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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움과 큰 기쁨(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守直)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철학 하는 능력이 바로 인간 됨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능력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됩니다. 생각 없는 인간을 가리켜 인간도 아니라고 말하는가 하면 생각이 짧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과거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기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한편 과거의 일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인과관계 즉 과거의 일이 원인이 되며 현재가 그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킵니다. 그런가하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현재가 원인이 되어서 미래가 올 것입니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미래가 암담한 것은 현재가 이 모양 이 꼴이기 때문입니다. 이리 심고서 저리 아름다운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씨앗이 실하지 못한데 추수 때에 무엇을 기대할 것입니까? 저 앞에 있을 미래, 막연할 뿐입니다. 합리적인 인과관계의 원리를 떠난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입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철학적인 것이 인간입니다. 이만큼은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생각과 사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사건으로 나타날 때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사실 생각만큼 제한적인 것도 없습니다.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생각한다고 한들 얼마나 생각하겠습니까? 생각지 못했던 사건에 부닥치면 깜짝 놀라기 일쑤입니다 마는 깊이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나의 생각이 얼마나 협소하고 보잘것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한대로 다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기대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맙니다. 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미국 남북전쟁 당시 두 친구가 열차 안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장군이요 한 친구는 연대장입니다.
지금은 장군과 연대장이라는 상하의 관계에 있습니다마는 고향에서는 허물없는 친구지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여보게 친구!'하며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화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아갔습니다. 연대장이 말합니다. "나는 역사적인 인물 예수가 초능력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네." 역사적인 인물이 어째서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채 하나님의 아들이니, 계시의 사람이니, 메시야니 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인간성이 그만 흐지부지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에 장군이 말합니다. "누구든 실제의 예수를 추적하여 연구하고 글로 쓰면 좋을 것이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침내 장군이 이 역사적인 일을 맡기로 합니다. 예수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예수의 인간성, 그 휴머니티를 잘 드러낼 소설을 장군이 쓰기로 했습니다.
장군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세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탐독하는 것은 물론 모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열심으로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의 의도는 오로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다, 순수한 인간이다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드디어 글이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벤허, 그리스도 설화(Ben Hur, a tale of the Christ)」입니다. 이 책은 어느덧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읽었습니다. 더욱 유명해지면서 영화로 제작됩니다. 잘 아시는 영화 「벤허」가 그것입니다, 그 저자는 다름 아닌 월레스(Wallace, Lewis)장군입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고 책을 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하는 동안에 서서히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얼마만큼 믿고 계십니까? 많은 지식이 없어도 이 사실 하나로 충분합니다. 많은 것을 믿지 못해도 예수님의 부활 하나만 온전하게 믿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면 부활 신앙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연한 사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나의 지식, 나의 믿음, 나의 실력, 나의 의지가 아직도 이 사건에 확실하게 도달하지 못해서입니다. 믿는 바와 사건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건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는 바가 확실한 사건일 때에 비로소 엄청난 생명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부활사건은 역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당한 저들의 모양새를 묘사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사색(死色)이 되었습니다. 죽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용하다 싶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기특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그 현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한편 즐거움과 기쁨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죽음을 미리 알고 믿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두고 '죽음을 미리 아는 동물'이라고도 정의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죽어본 경험이 없습니다. 남이 죽어 가는 것은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마는 정작 나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죽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해서, 또는 바로 믿지 못해서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 하나만 바로 알고 바로 믿어도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부활에 대한 믿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비참하게 죽으시는 모습을 십자가 밑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례도 치렀습니다. 저들 나름으로 굴속에 처넣고 돌로 막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죽으신 것이 확실하였는데 부활하셨습니다. 특별히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그리고 부활하실 것을 일삼아 예언하셨습니다. 앞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서른 세 살의 젊은이였습니다. 권능도 있고 인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왜 죽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리라, 나는 죽으리라'하십니다. 아마 제자들도 '죽으실 턱이 없는데'하고는 건성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죽은 다음에 부활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추상화하고 관념화하고 철학화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철학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백 번 지당한 일입니다 마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과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건이 다가올 때에 깜짝 놀랍니다. 죽은 자와 같이 될 만큼 엄청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오해가 많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똑바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따위의 윤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라붙었던 겨울나무가 봄이 되어 싹이 돋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 소생도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오는 것을 부활의 상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모독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부활이랄 수 없습니다. 재생입니다. 회생(回生)일 뿐입니다. 소위 이모탤리티(immortality, 영혼불멸)도 또한 부활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 부활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의 부활사건, 그리스도적 생명의 변화, 이것만이 부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 가운데 단 한 번 있은, 첫 열매로 있은 사건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기술한 말씀입니다. 부활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이 끊어져 부활하시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가, 어떠한 화학적, 물리적 작용이 일어났는가-----좀더 전기적, 생태적인 것을 알고자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역사이기에 그 자체에 대한 묘사나 기록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할 뿐더러 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극히 간단하게 설명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하지만 진실 되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득하려는 의도나 조작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순수합니다. 증언하려 하기보다는 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사건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프루프(proof)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트니스(witness)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인격적 설명을 합니다. 