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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담은 질그릇(고린도후서 4 : 7~18)

by 【고동엽】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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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담은 질그릇(고린도후서 4 : 7~18)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가진 소유에 대하여 무한한 신경을 씁니다마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진 바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바른 세계관을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계관은 곧 인생관을 말하며 인생관은 나아가서 내가 누구냐 하는 인간의 근본 문제에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무척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쁘다는 이유로 인하여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무엇엔가 끌려가거나 혹은 쫓겨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일이 잘못되었을 때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병중에 있을 때 인생에 대하여 한 번씩 묻곤 합니다.

생각했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다 흘려 보내고 이제 생각해 보아야 별 도리가 없을 때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유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교수님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가서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 말씀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무엇을 연구하며 어떤 책을 쓰며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여러 가지 계획을 항상 생각했는데, 병원에 들어와서 수술을 받으면서 생각의 방향이 달라져서 이제 내 인생을 어떻게 끝맺어야 하며 또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철이 드는가 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세계관을 종합해 보면 대략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지나치게 높여서 크게 생각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이며 또한 스스로 속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인간을 신처럼 생각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만능의 존재로 여겨서 무한한 힘을 가지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초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망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 라는 말까지 하게 되는데 사실은 철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중에 몇 가지나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너무 과시하는 것은 바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와 반대로 인간을 형편없이 낮추어서 동물로 보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것도 고등 동물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하고 가장 불행한 동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송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뛰어 다니며 자기의 할 일을 하는데 사람은 제 발로 걸으면서 인간구실을 하려면 30년은 키워야 되는 굉장히 사치스럽고 불행한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한다고 하지만 생각함으로 얻는 것은 절망과 고통과 더 나아가서는 자살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동물 이하로 낮추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자연보호 운동에서 많이 쓰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불교의 말로서 마땅치 않은 말입니다. 인간을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여 자연 순환의 한 과정 (process)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은 인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것을 먹고살며 또 자연을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닙니다. 인간을 동물 이하로 보는 것 역시 잘못된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인간을 신과 동물 사이의 중간 존재의 긴장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과 동물 사이에 사다리를 놓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존재로 보고 교육, 교양, 문명 문화 등을 여기에 관련시켜 이런 것들이 결여되면 야만인이라고 하여 동물처럼 생각하고 이것이 구비된 사람은 귀족이니 문화인이니 하여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지식을 가졌다고 하여 그 사람이 신과의 중간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 없다고 하여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오만한 생각입니다. 문화인이니, 귀족이니, 성인군자니, 철인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교만한 마음의 산물입니다. 어떤 때는 종교마저도 인간 이상의 인간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소개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인간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내용의 말씀을 아주 간결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질그릇과 보배에 대한 말씀으로서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질그릇은 약하고 천한 것이며 보배는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릇 중에는 금그룻, 은그릇, 나무 그릇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이냐 하면 약하고 깨지기 쉽고 천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질그릇에다 비유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어서 아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담"이라는 것은 명사로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여성명사로 말하면 흙이란 뜻이며, 형용사로는 에돔이라고 하며 붉다는 뜻으로서 흙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이 흙덩어리야"하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서 구웠는데 한 번은 너무 희게 구워져서 실패했고, 또 한 번은 너무 많이 구워서 까맣게 되어 실패했고. 세 번째 구웠더니 황색으로 잘 구워져서 이것을 아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황인종이 인간의 원종자라고 하는 말로서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흙으로 지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서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3:7에 의하면 같은 흙덩어리인데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흙에 속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흙덩어리 존재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흙만으로서의 인간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흙덩어리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겼다고 했고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들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몸을 만들었다고 했고 사람은 창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은 창조이며 근원에서 빌린 것 즉 흙에서 나온 몸은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create와 make는 다른 것이며, 사람은 복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갈대는 약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래도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사람이 사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은 사람이 못 됩니다. 생각함으로 비로소 갈대 같으나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값은 그 속에 있는 보화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값이 평가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떠나고 흙덩이만 남은 인간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육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육체 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오묘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보화를 가졌으면 그 값은 보화에 의하여 평가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적인 말씀은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보화가 그 속에 있는 동안 보화를 위해서 쓰여지고 보화에 속하여 있으므로 이 질그릇이 높이 평가를 받고 나아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화를 담은 질그릇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골동품 도자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값도 무척 비쌉니다. 그러나 그 골동품 자체는 값싼 흙덩어리지만 그것이 귀한 이유는 그곳에 담긴 역사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볼펜이 한 자루 있습니다. 그렇게 비싼 볼펜도 아니지만 이제는 누가 많은 값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볼펜을 쓴지가 1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다릅니다. 18년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는 이것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보화가 있으면 보화를 담은 질그릇의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은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그릇은 질그릇입니다.

