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 주어라 마10:5-15 (2013/5/5, 교회설립기념주일)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 따뜻이 감싸 함께 하려는 마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린이 날인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10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이 두 기념일을 통합하는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105년 된 나무에 봄이 되어 피어난 나뭇잎은 몇 살입니까? 어떤 분은 105살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분은 한 살이라고도 하시는군요. 둘 다 맞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뭇잎과 나무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측면에서는 105살이 맞고, 새 잎이라는 점에서는 한 살이 맞습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해 봄에 새 잎이 돋아나오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 잎은 그 나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르신들도 많지만, 아기들도 참 많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노소가 어울려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고 계시고, 중간층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성심껏 수행하고, 아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참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자족하는 순간 타락이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움을 향해 길 떠나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세상의 돌팔매질이 심상치 않습니다. 속상합니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교회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입니다. 이청준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50년대 전란 시절 어느 해 겨울, 한 미국인 선교사가 눈 덮인 시골길 다릿목을 지나가는데 교각 아래쪽에서 웬 갓난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선교사가 내려가 보니 한 남루한 여인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어 있는데, 그 품속에서 갓난쟁이 여자아이가 살아 울어대고 있었다. 추위 속에서도 아이가 살아남은 것은 그 어미가 자기 옷을 벗어 아이를 꼭꼭 감싸 안고 죽은 때문이었다. 선교사는 사람들을 불러 그 어미를 묻어주고 아이는 자신이 거둬다 길렀다. 그리고 아이가 열 살쯤 되어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 선교사는 한국 체재를 끝내고 귀국해야 할 처지가 되어 아이와 의논 끝에 함께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먼 이국 길을 떠나기 전 아이가 마지막으로 제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이었다. 그날도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는데, 여자아이는 차가운 바람기 속에 한 겹 한 겹 제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그 옷가지들로 제 어머니의 무덤을 쓰다듬듯 꼭꼭 싸 덮어주고 나서, 자신은 벌거벗은 몸으로 그 추위 속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이청준, <야윈 젖가슴>, 마음산책, 34-35쪽) 작가는 자기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그런 고난의 삶이 귀하거나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우리 삶이 비록 그렇듯이 아프고 고난스럽더라도, 그것을 따뜻이 감싸 감당하려는 사람들의 함께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권합니다. 세상 이치가 이런 것일 겁니다. 비판만 하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어머니인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교회의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머리이신 주님이 지시하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 당신의 일에 초대해주신 은혜 열두 제자를 택하여 세우신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내쫓는 것도 보았고,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마치 당신의 아픔처럼 여기시며 그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치유의 현장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제자들을 부르시고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에 동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구체적인 아픔의 자리에 파송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파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마칠 무렵 여러분은 파송의 말씀을 들은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로 그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라고 여러분을 보내신 자리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의 중심을 얻지 못해 욕망의 거리에서 비틀거리며,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허비하는 이들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귀신을 내쫓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권능은 어떤 마술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차마 그를 남처럼 여길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영혼의 순수, 셈하지 않는 마음, 진정한 사랑이야말로 권능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엄마는 무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능력은 자식을 향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허약함을 고쳐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희망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길에서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그들의 품이 되어 주시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품이었고, 집이었고, 고향이었습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자기 속에 차오르는 하나님의 생기를 가슴 벅차게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먼 곳을 바라볼 것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큰일을 한다는 명분에 치우쳐 가까운 이들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인은 온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추상抽象이라면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具體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몸의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5-6) 이 말은 이방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배제하라는 말이 아니라, 가까운 곳부터 따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확산되어 가야 합니다. • 존재의 증여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다가선다는 말이 꼭 그들에게 뭔가 물질적인 것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하지만, 섣부르게 도움을 베풀다가 그를 망쳐놓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도울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포자기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신 후, 앓는 사람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적인 이익의 수단으로 삼다가 타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병을 고쳐준다든지, 예언 기도를 해준다든지 하면서 물질적 대가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타락한 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제 가까운 벗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보며 늘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잘 합니다. 여러 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그가 형성한 관계의 그물망이 상당히 촘촘합니다. 어떤 세력을 만들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저 좋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대접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가끔 벗들을 초대해 조촐한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아낌없이 자기 것을 줍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를 중심으로 해서 우정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서로가 뭔가를 주고 싶어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겁니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으며 삶을 나누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우리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철저한 무소유를 요구하셨습니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9-10) 한국교회가 무력해진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랑과 우정이 아닌 돈으로 하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는 순간 시혜자施惠者와 수혜자受惠者가 갈리게 됩니다. 시혜자는 으쓱하고, 수혜자는 움츠러듭니다. 돈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보다 먼저 자기 존재를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존재가 통해야 나눔이 진실해집니다. •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보냄을 받은 이들은 이르는 곳마다 ‘주님의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골방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요20:21) 하고 인사를 건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평화를 빈다’는 말은 어쩌면 두려운 마음을 어루만지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손성현 목사가 와서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아빠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이 아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 한 마디 했습니다. "와, 우리 아빠 정말 멋지다." 느닷없는 아들의 칭찬에 아빠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 얼굴 표정까지 밝아졌습니다. 마치 자기 존재 전체가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랑 삼아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거 숙제야. 아빠 얼굴을 유심히 본 후 ‘우리 아빠 멋지다’라고 할 것. 그 후 아빠의 반응을 적어오기." 좀 김이 샜겠지요? 그런데도 그 아빠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가 어떤 때는 기관총이 되어 우리 가슴을 파고들고, 어떤 때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되어 우리 속의 생명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주님의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평화롭게 하겠습니까? 마음속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평화 세상을 이루겠습니까? 물론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어서는 안 됩니다. 미움은 미움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폭력과 미움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는 이들의 무지함을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을 닮지 못해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우리 시대에 평화는 늘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야말로 평화를 비는 이들이 더욱 필요한 법입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읽다가 가슴 떨리는 구절과 만났습니다. 새들은 바람 부는 날을 골라 둥지 만들기를 시작한다. 둥지가 바람에 부서지지 말라고 알이나 새끼가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바람 센 날에만 부산하게 새들은 둥지의 큰 틀을 만든다. 바람 불어오는 쪽의 벽을 더 두텁게 큰 가지로 다시 단단히 막고 싸고 가지와 가지 사이를 세밀하게 엮는다. -<둥지를 만드는 날> 중에서 둥지가 바람에 부서지지 말라고 오히려 바람 부는 날을 골라 집을 짓는 새들, 그 지혜가 놀랍습니다. 평화의 집은 그렇게 지어야 합니다. 남북한의 대립, 좌우의 대립, 나라와 나라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평화의 불빛이 가물거립니다. 그래도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결실이 없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결국 그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생명의 바람, 평화의 물결 되어’ 이 척박한 역사 속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상 구원이라는 멋진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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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5월 05일 12시 03분 28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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