증언이 있을 뿐이지 증명이 없습니다. 인격 관계, 만남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인 인식일 뿐 분석적이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인 이야기가 아니요 자연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로지 인격적 관계로 설명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누구나 자식을 낳고 키웁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서 자랐습니다. 생명의 탄생 만큼 신비로운 사건은 없습니다. 과학적인 설명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생명의 시작,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성장 또한 신비롭습니다. 단지 하루에 우유 몇 병을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럭무럭 자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참 신통합니다. 신비롭습니다. 죽음도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심리학자 퀴블러는 죽음 자체를 연구하여 무려 다섯 권되는 책을 냅니다. 600명을 대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심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해보았지만 죽음 자체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비로운 사건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도대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생명 만큼 엄청난 신비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신비가 무엇입니까? 신비는 사실이 아닌 것입니까? 신비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비를 신화적인 사건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신비라고 하여 나의 인식 안에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다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경험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을 만날 수 있고 인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위에서 그러합니다. 사물을 이해하듯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가 증언을 합니다. 두 여인이 증거하고, 온 그리스도인이 증거하고, 이천 년에 걸쳐 수많은 순교자가 증거 합니다. 물질적인 증거가 있었다면 빈 무덤뿐입니다. 여러분은 세계 여행을 해보셨습니까?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바로 로마입니다. 로마에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무엇보다 귀중하게 보아야 할 볼품없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카타콤(catacomb)이 그것입니다. 우리 고향에는 산에 굴(屈)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카타콤이라는 것이 아마도 우리 고향에 있는 그런 굴과 같은 것이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 굴속에 사람들이 들어가 숨어 있었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입니다. 본디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파서 만든 굴입니다. 깊이깊이 파 들어가 그 속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처럼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는 것도 아니요 누가 지키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서 마음껏 예수 믿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카타콤입니까? 그 속에 갇혀서 신앙을 지키고 하늘나라의 생명말씀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왜 그 속에서 죽어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카타콤 속에서 부활신앙을 생각합니다. 참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화려한 궁전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영생에 있습니다. 부활생명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가면서 벽에 써놓은 글귀들, 해골들,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 그 지하동굴에서 죽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서서 생각합니다. 부활신앙의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수직하던 군사들이 증인이 됩니다. 수직을 하였기에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귀중한 진리는 '그의 말씀대로'라고 하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 4절)"-----성서적 근거보다 더 강한 증거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다. 한 젊은 청년이 '나는 며칠 후에 죽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또한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도 허무맹랑한 말이기에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정말로 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따지자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놀랄 일도 아닙니다. 또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살아나리라,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모두가 다 들었지 않습니까?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요새 유행하는 막말로 웃기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행한 모든 역사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리라 하셨고 부활하리라 하셨습니다.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하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제 부활이 눈앞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막을 길이 없습니다. 폭발적인 생명의 역사, 이 엄연한 역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던 근본이 됩니다. 그리하여 찬란한 순교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부활신앙과 부활사건에 대하여 오해도 없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이 모여서 부활사건이 되었다고 하는 불트만(Bultmann)유의 이해,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부활신앙이 정초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이 부활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이 확실히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부활신앙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러한 사건을 만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놀라운 두려움, 엄청난 행복과 기쁨-----이것이 부활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자신들의 불신앙과 잘못했던 것들이 다 깨어지는 순간에 엄청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함과 함께 새 생명력이 있고 반가움이 있고 사죄가 있고 환희의 극치가 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죄고 사망이고 핍박이고 사단이고 순교고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기쁨이 너무 엄청나서 슬픔도 원수도 고통도 없습니다.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며 여유 있게 주님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문제가 있습니까? 이 두려움과 이 큰 기쁨을 소유한 자에게는 승리와 사랑과 엄청난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감사가 있고 그에게는 영광과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 생명의 보장을 믿고 사는 사람은 오늘도 이 생명력에, 이 부활의 능력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守直)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철학 하는 능력이 바로 인간 됨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능력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됩니다. 생각 없는 인간을 가리켜 인간도 아니라고 말하는가 하면 생각이 짧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과거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기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한편 과거의 일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인과관계 즉 과거의 일이 원인이 되며 현재가 그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킵니다. 그런가하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현재가 원인이 되어서 미래가 올 것입니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미래가 암담한 것은 현재가 이 모양 이 꼴이기 때문입니다. 이리 심고서 저리 아름다운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씨앗이 실하지 못한데 추수 때에 무엇을 기대할 것입니까? 저 앞에 있을 미래, 막연할 뿐입니다. 합리적인 인과관계의 원리를 떠난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입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철학적인 것이 인간입니다. 이만큼은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생각과 사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사건으로 나타날 때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사실 생각만큼 제한적인 것도 없습니다.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생각한다고 한들 얼마나 생각하겠습니까? 생각지 못했던 사건에 부닥치면 깜짝 놀라기 일쑤입니다 마는 깊이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나의 생각이 얼마나 협소하고 보잘것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한대로 다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기대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맙니다. 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미국 남북전쟁 당시 두 친구가 열차 안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장군이요 한 친구는 연대장입니다.
