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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누가복음 17장 22절~33절)

by 【고동엽】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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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처를 생각하라 (누가복음 17장 22절~33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사람들은 시간에 대하여 세 가지의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노력과 수고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에 막연히 기대를 걸고는 '이대로만 나간다면 어떠한 불치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늙지 않는 방법도 개발될 것이다'-----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끊임없이 생각을 몰고 갑니다. 막연한 것에 기대를 걸고 살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간은 돌고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려듭니다. 윤회설에 근거한 철학입니다. '이대로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흔히 거짓이면서 참말로 통하는 것 가운데 회춘(回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회춘이 있습니까? 좀더 나은 쪽으로 회전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rown life'--'던져진 생을 산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에게는 아무런 생활도 없고 다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던져진 듯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도 과거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시간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경륜하시며, 하나님께서 끝내시고 심판하실 것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는 특별히 얼마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득불 하나님의 계획표,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나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from God, by God, into God---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인자의 날"이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종말론적입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종말론에 중심을 두고 사역하시고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재자나 기독교 박해자들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하나같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어떤 독재자는 이런 말까지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라 말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왕이요 공산당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싫어할 뿐더러 아예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재림'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혁명하고 투쟁하여 유토피아의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갈 터인데 세상 끝 날이라니 얼토당토않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재림이라느니, 세상의 종말이라느니 하는 말이 전혀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지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기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내놓은 금령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종말론적 메시지로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내려온 것이 있습니다.

순순하게 바른 신앙을 지켜가는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이 그 근본을 종말론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치하로부터 온 편지를 보면 그 서두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가 받는 편지는 '목사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고난 가운데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제 방송을 듣고 멀리서 감사로 써보낸 편지는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운 때에 목사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입니까? 편지 내용 전체가 종말론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간단한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인자의 날에, 이 세상 끝 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 받을 때에 심판과 동시에 믿는 사람에 대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그 권세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발전단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면서 세상은 끝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종말론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예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은 끝나는 그 날까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심고 집을 짓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때는 반드시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예표적으로 상징적으로 예언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해보십시다. 현재적이면서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왜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첫째로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풍요한 생활을 했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국가건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죄 때문이요 병든 것도 죄 때문입니다.

숱한 혼란과 무질서가 모두 죄 때문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대가 살기 어려워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자가 부족합니까, 기술이 부족합니까, 지식이 모자랍니까? 바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씀이 줄기차게 전해졌습니다마는 끝내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셋째로, 의인 없음으로 망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그 의인을 보시고 형(形)을 유예해주실 것입니다. 심판을 연기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5장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赦)하리라(1절)."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을 때에 그 성은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구원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성밖으로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그 성을 멸망케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십시다. 롯이 머뭇머뭇하면서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성밖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런 후에 유황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십니다.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의인, 곧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나 롯이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마는 저렇듯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것이 넉넉한 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貫盈)하여 망하게 됩니다. 일전 제가 뉴욕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밤중에 목사님 몇 분과 뉴욕에서 제일로 죄악이 많다는 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넥타이를 풀어놓고 잠바 차림으로 한바퀴를 죽 둘러보고 나니 그 자리를 빨리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유황불이 떨어져 멸망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꼴들인즉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도 그렇게까지 추잡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실까, 얼마나 참기 힘드실까 하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죄악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롯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롯이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을 넉넉히 갖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를 영접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그 천사들과 상관하겠다고 몰려온 성 사람들에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내놓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든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하는 롯이고보면 그도 소돔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아주 죄악에 물들어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소도마이트(sodomite)--소돔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추잡하고 더러운 죄의 대명사로 쓰입니다. 곧 남색(男色), 수간(獸姦)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더러운 도시에 물들어 있던 롯이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긍정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롯은 아브라함의 의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18장 22절로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하러 가는 천사를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의인 오십을 찾으면 인구 5만이 되는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어 아브라함은 5인이 모자라는 45인이면, 아니 40인, 30인, 20인, 마지막으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도 더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기도가 누구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가 소돔 안에 사는 롯 때문인 것을 아십니다. 조카 아닌 할아버지라도 죄인이면 죽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제 조카가 거기에D쵹TXT릒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이런 아브라함의 의중을 왜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마침내 19장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2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롯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의가 전가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롯이 그전대로 손님대접 하나는 제대로 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을 떠나온 사람입니다. 한동안 아브라함과 함께 살다가 분가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아브라함을 본받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손님대접 하는 것만큼은 배워놓은 것입니다. 그 모본을 따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처럼 롯도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게 됩니다. 손님대접 하는 그 덕이 의의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부정적이기는 하나 롯에게는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죄악이 이렇듯 만연했으니 언젠가는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던 터에 천사가 멸하러 왔다고 하니 당연히 '아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망해야 할 것이 망한다는데 가타부타할 것이 있습니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너무 많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좀더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전 제가 시험관으로 나갔던 학교에 성적 사정회로 간다고 했더니 한 학생이 찾아와 성적을 미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며칠 있으면 알게 될 터인데 뭘 그러나 싶었지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한 과목이 떨어졌습니다. 만나서 "자네 논문 시험이 탈락되었더구만"하고 말하고는 대체 어떻게 나오나를 가만히 보았습니다. 첫마디가 마음에 듭니다.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너무 바삐 돌아다니다가 정성껏 시험 준비를 못했습니다. 떨어진 게 당연합니다." 믿음이 참 좋습니다. 불합격한 사람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간혹 채점이 잘못되는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내가 어떠한 처우를 받든,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저 북한 말 그대로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롯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것이다.' '예,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롯이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전적인 불 신앙입니다. 그러나 롯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고 탈출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마는 그의 아내는 또 다릅니다. 이름뿐인 교인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이루어진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끌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롯의 아내가 왜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멸망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겼습니다. 확실한 믿음도 없었을 뿐더러 그나마 믿음도 자원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사랑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유혹이 있다. 하나가 육체의 욕망이요, 둘이 잘났다고 하는 교만이요, 셋이 졸렬한 이기심이다.' 이기심에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시험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습니다. 롯의 아내에게는 세상 사랑하는 마음 물질 사랑하는 마음이 그냥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 못받았습니다.

