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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선교】예화 모음 25편

by 【고동엽】 2022. 6. 11.
[처음 목차 돌아가기]
 
 

1. 하나님께 부요치 못한 자

성경;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버트 알링턴은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 지독한 수전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외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그의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고 내핍생활을 하였지만 기독교 선교에 대하여서는 관대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죽은 후에 그에게 보내온 선교사의 편지들 가운데서 하나를 인용해 보면 명백하게 해명될 것입니다.
"내가 다시 영국에서 살게 된다면 나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마루를 침대로 삼고, 상자를 의자와 식탁 삼아 단칸방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를 '고집스런 사람'이라고 분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외고집은 콩고에 그리스도 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그는 괴짜였지만 그의 괴벽스러움 때문에 수많은 콩고인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2. 슈바이처

어떤 철학 교수가 다음 날 있을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는 지저분한 책상에서는 연구를 할 수 없는 성격이라서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뭉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우편함에 들어있던 팜플렛, 잡지, 광고전단 등과 기타 우편물들로서,
`우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를 때는 아버지의 책상 위에 모두 갖다 놓을 것'
이라고 정한 규칙에 따라 딸 아이가 그의 책상 위에다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 날도 역시 교수는 책상 위에 잇는 서류뭉치들을 치우다가 파리선교사협회에서 발행한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그 잡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순간 발행 저절로 펼쳐졌는데 `콩고 선교의 필요성'이라는 논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교수는 그 논설을 단숨에 읽어내려 갔으며 그 날 밤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제 나의 연구는 끝났다!"
이 철학 교수가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였다. 어떤 선교사의 보고서를 우연찮게 읽게 된 그 `기회'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천부적인 학자인 슈바이처로 하여금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의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남은 여생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에서 보냈다.
그는 철학, 신학, 의학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도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눈에 우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3. 리빙스턴

영국에서 각종 병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위하여 의료선교기금을 모금할 때에 있던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 모금을 하려고 헌금그릇을 돌렸다. 우리는 헌금대가 주머니로 되어 있지만 서양은 세수대야처럼 둥글넙적한 은접시이다. 큰 은접시가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돈을 얼마씩 올려 놓았다. 그런데 한 꼬마 어린이 앞에 이 은접시가 이르자 이 꼬마는 널름 그 헌금용 은접시 위에 올라 앉더란다. 어이가 없어서 "왜, 거기에 올라 앉았니?" 하고 누가 물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대신 저를 아프리카를 위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아이가 훗날 위대한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었다. 참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생을 고스란히 바쳤다.
/한태완 목사 설교예화

4. 캐나다 선교회의 밀알,맥켄지

한국 땅에서의 캐나다 선교의 시작은 맥켄지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100달러를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내 놓으면서 한국에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교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맥켄지는 독립선교사로 1893년 12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맥켄지는 한국말과 풍습을 빨리 배우기 위해서는 외국인 사회를 떠나 한국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울을 떠나 황해도 솔내로 옮겨가서 한국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살았다. 이런 맥켄지의 태도는 한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주었다. 크리스마스때에 언더우드는 맥켄지를 위하여 빵,과일,야채,차,의복,음식 등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내가 만일 이것들에 맛들면 다시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맥켄지의 마지막일기에 의하면 그는 8개월 동안 외국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영어 한마디 쓰지 않고 지냈다. 이런 생활이 맥켄지의 정신과 육체를 쇠약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1895년 6월 22일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않된다는 생각이 든다. 땡볕 가운데 여행했고,밤늦게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 설교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며칠 후 맥켄지는 소래교회의 신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은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왔으며, 죽으면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시체는 교회 옆에다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렇게 해서 젊고 유능한 선교사 한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가 죽자 소래교회 신자들은 캐나다장로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는 진정서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캐나다장로교회는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맥켄지의 방식이 옳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맥켄지가 한국을 사랑했고,복음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했던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5. 더프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 박사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오랫동안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늙고 나이가 많아서 고향에 그 뼈를 묻기위해 귀국하였습니다.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선교사를 보낼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사의 치료로 깨어난 후 자기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단상에 다시 세워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그는 단상에 서서 백발이 성성한 흰머리를 숙이며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할 때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이 선교사를 보내고자 하는데 한사람의 지원자도 없다니 정말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내 고향 스코틀랜드에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한 사람이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백골을 인도의 갠지스 강변에 묻으러 왔다고 말하겠습니다" 고 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에 선교하려 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의 잠자던 심령을 깨우는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젊음이 선교를 위해 바쳐질 때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6. 와서 보라