지금은 장군과 연대장이라는 상하의 관계에 있습니다마는 고향에서는 허물없는 친구지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여보게 친구!'하며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화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아갔습니다. 연대장이 말합니다. "나는 역사적인 인물 예수가 초능력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네." 역사적인 인물이 어째서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채 하나님의 아들이니, 계시의 사람이니, 메시야니 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인간성이 그만 흐지부지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에 장군이 말합니다. "누구든 실제의 예수를 추적하여 연구하고 글로 쓰면 좋을 것이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침내 장군이 이 역사적인 일을 맡기로 합니다. 예수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예수의 인간성, 그 휴머니티를 잘 드러낼 소설을 장군이 쓰기로 했습니다.
장군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세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탐독하는 것은 물론 모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열심으로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의 의도는 오로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다, 순수한 인간이다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드디어 글이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벤허, 그리스도 설화(Ben Hur, a tale of the Christ)」입니다. 이 책은 어느덧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읽었습니다. 더욱 유명해지면서 영화로 제작됩니다. 잘 아시는 영화 「벤허」가 그것입니다, 그 저자는 다름 아닌 월레스(Wallace, Lewis)장군입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고 책을 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하는 동안에 서서히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얼마만큼 믿고 계십니까? 많은 지식이 없어도 이 사실 하나로 충분합니다. 많은 것을 믿지 못해도 예수님의 부활 하나만 온전하게 믿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면 부활 신앙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연한 사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나의 지식, 나의 믿음, 나의 실력, 나의 의지가 아직도 이 사건에 확실하게 도달하지 못해서입니다. 믿는 바와 사건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건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는 바가 확실한 사건일 때에 비로소 엄청난 생명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부활사건은 역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당한 저들의 모양새를 묘사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사색(死色)이 되었습니다. 죽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용하다 싶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기특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그 현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한편 즐거움과 기쁨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죽음을 미리 알고 믿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두고 '죽음을 미리 아는 동물'이라고도 정의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죽어본 경험이 없습니다. 남이 죽어 가는 것은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마는 정작 나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죽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해서, 또는 바로 믿지 못해서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 하나만 바로 알고 바로 믿어도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부활에 대한 믿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비참하게 죽으시는 모습을 십자가 밑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례도 치렀습니다. 저들 나름으로 굴속에 처넣고 돌로 막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죽으신 것이 확실하였는데 부활하셨습니다. 특별히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그리고 부활하실 것을 일삼아 예언하셨습니다. 앞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서른 세 살의 젊은이였습니다. 권능도 있고 인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왜 죽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리라, 나는 죽으리라'하십니다. 아마 제자들도 '죽으실 턱이 없는데'하고는 건성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죽은 다음에 부활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추상화하고 관념화하고 철학화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철학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백 번 지당한 일입니다 마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과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건이 다가올 때에 깜짝 놀랍니다. 죽은 자와 같이 될 만큼 엄청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오해가 많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똑바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따위의 윤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라붙었던 겨울나무가 봄이 되어 싹이 돋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 소생도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오는 것을 부활의 상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모독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부활이랄 수 없습니다. 재생입니다. 회생(回生)일 뿐입니다. 소위 이모탤리티(immortality, 영혼불멸)도 또한 부활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 부활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의 부활사건, 그리스도적 생명의 변화, 이것만이 부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 가운데 단 한 번 있은, 첫 열매로 있은 사건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기술한 말씀입니다. 부활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이 끊어져 부활하시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가, 어떠한 화학적, 물리적 작용이 일어났는가-----좀더 전기적, 생태적인 것을 알고자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역사이기에 그 자체에 대한 묘사나 기록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할 뿐더러 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극히 간단하게 설명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하지만 진실 되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득하려는 의도나 조작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순수합니다. 증언하려 하기보다는 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사건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프루프(proof)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트니스(witness)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인격적 설명을 합니다. 