 전락하게 된 것은 부유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각인된 교회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부유하고 큰 교회들입니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대개 배부르고 등 따스한 이들입니다. • 심판 날의 도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가 지금 한국에 와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교회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닥친(직면한--인용자의 수정) 가장 큰 도전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때다. 나는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이 살아 숨 쉬고 진정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교회를 봐 왔다. 그들은 일종의 ‘신혼여행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교회는 그 다음 단계에서 삼성이나 코카콜라 같은 영속적 기관이 되고 말았다. 이들 기관은 사역을 위해 전문인을 고용하고 대형 건물을 세우며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하나님의 영은 한 곳에 담겨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모르는 바람처럼 움직인다. 리더들은 바람에 귀 기울여 듣고 분석하는 ‘기상 예보관’ 같아야 한다. 리더는 하나님께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그 바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민감해야 하며, 그의 목적과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필립 얀시, 2014년 9월 20일 자 국민일보 인터뷰) 부르신 목적을 잃게 될 때 교회는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마련입니다. 풍요는 삶에 안전을 더해주는 '닻'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욕망이 승하면 이웃 사랑이 사라집니다. 이웃 사랑이 사라지면 세상은 전장이 됩니다. 전장에서 사는 이들은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4:14)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욕망을 앞세운 이들의 운명이 이와 같습니다. 풍요의 덫에 걸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이들은 마치 물속에 있으면서도 물을 마시지 못하는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와 같습니다. 그는 신을 시험한 죄로 깊은 지하 감옥의 기둥에 묶인 채 턱 밑까지 차는 물속에 서 있습니다. 주변에는 탐스런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이면 물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배가 고파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가 휙 올라갑니다. 눈앞에 있지만 누릴 수 없다는 것, 그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행복의 신기루를 따라서 질주했는데, 남은 것은 허망함 밖에 없는 인생이 그런 것일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닥칠 재앙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호세아의 경고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호8:7)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것, '욕심'을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 이게 우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삶을 배우는 이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고도 깊어지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셨다고,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시지 않다고 원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입니다. • 햇볕 한 줌 같은 노래 그 날을 예고하는 것은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세가 지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노래는 끝없이 그 백성을 향해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과,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곤 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세우신 분,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눈동자같이 지키신 분(32:6, 10)이십니다. 노래를 통해 기억이 전승됩니다.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는 부르는 이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게 마련입니다. 모세의 노래를 거듭해서 읽다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떤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레퍼토리는 무엇입니까? '공부해라', '지지 말아라', '부자가 되어라.' 이런 것입니까? 어느 젊은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환경 미화원 아저씨를 가리키며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실종된 세상, 승자 독식 사회의 민낯입니다. 돈과 출세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과 겨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많이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돈과 출세가 지상목표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젊은 시절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어둠 산천 타오르는 작은 횃불 하나 될 수 있다면/우리의 노래가 이 잠든 땅에/북소리처럼 울려날 수 있다면/침묵 산천 솟구쳐 오를 큰 함성 하나 될 수 있다면/정말 좋겠네"(<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노래 마을) 그늘진 땅을 비추는 햇볕 한 줌과 같은 노래, 타오르는 횃불 같은 노래, 북소리와 같은 노래, 함성과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는 날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아 사람의 노래 평화의 노래/큰 강물로 흐를 그날 그날엔/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 지금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세상이 가르쳐주는 욕망의 노래, 개인의 상처만 보듬는 노래입니까? 함께 잘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어깨를 펴고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평화의 노래, 사랑의 노래입니까? 주님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라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궁극적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그 노래를 온 누리에 울려 퍼지게 만드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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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9월 21일 11시 59분 2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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