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피에리우스 문하에서 수학한 가이사랴의 팜필루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음. 피에리우스는 오리겐의 사역을 계승했던 유명한 인물.
- 막시미우스 다이어의 박해 때, 스승 팜필루스와 함께 5권의 <오리겐의 변호>를 공저. 스승의 순교 후 제 6 권을 완성
- 혼란 속에서도 유세비우스는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 : <교회사>(Church History)를 저술 →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없었으면 고대 교회사 자료의 대부분이 멸실 가능
- 가이사랴의 감독직에 오른 지 수년 후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고 내부의 분열을 야기시킬 위험성이 있는 신학 논쟁 : 아리우스 논쟁 →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평화와 통일성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찬성 - 반대 - 찬성으로 선회]
- 콘스탄틴의 존재와 사역은 그의 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침
① 교회사는 특별히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본 인간 역사의 궁극적 목표가 곧 기독교임을 보여 주기 위한 변증문
②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에 이룩했던 평화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정하신 바라는 생각
③ 편찬된 역사는 단지 과거 사실들의 종합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궁극적 목적인 기독교 진리의 증명이라 할 수 있었다.
④ 신앙과 제국은, 마치 신앙과 철학처럼 상충되는 관계는 아니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철학과 제국의 극치점으로 이해 → 그의 시대 동향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움
- 유세비우스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 문제점 : 그의 작품은 기독교 신학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주제들 가운데 일부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줌 [예: 하나님 왕국의 도래] →
① 주님께서 곧 다시 재림하여 평화와 정의의 왕국을 이룩하시리라는 초대 교회의 소망을 무시하거나 혹은 이를 경시하는 경향,
② 콘스탄틴과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었음을??시사하는 인상
- 유세비우스에 대한 평가 : 콘스탄틴의 등장과 그가 가져온 평화야말로 대적들을 물리친 기독교의 최후 승리라는 주장은 당시 일반 신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느낌이 대변된 것 → 소위 “공식적 신학,” 혹은 “어용신학”의 저자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박해에서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기꺼워하던 수많은 신자들의 대변인
2. 수도주의 운동
- 또 다른 경향 : 당시의 평화를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목적의 달성이라고 생각했던 유세비우스와는 달리 새로운 상황을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타락이라고 비판한 자들도 있었다. 평안과 안전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적들이며, 비교적 평화스러운 시대에 이러한 대적들이 가장 날뛴다고 확신 → 새로운 문제 : 어떻게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겠는가?
- 수도주의의 기원 :
① 교회 내적 요인 → 독신에 대한 바울의 사상, 주의 임박한 재림에 관한 기대, 도래할 왕국의 증인으로서의 삶,
② 교회 외적 요인 → 고전 철학파들의 육체에 대한 이해 [영혼의 감옥, 혹은 무덤], 스토아 학파의 영향 [정욕은 진정한 지혜의 가장 큰 적이므로 지혜자들은 영을 완전케 하는 것과 정욕을 다스리는 데에 헌신]
1) 사막의 최초 수도사들
- 수도원 운동의 계속적 발전을 위한 무대를 제공한 것은 사막,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 수도사(monk) : 고독(solitary)을 의미하는 ‘모나코스’(monachos)에서 연유 [cf. 혼자 거주하는 수도사를 의미하게 된 “은자”(anchorite)는 원래 “도망자,” 혹은 “피신한 사람”등의 의미]
- 흔히 최초의 수도사로 알려진 폴과 안토니 : 그들의 삶은 각각 제롬과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전설과 같이 전해짐
- 수도사들의 문제점 :
① 사막 생활은 도시에 살면서 특권과 권력을 누리던 감독들로 구성된 교회의 계급 조직과는 맞지 않았다. [성찬의 문제]
② 감독들이나 교회 지도자들보다 성결하였으므로, 공식적 교회 지도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올바른 기독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혹,
③ 대부분 무지하였고 열광주의로 쉽게 흘렀으므로 더 교육받고 권력 있고 교활한 사람들에게 이용되기 십상
2) 공동 수도생활
- 점차 홀로 거주하는 수도 생활의 모습은 공동 생활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 수도사(cenobite)는 더 이상 완전 혼자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의미 [cf. “수도원적”(cenobitic)이라는 말은 “공동생활”을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 단어에서 온 것]
- 파코미우스 : 공동생활적 수도 운동의 창시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형태를 결정적으로 완성시킨 인물.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의 일상 생활은 노동과 예배로 구성되었는데 경건 생활의 이상으로는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채택.
