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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승리의 의미(요한복음 16장 25절~33절)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지금은 우리도 자동차를 많이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마는 한때 '자동차의 나라'라고까지 불리던 미국은 역시 세계적으로 자동차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1년에도 여러 차례 자동차 경주가 있습니다. 자동차경주가 있을 때마다 온 고을이 떠들썩합니다.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 한동안은 모두가 그 이야기로 화제를 삼습니다.
언젠가도 자동차경주가 열려 '디팔머'라고 하는 선수가 출발부터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사람이 챔피언이 되는가보다 했는데 웬걸, 골인 지점을 1마일 앞두고 엔진에 고장이 나면서 발동이 꺼졌습니다. 모두들 아깝다는 듯 혀를 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손으로 밀어서 기어이 골인 지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뒤처져 달리던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 그 선수를 추월했습니다. 디팔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챔피언의 영광은 딴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관중들은 디팔머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디팔머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골인했습니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디팔머라는 이름은 그후 어느 챔피언의 이름보다도 오래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승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다운 승리입니까? 성경은 인생을 여러 모로 비유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농부와 같다, 나그네와 같다, 혹은 군인과 같다, 혹은 충성되게 일하는 종과도 같다, 혹은 어부와도 같다 ---- 이렇게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마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인생을 경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인생 경기에서 육체적으로는 건강과 장수가 승리라 하겠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명예를 얻는 것이 승리이겠고, 정치적으로는 아무래도 평화가 곧 승리이겠습니다. 도덕적으로 볼 때에는 양심에 가책 없는 생을 산 사람이 승자이겠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양심이 자유한 자가 도덕적 승리자입니다.
종교적 승리라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구원과 그리고 영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경제적으로는 승리했는데 도덕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승자라 하겠습니까? 돈은 벌었는데 인격적으로는 망쳤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출세했는데 양심은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 이런 사람들을 두고 승자라 할 것입니까?
남이 인정하는 승리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승리를 허무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원이 간절했습니다마는 그 소원을 이루고보니 허무합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합니다. 일간지에 소설을 써보내어 당선된 사람이 당선된 그 다음날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남긴 유서는 간단한 내용 ---- 평생 소원이 이루어져서 문인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병법(兵法)에 성(城)을 빼앗기보다도 성을 지켜내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겁이 나고 불안해집니다. 그 승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면 다음 싸움에 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허탈감에 빠지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입니다.
승리를 위해서 지불한 댓가는 큽니다. 많은 사람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많은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가책되는 일도 많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승리는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일 수가 있습니다.
승리로 고독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남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괴롭습니다. 남들은 성공했다고 축하하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남이 뭐라고 하건 내 양심이 나를 인정하는 성공이라야 성공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이겼노라."
내가 선언할 수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양심이 판정패라고 선언하면 나는 패한 사람입니다. 내 인격이 용납지 않으면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즉 최종심판자께서 판정승을 선언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겼다' 하셔야 비로소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내 앞에는 면류관이 있다' ---- 이러한 최종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부흥사 무디 선생이 1892년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마는 캔자스 주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도중에 과로로 쓰러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고 염려해줍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승리다. 오늘도 전도자의 책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니까." 참승리는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승리는 상대적입니다. 승자가 있고 동시에 패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은 집니다. 권투시합 같은 것을 보더라도 링 위에 올라갈 때에는 두 사람 다 의기양양합니다마는 경기가 끝나고보면 한 사람은 쓰러지고 한 사람은 영광을 얻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패해주어야 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한 사람이 케이오패가 되어야 한 사람이 케이오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얻는 것이 승리입니까? 내가 웃으려면 다른 사람이 울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부자가 되려면 누군가가 가난해 져야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성공하려면 누군가가 실패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실패를 딛고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승리는 패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바랄 것이 못됩니다.
참 승리는 절대적이어야 하고 공동승리여야 하고, 그리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발을 씻기시며 마지막 부탁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 끝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이란 물질 세계를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권세를 말하고 세상적인 욕심과 정욕 같은 것들을 다 종합한 말입니다. 이것을 이겨야,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나가사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그리고 그 시험을 이기십니다. 이기시고, 또 이기시고, 십자가를 앞에 놓고 승리를 선포하시고 마침내 부활로 승리를 확증하십니다.