당나귀가 정승을 태우고 다니면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당나귀가 어느 시간에 자기가 인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입니다.

어느 호텔의 주차장에서 운전기사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왜 싸우나 하고 한참 구경을 했는데 그 이유는 어느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니는 기사가 교만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기사면 어디까지나 기사지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닌다고 해서 자기도 높아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실수를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화를 담은 질그릇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질그릇 자체가 보화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여기에 좀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깊은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Christian Life,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인데 그것은 질그릇 인생이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중생하여 헌신적으로 충성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고 귀신을 내어쫓기도 하여 자랑도 가지고 영광을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 변하여 금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며 흙덩어리가 변하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문제는 바로 질그릇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여기에 있으며 흔히 말하는 실망이나 절망이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이 먼저 자기의 자기 됨을 시인하는데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잠시라도 자기 위치를 떠난 일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임을 알고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또 나의 나 됨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더욱 더 깊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화를 왜 질그릇에 가져야 하며 또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는데 질그릇은 왜 질그릇대로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paradox를 펴고 있습니다. 이것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오묘한 해답이 나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질그릇이 질그릇 그대로 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그 역설적인 관계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을 한번 더듬어서 마음속으로부터 진실한 간증을 하나님께 바쳐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느 때 하나님께 진실한 영광을 돌렸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공했을 때나 건강할 때가 아니라 실패하고 병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질그릇 됨을 시인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배가 질그릇 속에 담겨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높은 자랑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찬송이 그에게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구체적으로 간증을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포위를 해도 포위 당하는 것은 그릇뿐이며, 보화는 보화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귀하고 영원한 소망이 간직되어있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깨어지는 것은 그릇뿐이며 오히려 그릇이 깨어짐으로 보화의 가치가 더 노출되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되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간증하기를 이 질그릇이 깨어지는 순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바라보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 위에서 우리가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니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니 질그릇 안에 있는 영원한 보화를 생각함으로 지금 당하는 환난의 경한 것을 잠깐 참으면 영원한 영광의 귀중한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뉴욕 은행장 댁에서 며칠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은행장의 부인과 함께 파티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서 생각지 않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파티라는 것은 대개 음식은 변변치 않고 주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진주 목걸이를 했는데 가만히 보니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어요. 그래서 "사모님 그 진주 목걸이가 퍽 아름답습니다"라고 했더니 잘 어울리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서 농담으로 "그런데 그게 진짜가 아니라 가짜군요" 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하면서 사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 준 3천 불짜리 진주 목걸이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소중해서 외출할 때 목에다 걸고 거울에 한번 비춰 보고는 다시 벗어서 감추어 두고 똑같이 생긴 가짜 목걸이를 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부인이 진주 목걸이를 가질 수 없는 형편의 사람이었다면 제가 그런 농담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또 그 부인이 진짜 진주 목걸이가 없는 분이었으면 제가 한 말은 그분에게 다시없는 모독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런 농담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보화를 가진 사람은 가짜를 걸고 다녀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누가 가짜라고 해도 태연하게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보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모처럼 가짜를 걸고 나왔는데 그것을 가짜라고 했다면 뺨 맞기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처럼 소란하고 살벌한 것은 보화를 가지지 못하고 질그릇만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아서 중요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것, 이것이 보화입니다. 이 보화를 가짐으로써 질그릇은 가치 있고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간직하여 하나님의 손에 쓰여지는 그릇,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고 깨끗하게 다듬어지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 연약하고 천한 질그릇 같은 저희들을 부르셔서 보화를 담아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셔서 교만함으로 범죄 하는 일이나 또 이를 인하여 낙심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질그릇에 담긴 보화로 인하여 계속 새로운 가치에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고, 이 질그릇이 깨어지는 날 영원한 약속의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보배를 담은 질그릇(고린도후서 4 : 7~18)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가진 소유에 대하여 무한한 신경을 씁니다마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진 바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바른 세계관을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계관은 곧 인생관을 말하며 인생관은 나아가서 내가 누구냐 하는 인간의 근본 문제에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무척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쁘다는 이유로 인하여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무엇엔가 끌려가거나 혹은 쫓겨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일이 잘못되었을 때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병중에 있을 때 인생에 대하여 한 번씩 묻곤 합니다.

