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누구인가? 롬7:14-25 (2013/4/14)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 이 청명한 날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지금 우리는 꽃 피는 호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반도에 드리운 먹구름 때문입니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休戰線>이라는 시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서로 대치하는, 그 쌀쌀한 풍경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휴전선, 그곳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입니다. 시인의 탄식은 이어집니다.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요 며칠 불어온 강풍은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었습니다. 모진 겨우살이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해서 제 권력을 강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 평화는 또한 평화로운 사람이 만들어가는 현실입니다. 평화로운 사람은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감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연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평화보다는 불화를 초래할 때가 더 많습니다. 숯 검댕이 묻은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더러워지듯이,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자아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디를 가나 갈등을 빚어내곤 합니다. 세상은 일시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디더라도 우리는 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변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직시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육정의 지배 바울은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14) 이것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나는 오랜 시간을 죄의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육정에 매인 존재라는 말을 그는 ‘나 자신으로 가득하다’고 번역했습니다. 느낌이 확 살아옵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습니다. ‘죄 아래 팔린 몸’ 혹은 ‘죄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는 말도 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성이 곧 죄입니다. 그런 죄에 사로잡힌 이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일에 미숙합니다. 욕망을 제어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감정과 욕망에 휘둘리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책망하시면서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 죄는 언제나 우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의 충동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잘 다스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죄에게 속절없이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선택이 우리 의지를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의 고백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7:15) 기가 막힌 분열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우리 삶을 돌아보면 이게 비단 바울만의 경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각과 삶의 불일치, 이것이 우리 삶을 곤고하게 만듭니다. 며칠 전 후배 목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의 외로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외로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의 외로움은 자기가 선포하는 말씀과 삶의 불일치를 자각할 때 찾아오는 불편한 손님입니다. 자기와의 불화를 자각할 때 목사는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어떤 이들은 분주함 속으로 자기를 몰아넣고, 어떤 이들은 위안거리를 찾아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은 정직하게 홀로 직면해야 할 외로움입니다. • 고백과 성찰 사도 바울은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독교 전통이 원죄라는 말로 지칭하는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 자기 중심성 말입니다. 물론 우리 속에는 또 다른 하나의 지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는 율법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지 못합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것이었습니다. 17절부터 20절을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실, 내게는 명령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계속해서 나의 최선의 의도를 좌초시키고 있다면, 분명 내게는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는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뜻을 품을 수는 있으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로 결심하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나는 결심하지만, 결심만 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내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배하고 맙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복있는사람, 409-410쪽) 이런 깊은 자각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24)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은 물질적 궁핍 때문이 아닙니다. 거듭되는 실패의 쓰라림 때문도 아닙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왜 무능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육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성 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254쪽) 의지의 왜곡-->육욕-->버릇-->필연-->노예 상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굳게 결심을 해보아도 우리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욕에 이끌려 가곤 합니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습니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절망스럽습니다. • 신뢰와 순명 사도 바울은 절규하듯 외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24)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습기習氣,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싶어 한 영혼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연 사도 바울의 어조가 바뀝니다. 일렁이던 바다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 같습니다. 돌풍이 몰아치던 하늘에서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5절 하반 절은 조금 생뚱맞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슨 목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앞의 책, 410쪽)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하냐 악하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굳건하냐 약하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이 올바르냐 그르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느냐 불신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우리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릴 때 주님은 우리 속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주님께 사로잡힌 이들은 이런 믿음 때문에 어려운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몇 주 전 수요일에 낯선 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두 분의 목사님이셨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노숙인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고 싶은 데, 장소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많고 많지만 거리를 떠돌고 있는 나사로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교회가 없는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들을 맞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음악예배를 준비하면서 목사님들은 자신들이 그런 기획을 한 까닭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에서 사회 복귀 또는 사회 환원(rehabilitation)이 거의 어렵기 때문에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가 남아 있다면 상처받은 인간성(broken humanity)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인간성마저 무너지고 나면 더는 어떻게 해볼 길이 없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엄함(dignity)을 잃지 않도록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실어준다. 지금도 서울역 둘레에는 ‘멘탈 붕괴’(mental collapse)로 고통 가운데 헤매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망상(delusion)에 사로잡혀 여기저기 떠돌면서 인간 이하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는 아무도 말을 걸 수 없다."(<서울역 다움교회>와 함께 드리는 음악예배> 팜플렛 중에서) 그분들은 서울역 식구들을 ‘인간다움에 대한 마지막 표현’으로써의 예배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들을 찾아가 초대해야 함이 마땅했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그러한 아름다운 사역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 두 목사님이 그런 고생을 사서 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멋진 치유와 회복의 예배에 우리 교우들도 많이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시작하는 작은 평화의 몸짓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번져가 동심원을 이룰 때 평화는 성큼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많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악에 맞서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기쁨을 날마다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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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4월 14일 12시 07분 3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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