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것 없다 고후10:12-18 (2013/4/28)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제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 바울이 처한 상황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해지는 때입니다. 저는 가지런하게 갈아놓은 밭고랑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설렙니다. 그 위에 작물을 심거나 씨앗을 뿌리고, 물주고, 북돋는 농부의 손길을 통해 기적처럼 생명이 돋아날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집니다. 그러나 결실에 이르기까지는 고비가 많습니다. 김매기도 해야 하고, 가뭄이나 홍수도 이겨내야 하고, 거센 바람도 이겨내야 합니다. 수확이 감동인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아니라 해도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일터에서 뭔가를 심으며 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두 가지로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갈6:7b-8) 삶의 복잡성에 비해 너무 단순한 구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 어떠해야 할지 잘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다는 말은 욕망에 휘둘리며 산다는 말일 테고, 성령에다 심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삶을 산다는 말일 겁니다. 욕망의 법에 지배되는 삶의 열매는 공허함과 쓸쓸함 그리고 안식 없음입니다. 반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열매는 기쁨과 평화이고 깊은 쉼입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산다고 해서 기쁨과 행복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도 온갖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공 들였던 일들이 허망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2년여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깊어진 것을 보며 그는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일단 고린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모은 의연금을 받아 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형편이 허락한다면 고린도에 머물면서 겨울을 날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고린도 교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즉시 고린도 교인들의 미성숙한 믿음을 꾸짖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려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의 편 가르기, 교인 간의 송사, 음행, 은사를 자랑하는 일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고린도교회에 회복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 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 세상 당연한 꾸짖음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그 꾸짖음을 양약으로 삼을 만한 내적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회초리를 물러 덤비는 개처럼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시비가 일었고, 바울이 여행 일정을 변경한 것도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일관성이 없어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말도 돌았습니다. 비방에도 살이 붙는 법입니다. 바울은 졸지에 사랑의 사도가 아니라 몹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변도 시원치 않고 용모도 보잘 것 없다, 고린도에 있는 동안 자기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작업장에서 일하더니, 다른 곳에서는 도움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바울이 정말 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낭비가 사람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어떤 사람이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몹쓸 사람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비방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그 속에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부족하고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창2:18). 인간은 홀로는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스듬히 기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라고 노래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댄 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낄 줄 알아야 하나님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때가 묻고, 일그러지기도 했고, 뒤틀리기도 했지만 그의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습니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도덕경 59장)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이 ‘남은 것을 다 거두어들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참 인상 깊습니다. ‘까짓 것’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두어들이라고 하심으로써 그 음식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비방할 수도 없습니다. 건전한 비판조차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근거 없는/정도를 넘은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 속에 근심 밖에 걱정 고린도 교인들의 비방을 들은 바울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도탑다고 여겼던 관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자기를 떠받치고 있던 마음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기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그가 겪었던 온갖 시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매를 맞는 일은 다반사였고, 파선을 당하여 망망한 바다를 떠다니기도 했고, 온갖 위험을 다 겪었고, 몸 고생과 마음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사서 하는 고생이었으니 남을 원망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의 못자리에 심겨진 이들이 행여 잘못될까봐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11:28-29) 사람들은 이 마음을 모릅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여 비방할 뿐입니다. 사람 낭비입니다. 바울은 당장 달려가 오해를 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격앙된 채 마주 대하면 관계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도를 방문하기 어려웠던 까닭을 밝히고, 약할 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특별한 계시도 있었지만 넌지시 암시만 했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은혜의 계기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그는 동역자인 디도 편에 그 편지를 보내면서 오해가 풀리기만을 바랐습니다. 바울은 이제나저제나 디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창493장 2절)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디도가 돌아왔습니다. 교인들이 바울을 배척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던 이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바울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에 대해 마음 아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디도의 보고를 들은 바울은 깊이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로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9장입니다. 고린도후서는 하나의 책이 아니라 몇 권이 합쳐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편지에서 거듭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위로’와 ‘기쁨’입니다. 고후1:3-7절 사이에 위로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쓰는 것을 꺼리는 법인데, 바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위로’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역으로 그가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 중요한 질문 세 가지 먼 길을 우회하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사도로서의 자기의 직무를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누가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방하는 이들을 보며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기준이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집을 지어놓고는 자기 침대에 사람들을 끌어들여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늘이고, 큰 사람은 잘라내곤 했습니다. 그의 침대에 눕혀지는 순간 사람은 불구가 되거나 죽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저마다의 침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 침대를 가지고 바울의 키가 크다느니 작다느니 말했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신학이 아니라 경영학이나 통계학을 자기 전공으로 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목회의 성공여부를 교인수와 예산규모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런 평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진력을 다합니다. 그러니 존재의 내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외적인 활동을 더욱 중시하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 안에서 삶이 변화 되었는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객관적 기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을 간략하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는 그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남이 하는 일이 근사해 보인다고 하여 그것을 넘볼 이유가 없습니다. 각자에게 위임된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새로운 자리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이른 것도 지경을 넓혀주신 하나님 덕분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늘 개척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일을 주도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가 이룬 성취를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을 이룬 후에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누추해지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말한 이가 어찌 자기 영광을 구하겠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30)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영적 추락이 시작됩니다. 셋째, 바울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구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해도 하나님이 고개를 저으시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뜨일 만한 일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면 그는 잘 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1:11). 이 한 마디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정말 잘 산다는 게 뭘까요? 저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불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직업이나 경제력에 대한 목표 말고, 존재로서의 목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욕망에게 내주었던 우리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만 닦고 또 닦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닦고자 노력할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행복으로 주변에 생명의 초록바람을 일으키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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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4월 28일 12시 03분 35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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