미국에 케리 그린이라고 하는 재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많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큰 부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병을 얻었을 때에는 어떤 고급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상 떠난 다음에 그 살림을 챙기다보니 신문지로 해 입은 속옷이 있더랍니다. 그런 부자가 신문지로 옷을 해 입고 살았다니, 그토록 돈을 아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까?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울 수 없다더니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이렇게 끝이 없는가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돈에 노예가 될 것이 아니고 돈을 내가 지배할 수 있어야 승리자입니다. 돈과의 싸움, 욕심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가난해서 비굴해지는 사람이나 부해서 교만해지는 사람이나 모두 돈에 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세계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법과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겼노라' 하심은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말씀하심입니다.
또한 세상은 사악한 세상입니다. 타락과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있습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무엇이 이긴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다 이루었다" 라고 또한번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성서학적으로 자세히 연구해보면 '나'라고 하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헬라 원문으로 '네니케카'라고 하는 이 말은 완료형입니다. 승리해버렸다, 이미 승리했다 하는 뜻입니다.
이미 이겼다 ---- 이것은 종교적 승리요, 종말론적 승리요, 실제적 절대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시간과도 관계없습니다. 여건과도 관계없습니다. 세상의 변화와도, 상황과도 관계없는, 절대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앞에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고난받으실 길이 남아 있습니다.
재판받으시고 굴욕당하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 그러나 이것을 다 내다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겼노라" ---- 먼저 승리를 선언하고 그 승리를 집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서 악전고투합니다. 때로는 실패의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승리를 무지개 잡듯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보다가 끝납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원천적 승리를 이루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깨쳐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자기와의 싸움에 진 사람은 이미 초장에 진 사람입니다. 앞으로 질 사람입니다. 경기 해보나마나 입니다. 자기를 이긴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아시아경기에서 많은 선수들의 승리와 실패를 한 눈에 보게 되겠습니다. 승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승부는 3분 또는 1분이라는 잠깐사이에 판가름납니다. 그러나 이런 게임에서 승리하려고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싸워야 했습니까? 이 게임이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벌써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정욕과 싸웁니다.
허탈과 싸웁니다. 경제와 싸웁니다. 숱한 증오, 질투, 게으름과 타락 ---- 이런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 이기고 오늘에 임하는 것입니다. 잠깐사이의 승부에서 얻는 이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지요. 순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경기장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자기를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합니다. 치는 자가 없어도 넘어집니다.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 쫓겨다니는 인간은 어디에 갖다놓아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패자(敗者)입니다. 육체의 길, 패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센 것 같으나, 완전한 패자올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겼노라" 하신 구체적인 의미를 본문에서 좀더 상고해보십시다. 예수님은 고독을 아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하고 외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외로움을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외로움입니다. 고독입니다. 고독을 느끼는 순간처럼 두려운 순간이 없습니다. 그누가 위로해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로한다는 말이 오히려 조롱으로 들릴 때, 바로 그런 때가 고독한 때입니다. 이제 나는 혼자다 ---- 외로움에 슬퍼하고 있을 때, 절망할 때, 이 실존적인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어느 순간일지라도,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렸다 해도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을 이기는 승리 ---- 이것이 원천적인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불안과 절망이 아니라 고요한 평화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나타나지만, 요한복음 14장 27절에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예수님은 평화로웠습니다. 불안과 공포, 그 적(敵)을 평안으로 몰아내셨습니다. 이기셨습니다.
서양사람들의 격언에 승리의 비결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3P'라고 일컬어지는 격언입니다. 'peace, practice, patience'가그것입니다.
