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는 성령
행2:1-13
(2000/6/11, 성령강림절)
겁많은 자의 용기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다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곳인데요, 모인 사람들이 근 12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수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실 때 몇몇 여인들을 빼고는 아무도 예수님 곁에 없었는데, 이들이 박해의 현장인 예루살렘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영광의 도성이라기 보다는 상처의 땅이요, 좌절의 땅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꿈꾸었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꿈의 무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은 악몽을 떨쳐버리듯 할 수 있으면 한시라도 빨리 떠나버리고 싶은 곳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곳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왜일까요? 대체 어떤 힘이 이들을 한 군데에 모았을까요? 사도행전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까닭을 예수님의 당부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꼭 그 때문일까요?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최초의 충격이 가라앉은 후 그들은 예수님과 보냈던 시간들을 곰곰히 반추해 보았을 겁니다. 그분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평화, 소망, 용기….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스러져버려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그 꿈을 보듬어 안고 가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그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웠지만 하나 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기 시작했을 겁니다. 조금씩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들은 용기를 내게 되었겠지요?
하늘의 불꽃에 점화되어
그들이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있던 오순절 날 그들은 마침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진심과 진정에 하늘이 감응한 것일까요?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비일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세찬 바람은 그들의 울울하던 마음의 티끌들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그 세찬 불꽃들은 재처럼 식어가던 그들의 영혼에 하늘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속에서 불이 붙는데 어떻게 좁은 방 안에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떠들썩한 소리에 놀라 몰려들었다가 제자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이 살던 지역의 말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언어의 회복
저는 이 대목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전하는 누가가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근본적인 언어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서로 통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말이 서로의 가슴에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슬퍼요' 하고 말해도 사람들은 내 슬픔을 공감하지 않아요. '나는 외롭다' 해도 누군가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지 않아요. '나는 기쁘다' 해도 곁에 다가와 함께 춤을 추지 않아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상호 소통하지 못하는 불모지대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가슴의 언어에 반응을 하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담 허물기
성령은 그렇게 우리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헐어 버립니다. 세찬 바람이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거센 불길이 담을 넘는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모든 차이를 넘어 상호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게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게 됩니다. 세상에는 자기의 죄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가슴에 품고 있는 죄책은 건강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예요.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그리고 아픈 기억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어요.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기억들은 세월이 가도 우리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를 않아요. 그게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거지요. 풀 수 있다면 풀어야 해요.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기 죄를 아파하고 참회하는 이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거든요. 이게 예수님이 전하신 福音이에요. 성령이 우리 마음 속에 오시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마음으로 믿게 되는 거예요. 용서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지요? "야, 이제는 해방이다. 맘대로 살자" 그러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는 빚을 탕감받은 이의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남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구요, 자기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웃과의 담 허물기
성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분리와 차별의 장벽도 넘어서게 만들어요.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흑인들과 갈들을 빚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턱없이 흑인들을 깔본다는 것이지요. 흑인들이 하대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의 피부색이 검다는 것이 그런 이유일 수 있나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왔던 그들이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왜 천대받고, 학대받지요?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에요. 이거 참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먹을거리가 조금 넉넉하다고 그렇지 못한 나라를 깔볼 수 있나요? 여러분,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세요? 우리 가슴이 불모지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사막이 된 거지요. 가슴이 불모지가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육체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속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해요. 우리 속에 하늘의 불이 지펴져야 해요.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고, 다른 이들의 기쁨을 기쁨으로 공감할 줄 아는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불모지가 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셔야 해요. 성령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의 높은 벽을 넘어 이방인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의연금을 거두어 보내주었구요. 그들은 인종, 피부색, 국적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던 것이지요. 얼마 전 신문 보셨지요? 동국대에 있는 불상에 빨간 페인트로 누가 십자가를 그렸더군요. 그 앞에는 '오직 예수'라고 썼구요. 아마 광신자의 소행이겠지요. 이게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일까요? 예수님이 그 일을 한 사람을 보고 '어이구, 참 잘했다' 그러셨겠어요? 아닙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절대 이런 짓 안합니다. 자기 속에 이상한 도깨비가 들어왔는데 그걸 가지고 성령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큰 일입니다.
성령 받으면 다른 이가 남같이 여겨지지 않아요. 어느 목사님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대요. 그러다가 짐짓 물었지요. "사마리아 사람은 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을까?" 그랬더니 한 어린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더래요. "자세히 보니까 잘 아는 사람이었던가 보지요." 그래서 다 웃었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게 참 깊은 이야기더래요. 고통 당하는 사람이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남을 도울 수 있지요. 여선교회 회원들이 한 달에 한번씩 애니아의 집에 가서 중증 장애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분들의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기쁜 표정으로 도울 수 있겠어요? 그래요, 성령께서 그분들 마음에 계시니까 그 아이들이 남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 거예요.
피조물과의 담 허물기
성령 받으면 사람들은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19절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성령받은 사람들은 땅의 신음소리, 물의 신음소리, 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어요.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겪는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껴요. 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거든요. 피조물들이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 제일 마음 아파하실 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정하신 리듬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거예요.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리듬을 거스르면서 살아요. 그러다보니 다른 피조물들도 덩달아 자연법칙에서 멀어진 것이지요.
사택을 지으면서 앞에는 라일락을 심고, 뒤꼍에는 대추나무를 심었어요. 이제 그 나무들이 꽤 컸어요. 심은지 몇 해 되면서부터 대추나무에는 제법 실한 열매가 많이 달리더군요. 맛은 없었지만요. 그래도 공업사의 소음과 냄새와 쇠가루에 시달리면서도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가 여간 대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열매가 맺히지 않는 거예요. 나무에 무슨 병이 들었나보다 했어요. 그러다가 생각해보니까 그때가 바로 골목에 보안등이 설치된 다음부터인 걸 알았어요. 보안등 때문에 대추나무는 밤을 맞지 못한 겁니다. 여러분, 경기도에서 전기 불빛에 노출된 벼 이삭이 영글지 못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낮과 밤은 하나님의 날숨과 들숨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피조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 됩니다. 과시적인 소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알게 됩니다. 피조물과 우리 사이에 있는 적대관계, 착취관계가 해결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민족의 성령강림절
성령이 오시면 우리 사이에 드리워있는 분리의 장벽들이 무너진다는 것이 오늘 제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남북의 정상들이 모여 한민족의 장래를 위한 의미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사실 자체를 저는 희망의 징조로 보고 싶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남북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공존공생하는 길로 나가기를 빕니다. 저는 내일 남북 정상의 만남이 우리 민족의 성령강림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남북의 문제는 냉엄한 비즈니스로 접근해야 한다고 어느 일간지 사설은 말했습니다만 민족 문제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통일은 소명입니다. 맺힌 것은 풀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조화로운 상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들은 물론이지만 하나님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령강림절 아침,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어왔던 성령의 바람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남북의 관계 속에 불어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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