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는 세상 요17:20-23 (2000/6/18) 愚公移山 옛날 기주의 남쪽에 있던 태행산과 왕옥산은 사방이 칠백리, 높이는 만발이나 되는 산들인데 우공이라는 어리석은 늙은이가 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9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우공은 집안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앞에 산이 막혀 있어서 나들이하기가 불편하구나. 그래서 너희들과 있는 힘을 다하여서 험한 산을 평평하게 만들어 곧장 길을 내고 싶은 데 너희들의 의향은 어떠냐?" 노인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었던지 모두 다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일제히 산에 달라붙어 돌을 깨고, 흙을 삼태기나 광주리에 담아 황해까지 운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일행이 황해까지 다녀오는 데에는 거의 일년이나 걸렸습니다. 황해 근처에 사는 지수(智 )라는 노인이 우공이 하는 일을 비웃으며 한 말씀 했습니다. "자네는 참 어리석기도 하네. 앞이 얼마 남지 않은 자네의 힘으로는 산의 한 모퉁이도 파헤치기 어려울 텐데 이게 무슨 망령인가?" 그 말을 듣자 우공은 오히려 지수를 딱하게 여기며 말했습니다. "자네같이 천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는 도저히 알리 없지.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죽으면 아들이 남고, 아들은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한 그 아들을 낳고…하여 자자손손으로 끊기지 않네. 그렇다면 언젠가는 꼭 평평해질 날이 올 것이 아닌가?" 지수는 이 말을 듣고 한심해서 입을 딱 벌렸지만 정작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뱀신(蛇神)이었습니다. 산을 뭉개는 작업이 계속되자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하셔서 힘의 신(力神)인 과아의 두 아들에게 분부하셔서 산을 옮기도록 했어요. 그때부터 기주의 남쪽에는 높다란 언덕조차 없게 되었답니다. 이를 가리켜 우공이 산을 옮겼다, 즉 愚公移山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列子의 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저는 거대한 산을 옮기기로 작정하고 그 첫 삽을 뜨는 우공 가족의 어리석음이 눈물나도록 좋습니다. 우리는 다 지수 할아버지 같아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딱 분별해서 안 될 일은 지레 포기하고 사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역사는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꿈은 불온해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꿈도 어리석어 보입니다. 십자가는 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십자가야말로 하늘에 이르는 길인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세상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건가 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미 눈치채셨지요? 지난 한 주 동안 우리는 적잖이 흥분한 상태에서 보냈습니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모여 앉아 민족의 장래를 위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우리는 희망의 조짐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작은 시작에 불과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려는 길에 수많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음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동한 남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았다는 외면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거대한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앞에 닥쳐오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통일의 초석을 놓기 위해 몸을 던졌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을 가르는 철책 위에 자기 몸을 걸쳐 놓아 길을 놓으려던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세상에는 씨를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뿌리는 자가 없었다면 거두는 자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의 시기입니다. 태행산과 왕옥산을 지키던 뱀신들의 투정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어리석은 우공의 우직함을 높이 사셨습니다. 분단을 고착화시킴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이들의 방해가 아무리 집요해도 통일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단의 하나님이 아니라, 통일의 하나님이시고, '하나 되게 하는 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이면서 일체이신 하나님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안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분들은 대개 이 말을 압니다. 아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삼위일체론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세 가지 모습으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몰라도 그만이에요. 이거 몰라도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그래도 아셔야겠다구요? 그러면 하나님의 세 위격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지요. 첫째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물론 남녀의 성별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닙니다. 생명의 시작을 뜻하는 은유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woher). 그리고 때가 되면 아버지께로 돌아가게(wohin)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모두의 기원이자 귀착지입니다. 우리 생명은 우연히 왔다가 가는 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왔다가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 삶을 허망한 일에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고, 오늘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둘째는 진리의 구현자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몸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셔서 무얼 하셨나요? 하나님께 받은 생명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태어난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은 입버릇처럼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받들어 산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보내신 분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세상을 거역하는 길이었기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야말로 참된 삶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혈연관계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드신 분, 곧 진리의 구현자라는 고백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로 다가오십니다. 셋째는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에요. 성령의 특색이 뭐지요? 네, 힘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지요? 성령이 임하면 무기력한 사람이 힘찬 사람이 됩니다. 골방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을 보세요.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참 무력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죄짓는 일에 힘이 넘치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다른 영으로부터 힘을 받아 사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또 그분의 뜻대로 살려면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안돼요. 우리는 유혹에 참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유혹인줄 알면서도 번번히 넘어가곤 합니다. 유혹의 뒤끝은 늘 씁쓸하지요. 마치 술 깬 뒤에 숙취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내가 술을 마시면 성을 간다." 그래놓고는 몸이 어느 정도 추스려지면 '누가 술 먹자고 안부르나?' 하고 두리번거려요. 우리에게는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만한 내적인 힘이 부족해요. 하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유혹을 이긴 존재, 내적인 무기력을 극복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차게 살아가는 참 사람이 됩니다. 소립자의 신비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살게 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참되게 살게 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힘차게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셋으로 한 몸을 이루고 계신 거예요. 물리학에서 사람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소립자를 쿼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쿼크야말로 삼위일체를 닮았어요. 쿼크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의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자꾸 갈라놓는 것을 좋아하는 학자들은 물질의 최소 단위를 얻으려는 욕심을 이것을 갈라보려고 애를 많이 썼대요. 그런데 신비한 것은 셋 중에서 어느 하나를 잘라내려고 하면 나머지 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결론을 내렸어요. "물질의 최소 단위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이 셋으로 구성된 하나의 관계의 그물망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가 셋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 재미있지요? 과학 공부도 깊어지면 하나님에게 이르는 건가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수학 공부를 하다보니까 불길하게도(?)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수학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그랬어요.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 속에 초청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 다른 개체들이 서로 '하나됨'을 실현해가는 곳입니다. 한마음 체육대회를 하면 운동장에서 교우들이 손을 맞잡고 큰 원을 만들 때가 있는 데 그 광경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아, 이게 우리 집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나는데요, 앞으로는 짝짓기 놀이를 해도 점점 큰 원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짝을 못이루었던 사람도 다시 상생의 큰 원에 동참할 수 있게 해서 모두가 한 원을 이루게 된다면 얼마나 멋있어요. 체육대회를 준비하는 분들이 잘 기억해두면 좋겠어요.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맞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단의 하나님이 아니라 통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9-12) 졸졸 흐르던 실개천이 개울과 합류하고, 개울이 강과 합류하고, 강은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바다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류하기 위해 계속해서 흐른다면 세상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하나됨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이 태행산과 왕옥산처럼 높아보여도 우공처럼 우직한 이들이 있는 한 그 장벽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세상의 꿈은 우리의 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니까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일상의 갈라진 것들을 하나되게 하는 화해와 공존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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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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