첫째는 평화로워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안 나던 생각도 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안에 떠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성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적극적인 생각으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Practice ---- 앉아서 승리를 운위해서는 안됩니다. 뛰어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최종승리는 인내하는 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화평과 소유와 번영과 의와 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가 곧 승리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가룟 유다가 눈앞에 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 흩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저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기셨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결혼을 하든가 직장에 들어가든가 친구를 사귀든가 할 때에 가만히 보면 봉사하고 사랑하겠다며 시작했다가 무엇이 좀 뜻대로 안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하면 그만 홱 돌아섭니다. 사랑이 도리어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사랑하겠다고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내야 합니다. 도중에 왜 딴소리가 나옵니까? 끝까지 사랑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던가 사랑에 낙심이 가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믿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을 예언하시면서도 믿으셨고, 모른다고 한 다음에 갈릴리바다로 가서 물고기 잡고 있을 때에도 몸소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순교해야 되겠다" 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믿으셨습니다. 신임하셨습니다. 신뢰로 불신을 이기셨습니다.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언젠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큰 사업을 하시는 우리 교포 장로님 한 분을 만났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플라스틱회사가 일본에 셋 있는데, 그중 제일 큰 회사가 이 장로님의 회사라고 합니다. 그 공장을 들렀다가 예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나게 큰 규모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더 중요한 문제에 있었습니다.
그 회사가 시작된 지 40년 됐는데, 장로님과 함께 30년 이상 일을 한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를 도와서 일하고 있는 비서 아가씨는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들어와서 22년이나 근속하고 있었는데, 장로님이 회사를 한 달씩이나 비워도 아무 지장이 없답니다. 그 아가씨가 다 맡아서 잘 해낸답니다. 장로님은 그를 완전히 믿어서 장로님이 오히려 비서보다도 모르는 게 많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이렇게까지 믿어보셨습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어디 있어?" 혹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푸념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 실패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히 패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승리가 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한다고 하면서 일꾼들이 1년도 안 있어 돌아서 나가버리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해서 원수가 되고 한다면야 억만금을 챙긴들 성공이라 하겠습니까? 돈푼이나 손에 쥐었다고 성공이 아닙니다. 참 성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사람을 얻었다면, 사람을 믿었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 저 부활의 아침을 확실히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겼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승리요, 사랑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요, 절대적이고 창조적인 승리입니다. 이미 승리하시고, 그 승리를 집행하시고, 원천적인 승리에서 최종 승리를 향해 나아가사 마지막 승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승리하고, 그리고 내일의 승리를 내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런고로 담대하라 ----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 우리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승리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
참 승리의 의미(요한복음 16장 25절~33절)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지금은 우리도 자동차를 많이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마는 한때 '자동차의 나라'라고까지 불리던 미국은 역시 세계적으로 자동차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1년에도 여러 차례 자동차 경주가 있습니다. 자동차경주가 있을 때마다 온 고을이 떠들썩합니다.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 한동안은 모두가 그 이야기로 화제를 삼습니다.
언젠가도 자동차경주가 열려 '디팔머'라고 하는 선수가 출발부터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사람이 챔피언이 되는가보다 했는데 웬걸, 골인 지점을 1마일 앞두고 엔진에 고장이 나면서 발동이 꺼졌습니다. 모두들 아깝다는 듯 혀를 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손으로 밀어서 기어이 골인 지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뒤처져 달리던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 그 선수를 추월했습니다. 디팔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챔피언의 영광은 딴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관중들은 디팔머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디팔머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골인했습니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디팔머라는 이름은 그후 어느 챔피언의 이름보다도 오래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승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다운 승리입니까? 성경은 인생을 여러 모로 비유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농부와 같다, 나그네와 같다, 혹은 군인과 같다, 혹은 충성되게 일하는 종과도 같다, 혹은 어부와도 같다 ---- 이렇게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마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인생을 경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인생 경기에서 육체적으로는 건강과 장수가 승리라 하겠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명예를 얻는 것이 승리이겠고, 정치적으로는 아무래도 평화가 곧 승리이겠습니다. 도덕적으로 볼 때에는 양심에 가책 없는 생을 산 사람이 승자이겠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양심이 자유한 자가 도덕적 승리자입니다.
종교적 승리라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구원과 그리고 영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경제적으로는 승리했는데 도덕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승자라 하겠습니까? 돈은 벌었는데 인격적으로는 망쳤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출세했는데 양심은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 이런 사람들을 두고 승자라 할 것입니까?