생각했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다 흘려 보내고 이제 생각해 보아야 별 도리가 없을 때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유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교수님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가서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 말씀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무엇을 연구하며 어떤 책을 쓰며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여러 가지 계획을 항상 생각했는데, 병원에 들어와서 수술을 받으면서 생각의 방향이 달라져서 이제 내 인생을 어떻게 끝맺어야 하며 또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철이 드는가 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세계관을 종합해 보면 대략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지나치게 높여서 크게 생각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이며 또한 스스로 속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인간을 신처럼 생각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만능의 존재로 여겨서 무한한 힘을 가지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초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망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 라는 말까지 하게 되는데 사실은 철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중에 몇 가지나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너무 과시하는 것은 바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와 반대로 인간을 형편없이 낮추어서 동물로 보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것도 고등 동물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하고 가장 불행한 동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송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뛰어 다니며 자기의 할 일을 하는데 사람은 제 발로 걸으면서 인간구실을 하려면 30년은 키워야 되는 굉장히 사치스럽고 불행한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한다고 하지만 생각함으로 얻는 것은 절망과 고통과 더 나아가서는 자살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동물 이하로 낮추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자연보호 운동에서 많이 쓰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불교의 말로서 마땅치 않은 말입니다. 인간을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여 자연 순환의 한 과정 (process)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은 인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것을 먹고살며 또 자연을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닙니다. 인간을 동물 이하로 보는 것 역시 잘못된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인간을 신과 동물 사이의 중간 존재의 긴장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과 동물 사이에 사다리를 놓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존재로 보고 교육, 교양, 문명 문화 등을 여기에 관련시켜 이런 것들이 결여되면 야만인이라고 하여 동물처럼 생각하고 이것이 구비된 사람은 귀족이니 문화인이니 하여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지식을 가졌다고 하여 그 사람이 신과의 중간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 없다고 하여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오만한 생각입니다. 문화인이니, 귀족이니, 성인군자니, 철인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교만한 마음의 산물입니다. 어떤 때는 종교마저도 인간 이상의 인간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소개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인간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내용의 말씀을 아주 간결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질그릇과 보배에 대한 말씀으로서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질그릇은 약하고 천한 것이며 보배는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릇 중에는 금그룻, 은그릇, 나무 그릇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이냐 하면 약하고 깨지기 쉽고 천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질그릇에다 비유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어서 아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담"이라는 것은 명사로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여성명사로 말하면 흙이란 뜻이며, 형용사로는 에돔이라고 하며 붉다는 뜻으로서 흙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이 흙덩어리야"하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서 구웠는데 한 번은 너무 희게 구워져서 실패했고, 또 한 번은 너무 많이 구워서 까맣게 되어 실패했고. 세 번째 구웠더니 황색으로 잘 구워져서 이것을 아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황인종이 인간의 원종자라고 하는 말로서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흙으로 지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서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3:7에 의하면 같은 흙덩어리인데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흙에 속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흙덩어리 존재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흙만으로서의 인간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흙덩어리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겼다고 했고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들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몸을 만들었다고 했고 사람은 창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은 창조이며 근원에서 빌린 것 즉 흙에서 나온 몸은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create와 make는 다른 것이며, 사람은 복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갈대는 약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래도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사람이 사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은 사람이 못 됩니다. 생각함으로 비로소 갈대 같으나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값은 그 속에 있는 보화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값이 평가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떠나고 흙덩이만 남은 인간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육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육체 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오묘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보화를 가졌으면 그 값은 보화에 의하여 평가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적인 말씀은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보화가 그 속에 있는 동안 보화를 위해서 쓰여지고 보화에 속하여 있으므로 이 질그릇이 높이 평가를 받고 나아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화를 담은 질그릇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골동품 도자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값도 무척 비쌉니다. 그러나 그 골동품 자체는 값싼 흙덩어리지만 그것이 귀한 이유는 그곳에 담긴 역사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볼펜이 한 자루 있습니다. 그렇게 비싼 볼펜도 아니지만 이제는 누가 많은 값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볼펜을 쓴지가 1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다릅니다. 18년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는 이것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보화가 있으면 보화를 담은 질그릇의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은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그릇은 질그릇입니다.