개화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의 사는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사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부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평양 부근 조앙리라는 동네에 무당 심씨가 살고 있었는데,그는 선교사들의 사는 모습이 매우 궁금했다. 그는 동네 여인들에게 “서양귀신들이 산다는 곳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봅시다”라고 말했다. 조앙리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선교사 집을 구경가게 되었다. 이들이 맨 처음 놀란 것은 선교사 부인이 얼굴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텃밭에서 과일과 채소를 가꾸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들이 밖에서 일할 때에는 항상 얼굴을 가리는 것이 양반집의 모습인데 선교사 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선교사 부인은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교사 부인은 이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이 선교사의 집은 겉으로는 한옥이었지만 내부는 서양식이었다. 마루 대신 응접실이 있었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국 여인들의 눈에 비친 집은 너무 깨끗했다. 무당 심씨는 “세상에 산신령이 사는 곳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선교사 부인은 방문객들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처음 서양식 집에 온 이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줄을 몰랐다. 겨우 자리가 정돈되자 선교사 부인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분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귀신을 섬겨 재앙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당 심씨 일행은 선교사의 집에서 나오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영구라는 소년에게 이 서양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이 소년은 “그들과 지난 몇 달 동안 같이 지냈는데 남자가 그 여자를 때리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어요. 또 그 여자가 큰소리 내는 것을 한번도 못 들어 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남자들의 폭력 아래 살아왔던 한국 여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7. 언더우드와 키니네 장사

초기 한국 교회 사역자들은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처음 한국 교회 사역자들은 대부분 서울과 지방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석, 소정의 성경교육을 받고 자기 교회로 돌아가 말씀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 선교사들이 한국인 사역자들을 돕는 방법은 간접적이었다.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게 하고 그 수입의 일부를 갖게 하든지 간단한 진료소를 만들어 약을 팔게 해주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경우가 해열?강장제 및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 판매였다. 조선에도 키니네의 효능이 널리 알려져 매우 비싸게 팔렸다. 선교사들은 여기에 착안하여 외국에서 키니네를 수입하여 한국인 사역자들을 통하여 싸게 보급하고자 하였다. 선교사들의 주목적은 키니네 판매를 통해 한국인 사역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의 믿을 만한 약품회사에 연락,키니네를 아주 싼 가격에 대량으로 주문하였다. 약병에는 ‘키니네는 육체의 어떤 병에는 효과가 있지만 이 약으로 인간의 영혼은 구할 수 없고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약은 따로 있다’는 전도 문구를 부착하였다. 한국인 사역자들은 이 키니네를 판매,그 수익금의 일부를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처럼 판단됐다. 하지만 1년쯤 지나서 판매망이 확장되었을 때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사업이 본래적인 선교 사역에 쏟아야 할 시간과 노력을 너무 많이 빼앗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무역상들은 선교사들이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쏟는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한국인 사역자들에게도 문제를 일으켰다. 사역자들이 돈에 관심을 갖게 돼 영적 관심이 육적 관심으로 바뀌고 말았다.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는 키니네 판매 사업을 중지하였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8. 지게꾼 전도자