- 모든 수도사들은 상사에게 복종, 계급제도는 명백하게 정의되어 있었다. 원장의 권위는 최종적인 것으로서 그는 전체 체제 속의 각 공동체를 주관하는 지도자들을 지명, 이전, 사임시킬 수 있었다.
- 여성들의 공동체들도 비슷하게 조직. 파코미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인 원장이 여성들의 공동체들까지도 주관하였다.
- 수도 운동의 이상을 확장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것은 이집트 사막의 생활을 답습하였던 은자(隱者)들이 아니라, 이러한 수도 운동의 모습 속에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장점과 가치를 발견하였던 일단의 감독들과 신학자들이었다 → ①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의 생애>를 저술하였으며 스스로는 수도사가 아닌 감독이었으나??그는 수도 운동의 이상에 따른 규율과 헌신과 희생을 자기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② 제롬은 <은자 폴의 생애>를 집필, 파코미우스의(규율집)을 라틴어로 번역, 스스로 수도사가 되었다.
- 투우르의 마틴 : 수도원적 이상을 일반화시키는데 가장 뛰어난 모범을 제공 [설피티우스 세베루스의 <성 마틴의 생애>]
- 애초에는 감독들의 감독들의 세속성과 사치에 대한 저항에서 발생했던 수도주의 운동이 결국 성직제도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남게 됨 → 수세기를 두고 진정한 감독은 가능한 한 수도주의적 이상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
- 처음 이 운동에 뛰어 들었던 인물들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피신했는데 반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수도주의 운동은 특히 서방에서는 교회의 구제와 선교를 담당하는 도구가 되었다.
3. 분파주의적 반동 : 도나티즘(Donatism)
- 새로운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시 :
① 수도 운동의 길을 택한 이들은 사막으로 찾아감,
② 당시의 기존 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선포하고 오직 자기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 [분파주의적 반동]
- 도나투스주의자들 : 대표적인 분파주의자들로서 변절자들에 관한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 또 다른 사례 → 3세기에는 이 문제로 로마에서 노바티안 분파가 초래, 4세기에 들어와서는 변절자들의 복원 문제에 관한 논쟁이 특별히 북 아프리카에서 격렬하게 진행됨
- 투옥과 고문을 견뎌낸 자들을 “고백자들”(confessors)이라 부르고 이들에 대한 교회의 존경은 각별했다. 일부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배반자”(traditores)라는 치욕적인 칭호를 받게 됨
- 카르타고의 감독직 선출을 계기로 문제가 불거짐 : 카이실리안이 새로운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보다 엄격한 파들은 이에 불복종하여 마조리누스를 따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그의 선출 직후 사망하자, 그의 도당들은 카사이 니그라이 출신의 도나투스를 선출
-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고자 했던 콘스탄틴은 이러한 감독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 아프리카에 주둔한 그의 관리인들에게 지시하기를 오직 카이실리안 및 그를 지지하는 종교인들만을 인정하도록 함. 그리고 면세 조처와 같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법률을 발함
- 도나투스파의 분리의 진정한 이유
① 신학적 이유 : 인효론 대(對) 사효론의 갈등 →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카이실리안에게 안수했던 세 감독들 가운데 하나는 배반자였으므로 카이실리안의 성직 임명 자체가 무효이며, 저들이 베푼 성례 역시 무효라는 것. 그러나 도나투스주의자들이 나머지 교회 일반에 갖게 된 적개심의 진정한 이유가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열심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 [펠푸리우스의 잔인성]
② 사회적, 지리적 이유 : 로마화 되지 않은 지역 대(對) 상당히 라틴화 된 카르타고 간의 갈등 → 로마 및 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외부로부터 침입해온 세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로마와 아울러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류층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사건--콘스탄틴의 등장과 아울러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됨--의 전개를 교회가 부패해 가는 과정으로 해석. 그런 가운데 카이실리안은 로마화 된 카르타고 기독교 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 그의 선출은 총독령 아프리카의 하층 계급들과 누미디아의 거의 모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를 받고 있었다.
- 240년경 “써쿰켈리온”을 구성 : 폭력에 호소한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 출신의 도나투스파 농부들로 구성되었다. 종교적 이상을 앞에 내세운 산적과 같은 존재. 이에 대하여 로마 당국은 역시 폭력을 사용, 이에 따라 이들을 설복하고, 학살하고, 무력으로 점령하는 박해들이 발생하였다. 제 7세기 모슬렘 정복 후에야 비로소 도나투스주의와 써쿰켈리온들이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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