로마를 여행하게 되면 나폴리 근방에 있는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하게 됩니다. 주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용암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발굴됨에 따라 죄악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술집의 흔적이 즐비합니다. 남녀의 끌어안은 모습이 그대로 돌이 되어 있는가 하면 개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웅크렸거나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지대에서 용암으로 뒤덮인 여자가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꽤나 멀리 피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가슴에 금은보화를 한아름 안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때문에 죽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끌어안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롯의 아내의 신앙은 하나의 갈등형이었습니다. 발걸음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마음은 뒤에 있었습니다.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났지만 영은 아직도 그 죄악의 도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모두 성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집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심에는 아직도 세상 것에 연연하는 욕심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깨끗하고 시원스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이라는 한 소박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별로 배운 바가 없는 터라 남의 자가용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돈이 많은 경건한 어른이었습니다. 한번은 멀리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성경을 읽다가, 그것도 예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읽다가 존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나는 하늘나라에 갈 테니 자네가 이 자동차를 갖게나." "주인님, 고맙습니다." "내 저택도 별장도 자네가 갖게나. 아내와 함께 살게." "주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존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내한테 그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는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존은 당장으로 주인에게 달려갑니다. 웬일이냐고 주인이 의아해합니다. 존이 주인에게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는 낮에 한 말을 취소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주인님은 주님 앞에 가셨는데 저는 남아 그 재산을 가지면 뭣합니까? 저도 재산은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과 함께 주님께로 갈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일단 구원을 받았음에도 마음과 생각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욕심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해를 방문하는 사람마다 전설이 긷든 그 소금기둥을 보게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한다. 너도 의는 부족하지만 도망하여 구원을 받으라' 했으면 그저 '주여, 감사합니다'하고 도망할 일입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뒤는 돌아다봅니까?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있는 의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받은 의입니다. 감지덕지하여 줄달음을 칠 것이지 왜 돌아보았습니까? 결국 나머지 식구는 구원을 받고 저만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확실한 믿음에 살 것입니다. 좀더 시원스럽게, 좀더 명랑하게, 좀더 통쾌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겠습니까? 언제까지 어중간하게 지낼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론적인 길을 가고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까? 이 세대는 끝납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회개 없는 세대라면 이대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지막 경고를 바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십시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누가복음 17장 22절~33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사람들은 시간에 대하여 세 가지의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노력과 수고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에 막연히 기대를 걸고는 '이대로만 나간다면 어떠한 불치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늙지 않는 방법도 개발될 것이다'-----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끊임없이 생각을 몰고 갑니다. 막연한 것에 기대를 걸고 살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간은 돌고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려듭니다. 윤회설에 근거한 철학입니다. '이대로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흔히 거짓이면서 참말로 통하는 것 가운데 회춘(回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회춘이 있습니까? 좀더 나은 쪽으로 회전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rown life'--'던져진 생을 산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에게는 아무런 생활도 없고 다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던져진 듯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도 과거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시간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경륜하시며, 하나님께서 끝내시고 심판하실 것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는 특별히 얼마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득불 하나님의 계획표,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나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from God, by God, into God---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인자의 날"이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종말론적입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종말론에 중심을 두고 사역하시고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재자나 기독교 박해자들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하나같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어떤 독재자는 이런 말까지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라 말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왕이요 공산당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싫어할 뿐더러 아예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재림'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혁명하고 투쟁하여 유토피아의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갈 터인데 세상 끝 날이라니 얼토당토않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재림이라느니, 세상의 종말이라느니 하는 말이 전혀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지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기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내놓은 금령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종말론적 메시지로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내려온 것이 있습니다.