한국인의 전염병 치료에서 보여준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염병이 창궐한 어느 날 아침 일찍 언더우드가 병원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 품팔이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시간에 저렇게 급히 길을 가는 저 외국 사람이 누구요?”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오? 우리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병자를 돌보면서 일하는 예수쟁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조선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쟁이’가 언더우드의 별명이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1895년 여름에 창궐했던 장티푸스를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지켜본 조선인 가운데 신화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선교사와 기독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하는 일들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시내에서 약 16㎞ 떨어진 경기도 행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믿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내놓았다. 거기서 아이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스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소문이 언더우드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언더우드는 이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세례를 주기 위하여 행주를 방문했다. 언더우드가 행주에 도착하였을 때 마을 입구에서 2∼3㎞ 떨어진 곳까지 아이들이 마중 나와서 찬송을 부르면 언더우드 일행을 영접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그 마을이 복음으로 변화된 것을 목격했다. 주막 주인은 굶을 각오를 하고 술을 모두 길에 버려서 가족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또 점쟁이는 자기의 생계수단이었던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을 치워버렸다. 복음이 그 마을을 변화시킨 것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9. 현대판 사도행전의 역사

어느 중국 가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정에 30여명이 모여 숨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가정의 아들과 어머니가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자주 집을 비우자 속이 상한 남편이 “내 며느리는 반드시 믿지 않는 여자로 내가 고를 것이다”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반드시 예수 믿는 여자를 고르셔야 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속이 더욱 상한 아버지는 그만 가정 교회를 경찰에 고발해 버렸습니다. 경찰에 붙잡혀간 30여명의 성도들은 모두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몸으로 때우겠다며 30명이 유치장에 앉아 기도하고 찬송을 불러댔습니다.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전도해 버렸습니다. 시끄러운데다 세끼 밥까지 먹여주어야 하니 경찰도 낭패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불러 그까짓 일로 고발했느냐고 호통을 치고 성도들을 내보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사도행전 시대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9. 총을 놓았기 때문에

아프리카 오지의 한 마을이 복음화되었다. 그 까닭은 이렇다. 어느 날 서양인 선교사가 마을 근처에 선교 캠프를 세운 후 전도에 나서자 동료 선교사가 “이 근처는 매우 잔인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반드시 총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면서 총을 주었다. 그가 마을에 접근했을 때 원주민 전사들이 창을 겨누며 다가섰다. 그는 웃으면서 미리 배운 원주민 말로 “저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을 더욱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원주민 전사들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포위했다. 긴박한 순간 총 잡은 손에 힘을 준 그는 잠시 갈등하다가 총을 내려놓았다. 결국 그는 원주민 전사들의 공격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들이 선교사 주검 곁으로 다가갔을 때 실탄이 장전된 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랑은 총보다 위대했다. 그들은 거룩한 희생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후 마을 전체가 복음화된 것이다. 사랑의 힘으로,순교의 밀알로….
/김상길 국민일보 논설위원

10. 주님의 뜻이라면

예수전도단에서 파송한 이용주 선교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원래 큰 배를 타는 마도로스였다. 1등 항해사였던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지금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우물 파주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에게 선교 현장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고, 부르심에 충성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제일 힘든 재난 지역에 가서 우물을 파주는 NGO 사역을 하고 있다. 보통 우물을 한 번 파고 나면 체중이 6kg 정도 준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이 된다. 한번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우물을 팠다고 한다. 가뭄이 심해서 땅은 땅대로 굳어 있고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목마름에 힘들어 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님과 동역자들이 수고한 결과 그 우물에 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이 나오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너무 좋아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춤을 추는데,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 “용주야, 고마워! 나는 네가 너무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순간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것이 다 녹고, 감격과 기쁨이 솟아올라 더 충성되게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오늘도 그 선교사와 동역자들은 세계의 분쟁 지역이나 전쟁 지역에 땀흘리며 우물을 파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일에 충성할 때 그분은 그 일이 아무리 작다하더라도 순종하는 우리로 기뻐하실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 「얼음냉수」/ 문희곤

* 기도: 제 앞에 어려움이 놓여 있더라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며 전진하게 하소서. 마음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인도하여 주소서.