남이 인정하는 승리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승리를 허무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원이 간절했습니다마는 그 소원을 이루고보니 허무합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합니다. 일간지에 소설을 써보내어 당선된 사람이 당선된 그 다음날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남긴 유서는 간단한 내용 ---- 평생 소원이 이루어져서 문인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병법(兵法)에 성(城)을 빼앗기보다도 성을 지켜내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겁이 나고 불안해집니다. 그 승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면 다음 싸움에 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허탈감에 빠지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입니다.
승리를 위해서 지불한 댓가는 큽니다. 많은 사람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많은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가책되는 일도 많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승리는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일 수가 있습니다.
승리로 고독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남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괴롭습니다. 남들은 성공했다고 축하하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남이 뭐라고 하건 내 양심이 나를 인정하는 성공이라야 성공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이겼노라."
내가 선언할 수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양심이 판정패라고 선언하면 나는 패한 사람입니다. 내 인격이 용납지 않으면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즉 최종심판자께서 판정승을 선언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겼다' 하셔야 비로소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내 앞에는 면류관이 있다' ---- 이러한 최종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부흥사 무디 선생이 1892년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마는 캔자스 주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도중에 과로로 쓰러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고 염려해줍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승리다. 오늘도 전도자의 책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니까." 참승리는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승리는 상대적입니다. 승자가 있고 동시에 패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은 집니다. 권투시합 같은 것을 보더라도 링 위에 올라갈 때에는 두 사람 다 의기양양합니다마는 경기가 끝나고보면 한 사람은 쓰러지고 한 사람은 영광을 얻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패해주어야 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한 사람이 케이오패가 되어야 한 사람이 케이오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얻는 것이 승리입니까? 내가 웃으려면 다른 사람이 울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부자가 되려면 누군가가 가난해 져야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성공하려면 누군가가 실패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실패를 딛고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승리는 패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바랄 것이 못됩니다.
참 승리는 절대적이어야 하고 공동승리여야 하고, 그리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발을 씻기시며 마지막 부탁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 끝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이란 물질 세계를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권세를 말하고 세상적인 욕심과 정욕 같은 것들을 다 종합한 말입니다. 이것을 이겨야,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나가사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그리고 그 시험을 이기십니다. 이기시고, 또 이기시고, 십자가를 앞에 놓고 승리를 선포하시고 마침내 부활로 승리를 확증하십니다.
미국에 케리 그린이라고 하는 재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많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큰 부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병을 얻었을 때에는 어떤 고급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상 떠난 다음에 그 살림을 챙기다보니 신문지로 해 입은 속옷이 있더랍니다. 그런 부자가 신문지로 옷을 해 입고 살았다니, 그토록 돈을 아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까?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울 수 없다더니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이렇게 끝이 없는가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돈에 노예가 될 것이 아니고 돈을 내가 지배할 수 있어야 승리자입니다. 돈과의 싸움, 욕심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가난해서 비굴해지는 사람이나 부해서 교만해지는 사람이나 모두 돈에 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세계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법과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겼노라' 하심은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말씀하심입니다.
또한 세상은 사악한 세상입니다. 타락과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있습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무엇이 이긴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다 이루었다" 라고 또한번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성서학적으로 자세히 연구해보면 '나'라고 하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헬라 원문으로 '네니케카'라고 하는 이 말은 완료형입니다. 승리해버렸다, 이미 승리했다 하는 뜻입니다.
이미 이겼다 ---- 이것은 종교적 승리요, 종말론적 승리요, 실제적 절대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시간과도 관계없습니다. 여건과도 관계없습니다. 세상의 변화와도, 상황과도 관계없는, 절대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앞에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고난받으실 길이 남아 있습니다.
재판받으시고 굴욕당하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 그러나 이것을 다 내다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겼노라" ---- 먼저 승리를 선언하고 그 승리를 집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서 악전고투합니다. 때로는 실패의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승리를 무지개 잡듯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보다가 끝납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원천적 승리를 이루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깨쳐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자기와의 싸움에 진 사람은 이미 초장에 진 사람입니다. 앞으로 질 사람입니다. 경기 해보나마나 입니다. 자기를 이긴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아시아경기에서 많은 선수들의 승리와 실패를 한 눈에 보게 되겠습니다. 승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승부는 3분 또는 1분이라는 잠깐사이에 판가름납니다. 그러나 이런 게임에서 승리하려고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싸워야 했습니까? 이 게임이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벌써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정욕과 싸웁니다.