순순하게 바른 신앙을 지켜가는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이 그 근본을 종말론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치하로부터 온 편지를 보면 그 서두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가 받는 편지는 '목사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고난 가운데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제 방송을 듣고 멀리서 감사로 써보낸 편지는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운 때에 목사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입니까? 편지 내용 전체가 종말론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간단한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인자의 날에, 이 세상 끝 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 받을 때에 심판과 동시에 믿는 사람에 대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그 권세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발전단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면서 세상은 끝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종말론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예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은 끝나는 그 날까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심고 집을 짓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때는 반드시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예표적으로 상징적으로 예언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해보십시다. 현재적이면서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왜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첫째로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풍요한 생활을 했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국가건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죄 때문이요 병든 것도 죄 때문입니다.

숱한 혼란과 무질서가 모두 죄 때문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대가 살기 어려워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자가 부족합니까, 기술이 부족합니까, 지식이 모자랍니까? 바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씀이 줄기차게 전해졌습니다마는 끝내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셋째로, 의인 없음으로 망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그 의인을 보시고 형(形)을 유예해주실 것입니다. 심판을 연기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5장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赦)하리라(1절)."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을 때에 그 성은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구원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성밖으로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그 성을 멸망케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십시다. 롯이 머뭇머뭇하면서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성밖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런 후에 유황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십니다.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의인, 곧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나 롯이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마는 저렇듯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것이 넉넉한 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貫盈)하여 망하게 됩니다. 일전 제가 뉴욕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밤중에 목사님 몇 분과 뉴욕에서 제일로 죄악이 많다는 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넥타이를 풀어놓고 잠바 차림으로 한바퀴를 죽 둘러보고 나니 그 자리를 빨리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유황불이 떨어져 멸망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꼴들인즉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도 그렇게까지 추잡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실까, 얼마나 참기 힘드실까 하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죄악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롯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롯이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을 넉넉히 갖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를 영접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그 천사들과 상관하겠다고 몰려온 성 사람들에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내놓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든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하는 롯이고보면 그도 소돔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아주 죄악에 물들어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소도마이트(sodomite)--소돔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추잡하고 더러운 죄의 대명사로 쓰입니다. 곧 남색(男色), 수간(獸姦)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더러운 도시에 물들어 있던 롯이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긍정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롯은 아브라함의 의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18장 22절로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하러 가는 천사를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의인 오십을 찾으면 인구 5만이 되는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어 아브라함은 5인이 모자라는 45인이면, 아니 40인, 30인, 20인, 마지막으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도 더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기도가 누구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가 소돔 안에 사는 롯 때문인 것을 아십니다. 조카 아닌 할아버지라도 죄인이면 죽어야지 별 수 있습니까? '제 조카가 거기에D쵹TXT릒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이런 아브라함의 의중을 왜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마침내 19장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2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롯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의가 전가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롯이 그전대로 손님대접 하나는 제대로 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을 떠나온 사람입니다. 한동안 아브라함과 함께 살다가 분가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아브라함을 본받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손님대접 하는 것만큼은 배워놓은 것입니다. 그 모본을 따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처럼 롯도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게 됩니다. 손님대접 하는 그 덕이 의의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부정적이기는 하나 롯에게는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죄악이 이렇듯 만연했으니 언젠가는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던 터에 천사가 멸하러 왔다고 하니 당연히 '아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망해야 할 것이 망한다는데 가타부타할 것이 있습니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너무 많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좀더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전 제가 시험관으로 나갔던 학교에 성적 사정회로 간다고 했더니 한 학생이 찾아와 성적을 미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며칠 있으면 알게 될 터인데 뭘 그러나 싶었지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한 과목이 떨어졌습니다. 만나서 "자네 논문 시험이 탈락되었더구만"하고 말하고는 대체 어떻게 나오나를 가만히 보았습니다. 첫마디가 마음에 듭니다.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너무 바삐 돌아다니다가 정성껏 시험 준비를 못했습니다. 떨어진 게 당연합니다." 믿음이 참 좋습니다. 불합격한 사람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간혹 채점이 잘못되는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내가 어떠한 처우를 받든,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저 북한 말 그대로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롯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것이다.' '예,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롯이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전적인 불 신앙입니다. 그러나 롯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고 탈출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마는 그의 아내는 또 다릅니다. 이름뿐인 교인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이루어진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끌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롯의 아내가 왜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멸망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겼습니다. 확실한 믿음도 없었을 뿐더러 그나마 믿음도 자원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사랑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유혹이 있다. 하나가 육체의 욕망이요, 둘이 잘났다고 하는 교만이요, 셋이 졸렬한 이기심이다.' 이기심에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시험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습니다. 롯의 아내에게는 세상 사랑하는 마음 물질 사랑하는 마음이 그냥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 못받았습니다.