11. 선교사와 마피아 두목

우리 교회에서 파나이섬에 파송되어 선교하는 강 요한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11년 한 곳에 머믈면서 107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집안으로 돌이 빈번하게 날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번에는 교회를 세울 돈을 가지고 가다가 강탈당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마피아단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 선교사는 마피아단 두목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당신 부하가 내게 강탈한 돈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돈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을 들은 단장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두목은 부하들과 오픈카를 타고 강 선교사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예배를 드려도 돌이 날라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12. 병원장과 선교사

제가 아는 중국의 어느 선교사님은 우리나라 최고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큰 병원의 원장님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자신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중국의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중국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을 세우는 등 열심히 의료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님,한국의 안정된 직업과 명예를 포기하시고 중국의 선교사로 가셨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선교사님의 대답. “저는 천국의 영광을 위해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편안하게 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우리도 이 선교사님처럼 천국의 영원한 삶을 위해 우리가 가진 힘과 열정과 물질과 생명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이 땅에서 심는 것만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순간에 큰 상급으로 나타납니다.
/피영민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13. 준비되어 있는 선교사

요즘 들어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무척 높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기본적인 신앙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단순한 타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그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운운하기 전에 잠깐 우리의 주변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이나 교인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내건 좋은 표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어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가정과 교회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14. 아펜젤러의 짐 속에 든 한글 성경 이야기

미국 감리교회에서 우리 나라에 처음 파송한 선교사는 아펜젤러(H.G. Appenzeller)목사님이셨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1885년 2월 일본에 도착해 2개월 가량 머물며 입국 준비를 하였는데, 그 때 이수정에게 한국 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는데, 그 때 그의 짐 속에는 한글로 된 성경인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 (마가복음)가 들어 있었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어느 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 간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 예입니다. 바로 아펜젤러 선교사가 갖고 들어 온 한글 성경이 2년 동안 이수정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성경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수정은 우리 민족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복음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 나라에까지 이르게 만든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이었습니다

15. 식모 선교사

구약 성경에(왕하5:2) 시리아 대제국의 부왕 같은 직위에 있는 군대 장관 나아만의 처의 몸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이름도 기록이 되지 않고 다만 성경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든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 온 작은 계집 아이'로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통분하고 증오스런 원수였던가. 조국을 방화 약탈하고 가족들은 희생되고 자신을 종으로 만든 바로 그 원흉의 집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작은 노예 소녀는 노예 소년 요셉처럼, 포로 소녀 에스더처럼, 다니엘 소년처럼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고 은총을 입어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는 던져진 곳에서 신앙의 최선을 다한다. 이 작은 소녀는 문등병에 걸린 주인을 도와 주고 싶었다. 그녀의 지성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왕 사이의 외교 채널까지 동원되어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 병고침을 받고 온 가족이 여호와를 믿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식모 소녀를 통해 시리아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예수칼럼 : 김준곤-

16. 쓰러져도 좋으리

본문: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멜빌 콕스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간 첫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1833년 그는 당시 `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졌던 서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가 그곳에 복음을 들고 가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라이베리아로 가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며 백인들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콕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고, 그리고 목표를 굳게 잡았습니다.




웨슬리안 대학에서 한 학생은 `당신의 관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비웃었다. 이에 콕스는 그 학생에게 `내가 아프리카에서 죽는다면, 나의 묘비에 글을 써주시오`라고 응답했다. 그 학생은 `무엇이라고 쓸까요?`라고 물었다. `천 명이 쓰러져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올 수 있다면`
멜빌 콕스는 라이베리아에 도착한지 다섯 달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 주님처럼 서른셋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천 명이 쓰러져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온다면 내게 죽음도 두렵지 않아 이 선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 수천 명이 쓰러질지라도 아프리카가 구속되어야 하리. 내가 알고 싶은 것 하나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살게 되었다는 것`
/정존수 목사