허탈과 싸웁니다. 경제와 싸웁니다. 숱한 증오, 질투, 게으름과 타락 ---- 이런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 이기고 오늘에 임하는 것입니다. 잠깐사이의 승부에서 얻는 이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지요. 순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경기장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자기를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합니다. 치는 자가 없어도 넘어집니다.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 쫓겨다니는 인간은 어디에 갖다놓아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패자(敗者)입니다. 육체의 길, 패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센 것 같으나, 완전한 패자올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겼노라" 하신 구체적인 의미를 본문에서 좀더 상고해보십시다. 예수님은 고독을 아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하고 외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외로움을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외로움입니다. 고독입니다. 고독을 느끼는 순간처럼 두려운 순간이 없습니다. 그누가 위로해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로한다는 말이 오히려 조롱으로 들릴 때, 바로 그런 때가 고독한 때입니다. 이제 나는 혼자다 ---- 외로움에 슬퍼하고 있을 때, 절망할 때, 이 실존적인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어느 순간일지라도,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렸다 해도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을 이기는 승리 ---- 이것이 원천적인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불안과 절망이 아니라 고요한 평화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나타나지만, 요한복음 14장 27절에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예수님은 평화로웠습니다. 불안과 공포, 그 적(敵)을 평안으로 몰아내셨습니다. 이기셨습니다.
서양사람들의 격언에 승리의 비결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3P'라고 일컬어지는 격언입니다. 'peace, practice, patience'가그것입니다.
첫째는 평화로워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안 나던 생각도 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안에 떠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성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적극적인 생각으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Practice ---- 앉아서 승리를 운위해서는 안됩니다. 뛰어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최종승리는 인내하는 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화평과 소유와 번영과 의와 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가 곧 승리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가룟 유다가 눈앞에 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 흩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저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기셨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결혼을 하든가 직장에 들어가든가 친구를 사귀든가 할 때에 가만히 보면 봉사하고 사랑하겠다며 시작했다가 무엇이 좀 뜻대로 안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하면 그만 홱 돌아섭니다. 사랑이 도리어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사랑하겠다고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내야 합니다. 도중에 왜 딴소리가 나옵니까? 끝까지 사랑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던가 사랑에 낙심이 가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믿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을 예언하시면서도 믿으셨고, 모른다고 한 다음에 갈릴리바다로 가서 물고기 잡고 있을 때에도 몸소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순교해야 되겠다" 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믿으셨습니다. 신임하셨습니다. 신뢰로 불신을 이기셨습니다.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언젠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큰 사업을 하시는 우리 교포 장로님 한 분을 만났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플라스틱회사가 일본에 셋 있는데, 그중 제일 큰 회사가 이 장로님의 회사라고 합니다. 그 공장을 들렀다가 예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나게 큰 규모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더 중요한 문제에 있었습니다.
그 회사가 시작된 지 40년 됐는데, 장로님과 함께 30년 이상 일을 한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를 도와서 일하고 있는 비서 아가씨는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들어와서 22년이나 근속하고 있었는데, 장로님이 회사를 한 달씩이나 비워도 아무 지장이 없답니다. 그 아가씨가 다 맡아서 잘 해낸답니다. 장로님은 그를 완전히 믿어서 장로님이 오히려 비서보다도 모르는 게 많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이렇게까지 믿어보셨습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어디 있어?" 혹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푸념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 실패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히 패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승리가 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한다고 하면서 일꾼들이 1년도 안 있어 돌아서 나가버리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해서 원수가 되고 한다면야 억만금을 챙긴들 성공이라 하겠습니까? 돈푼이나 손에 쥐었다고 성공이 아닙니다. 참 성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사람을 얻었다면, 사람을 믿었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 저 부활의 아침을 확실히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겼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승리요, 사랑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요, 절대적이고 창조적인 승리입니다. 이미 승리하시고, 그 승리를 집행하시고, 원천적인 승리에서 최종 승리를 향해 나아가사 마지막 승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승리하고, 그리고 내일의 승리를 내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런고로 담대하라 ----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 우리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승리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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