로마를 여행하게 되면 나폴리 근방에 있는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하게 됩니다. 주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용암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발굴됨에 따라 죄악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술집의 흔적이 즐비합니다. 남녀의 끌어안은 모습이 그대로 돌이 되어 있는가 하면 개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웅크렸거나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지대에서 용암으로 뒤덮인 여자가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꽤나 멀리 피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가슴에 금은보화를 한아름 안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때문에 죽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끌어안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롯의 아내의 신앙은 하나의 갈등형이었습니다. 발걸음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마음은 뒤에 있었습니다.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났지만 영은 아직도 그 죄악의 도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모두 성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집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심에는 아직도 세상 것에 연연하는 욕심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깨끗하고 시원스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이라는 한 소박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별로 배운 바가 없는 터라 남의 자가용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돈이 많은 경건한 어른이었습니다. 한번은 멀리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성경을 읽다가, 그것도 예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읽다가 존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나는 하늘나라에 갈 테니 자네가 이 자동차를 갖게나." "주인님, 고맙습니다." "내 저택도 별장도 자네가 갖게나. 아내와 함께 살게." "주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존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내한테 그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는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존은 당장으로 주인에게 달려갑니다. 웬일이냐고 주인이 의아해합니다. 존이 주인에게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는 낮에 한 말을 취소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주인님은 주님 앞에 가셨는데 저는 남아 그 재산을 가지면 뭣합니까? 저도 재산은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과 함께 주님께로 갈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일단 구원을 받았음에도 마음과 생각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욕심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해를 방문하는 사람마다 전설이 긷든 그 소금기둥을 보게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한다. 너도 의는 부족하지만 도망하여 구원을 받으라' 했으면 그저 '주여, 감사합니다'하고 도망할 일입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뒤는 돌아다봅니까?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있는 의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받은 의입니다. 감지덕지하여 줄달음을 칠 것이지 왜 돌아보았습니까? 결국 나머지 식구는 구원을 받고 저만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확실한 믿음에 살 것입니다. 좀더 시원스럽게, 좀더 명랑하게, 좀더 통쾌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겠습니까? 언제까지 어중간하게 지낼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론적인 길을 가고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까? 이 세대는 끝납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회개 없는 세대라면 이대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지막 경고를 바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십시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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