증언이 있을 뿐이지 증명이 없습니다. 인격 관계, 만남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인 인식일 뿐 분석적이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인 이야기가 아니요 자연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로지 인격적 관계로 설명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누구나 자식을 낳고 키웁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서 자랐습니다. 생명의 탄생 만큼 신비로운 사건은 없습니다. 과학적인 설명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생명의 시작,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성장 또한 신비롭습니다. 단지 하루에 우유 몇 병을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럭무럭 자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참 신통합니다. 신비롭습니다. 죽음도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심리학자 퀴블러는 죽음 자체를 연구하여 무려 다섯 권되는 책을 냅니다. 600명을 대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심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해보았지만 죽음 자체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비로운 사건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도대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생명 만큼 엄청난 신비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신비가 무엇입니까? 신비는 사실이 아닌 것입니까? 신비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비를 신화적인 사건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신비라고 하여 나의 인식 안에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다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경험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을 만날 수 있고 인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위에서 그러합니다. 사물을 이해하듯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가 증언을 합니다. 두 여인이 증거하고, 온 그리스도인이 증거하고, 이천 년에 걸쳐 수많은 순교자가 증거 합니다. 물질적인 증거가 있었다면 빈 무덤뿐입니다. 여러분은 세계 여행을 해보셨습니까?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바로 로마입니다. 로마에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무엇보다 귀중하게 보아야 할 볼품없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카타콤(catacomb)이 그것입니다. 우리 고향에는 산에 굴(屈)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카타콤이라는 것이 아마도 우리 고향에 있는 그런 굴과 같은 것이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 굴속에 사람들이 들어가 숨어 있었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입니다. 본디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파서 만든 굴입니다. 깊이깊이 파 들어가 그 속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처럼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는 것도 아니요 누가 지키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서 마음껏 예수 믿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카타콤입니까? 그 속에 갇혀서 신앙을 지키고 하늘나라의 생명말씀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왜 그 속에서 죽어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카타콤 속에서 부활신앙을 생각합니다. 참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화려한 궁전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영생에 있습니다. 부활생명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가면서 벽에 써놓은 글귀들, 해골들,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 그 지하동굴에서 죽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서서 생각합니다. 부활신앙의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수직하던 군사들이 증인이 됩니다. 수직을 하였기에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귀중한 진리는 '그의 말씀대로'라고 하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 4절)"-----성서적 근거보다 더 강한 증거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다. 한 젊은 청년이 '나는 며칠 후에 죽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또한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도 허무맹랑한 말이기에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정말로 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따지자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놀랄 일도 아닙니다. 또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살아나리라,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모두가 다 들었지 않습니까?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요새 유행하는 막말로 웃기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행한 모든 역사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리라 하셨고 부활하리라 하셨습니다.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하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제 부활이 눈앞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막을 길이 없습니다. 폭발적인 생명의 역사, 이 엄연한 역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던 근본이 됩니다. 그리하여 찬란한 순교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부활신앙과 부활사건에 대하여 오해도 없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이 모여서 부활사건이 되었다고 하는 불트만(Bultmann)유의 이해,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부활신앙이 정초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이 부활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이 확실히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부활신앙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러한 사건을 만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놀라운 두려움, 엄청난 행복과 기쁨-----이것이 부활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자신들의 불신앙과 잘못했던 것들이 다 깨어지는 순간에 엄청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함과 함께 새 생명력이 있고 반가움이 있고 사죄가 있고 환희의 극치가 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죄고 사망이고 핍박이고 사단이고 순교고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기쁨이 너무 엄청나서 슬픔도 원수도 고통도 없습니다.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며 여유 있게 주님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문제가 있습니까? 이 두려움과 이 큰 기쁨을 소유한 자에게는 승리와 사랑과 엄청난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감사가 있고 그에게는 영광과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 생명의 보장을 믿고 사는 사람은 오늘도 이 생명력에, 이 부활의 능력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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