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산다 요12:20-26 (2013/3/31, 부활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은총이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20:25)라고 말했던 도마의 태도가 더 정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상식이나 합리적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의 말을 들이대며 ‘믿으면 알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는 부활을 믿는 척하거나, 부활 신앙을 옆으로 밀쳐놓은 채 지내기도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을 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부활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부활의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부활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과거의 인력에서 벗어나,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얼에 접속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진 이의 삶입니다. <개척자들>의 송강호 박사를 통해 나는 부활신앙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서 핍박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배워야 한다. 삶의 의미는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는 데 있다. 한 번 혹은 몇 번의 패배로 물러나는 미완성의 패배가 아니라 어떤 시련과 절망도 좌절도 끝내 거부하고, 끝없이 패배하는 삶을 한없이 긍정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이 우리의 운명이 되어야 한다. 나는 믿는다. 우리는 패배하고 신은 승리하며, 우리는 죽지만 신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다는 진실을."(송강호,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Ivp, 167-168쪽) 패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없이 패배한다 해도 그 삶을 긍정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장엄한 삶입니다. 부활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의를 위해 싸우다가 나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 건너편의 불빛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명한 밀알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밀알 하나’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제자들이 신앙적 주체로 설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스승의 죽음이라는 그 암담한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래서 그들도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그들 속에 부활의 삶이라는 싹이 발아할 수 없음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히는 길을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실을 더욱 확장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고전15:42-44)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천금같은 시간의 밭에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저는 가끔 우리가 아무리 애써 봐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큰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 겨울 밤, 인디언 양치기 소년이 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소년은 바로 다음 날 기적처럼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고 물었더니,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해졌을 때, 저쪽 산에서 다른 양치기의 불빛이 반짝였어요. 저는 그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집에 돌아가는 생각만 했어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밤,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건너편 산의 불빛이 필요합니다."(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영혼의 정원>, 열림원, 3월 11일 자). 누군가 저만치에서 밝힌 불빛 덕분에 길을 찾는 이들이 있는 법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마땅히 밝혀야 할 등불을 켜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설 땅이 되고, 사람들을 건네주기 위해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않을 것을 거두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있지만, 부활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스페인 사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성도들의 삶과 믿음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한테 달린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믿으십시오." 이 말씀과 더불어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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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3월 31일 12시 14분 3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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