당나귀가 정승을 태우고 다니면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당나귀가 어느 시간에 자기가 인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입니다.

어느 호텔의 주차장에서 운전기사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왜 싸우나 하고 한참 구경을 했는데 그 이유는 어느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니는 기사가 교만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기사면 어디까지나 기사지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닌다고 해서 자기도 높아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실수를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화를 담은 질그릇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질그릇 자체가 보화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여기에 좀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깊은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Christian Life,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인데 그것은 질그릇 인생이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중생하여 헌신적으로 충성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고 귀신을 내어쫓기도 하여 자랑도 가지고 영광을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 변하여 금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며 흙덩어리가 변하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문제는 바로 질그릇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여기에 있으며 흔히 말하는 실망이나 절망이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이 먼저 자기의 자기 됨을 시인하는데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잠시라도 자기 위치를 떠난 일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임을 알고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또 나의 나 됨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더욱 더 깊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화를 왜 질그릇에 가져야 하며 또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는데 질그릇은 왜 질그릇대로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paradox를 펴고 있습니다. 이것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오묘한 해답이 나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질그릇이 질그릇 그대로 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그 역설적인 관계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을 한번 더듬어서 마음속으로부터 진실한 간증을 하나님께 바쳐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느 때 하나님께 진실한 영광을 돌렸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공했을 때나 건강할 때가 아니라 실패하고 병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질그릇 됨을 시인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배가 질그릇 속에 담겨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높은 자랑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찬송이 그에게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구체적으로 간증을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포위를 해도 포위 당하는 것은 그릇뿐이며, 보화는 보화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귀하고 영원한 소망이 간직되어있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깨어지는 것은 그릇뿐이며 오히려 그릇이 깨어짐으로 보화의 가치가 더 노출되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되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간증하기를 이 질그릇이 깨어지는 순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바라보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 위에서 우리가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니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니 질그릇 안에 있는 영원한 보화를 생각함으로 지금 당하는 환난의 경한 것을 잠깐 참으면 영원한 영광의 귀중한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뉴욕 은행장 댁에서 며칠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은행장의 부인과 함께 파티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서 생각지 않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파티라는 것은 대개 음식은 변변치 않고 주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진주 목걸이를 했는데 가만히 보니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어요. 그래서 "사모님 그 진주 목걸이가 퍽 아름답습니다"라고 했더니 잘 어울리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서 농담으로 "그런데 그게 진짜가 아니라 가짜군요" 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하면서 사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 준 3천 불짜리 진주 목걸이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소중해서 외출할 때 목에다 걸고 거울에 한번 비춰 보고는 다시 벗어서 감추어 두고 똑같이 생긴 가짜 목걸이를 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부인이 진주 목걸이를 가질 수 없는 형편의 사람이었다면 제가 그런 농담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또 그 부인이 진짜 진주 목걸이가 없는 분이었으면 제가 한 말은 그분에게 다시없는 모독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런 농담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보화를 가진 사람은 가짜를 걸고 다녀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누가 가짜라고 해도 태연하게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보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모처럼 가짜를 걸고 나왔는데 그것을 가짜라고 했다면 뺨 맞기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처럼 소란하고 살벌한 것은 보화를 가지지 못하고 질그릇만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아서 중요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것, 이것이 보화입니다. 이 보화를 가짐으로써 질그릇은 가치 있고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간직하여 하나님의 손에 쓰여지는 그릇,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고 깨끗하게 다듬어지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 연약하고 천한 질그릇 같은 저희들을 부르셔서 보화를 담아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셔서 교만함으로 범죄 하는 일이나 또 이를 인하여 낙심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질그릇에 담긴 보화로 인하여 계속 새로운 가치에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고, 이 질그릇이 깨어지는 날 영원한 약속의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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