17. 중단할 수 없는 일

1800년경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는 영국의 힘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국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영국의 선교사들은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다. 영국은 세계 선교의 최강국이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으며, 1900년대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선교사들은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는 세계 선교의 최강국이다.
현재 한국은 작은 면적에 그나마 분단된 나라이며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에 관한한 빈국이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나라 사람도 한국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선교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지난번 아프간에서의 큰 아픔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교가 위축되거나 중단될 수 없다. 선교는 국력이다.
/윤여풍 목사(충성교회)

18. 윌리엄 캐리가 걸어간 길

윌리엄 캐리와 의사 한 사람이 인도로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함께 가기로 한 그 의사가 선교 자금을 횡령한 데다가 캐리의 두 자녀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캐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선교에 집중했습니다. 얼마 후, 그의 아내 도로시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그렇지만 캐리는 세계를 삼킬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사역한 끝에 인도인 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인도 토착 언어를 공부하여, 마침내 신약성경을 인도의 24가지 토착어로 번역해냈습니다. 그가 번역한 인도어 성경은 지금까지도 인도 선교사들을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험난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길 끝에서 우리를 맞아주실 주님을 기억하면서 끝까지 달려가십시오

19. 선교사는 죽어서도 말한다.

서울 합정동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 이 나라를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 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이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다. 선교사들의 묘비는 생명력 넘치는 메시지가 되어 방문객들의 영혼을 두드린다. 묘비명에 담긴 애절한 사랑도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온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명들이 예리한 표상처럼 가슴에 파고든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
라"(A.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캔드릭). A.R.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이 다시금 방문객들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은혜로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값없이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고향을 떠나 찾아가야 할 제2의 고향은 어디인가?




* 기도: 사랑의 주님, 함께 교제하며 말씀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들만을 바라보거나 고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떠나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소서.

20. 침묵을 깨고 갚을 때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피트라는 청년은 막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혼 여행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습니다. 5명 선교사들은 아내들을 데리고 같이 가려다가 우선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 두고 상황을 보려고 먼저 들어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비행기를 타고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65년 1월 2일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 무전을 보냈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뒤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이튿날 구조 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5명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총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5명 모두가 인디언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이루자. 우리도 같이 죽어야 하는 데 우리를 두고 떠난 것은 우리가 후발대로 들어가라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것이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들어가 그 곳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을 살해했던 5명 인디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1천여 명의 주민들은 모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침묵을 깨고 갚을 때가 있어야 합니다.



21. 선교

미얀마에서 선교사로 눈부신 활약을 한 저드슨은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어느 큰 교회의 부목사로 초청되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부러움과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해외 선교에 꿈이 있었던 그는 그 초빙을 거절하고 불교의 나라인 미얀마에 선교사로 자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그의 결정을 만류하고 걱정스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선교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명의 세례 교인을 얻는데 걸린 기간은 6년이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헌신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는 6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으며 전 세계 선교사의 마음속에 새로운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요즘은 나와 내 가족만 돌보기도 참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맡겨져 있습니다. 복음 증거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때로는 이 일로 인해 많은 제약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신념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 기도: 선교의 사명을 주신 주님,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악의 세력과 힘써 싸우게 하소서.

22. 이름 없는 하나의 돌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지도 교수는 “자네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왜 학업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나려 하는가? 그곳에서 선교하다가는 1년 내에 죽게 될지도 모르네. 그것은 미친 짓이야”라고 충고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오지로 뛰어든 그 학생은 끝내 원주민들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스승에게 이러한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저는 아프리카 선교 사업이 마치 커다란 다리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량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땅 속에 얼마나 많은 돌이 묻혀야 하는지를 교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아프리카의 땅 속에 묻히는 이름 없는 하나의 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함으로써 아프리카의 땅 위에 복음의 열매가 맺힐 것을 확신하면서.”
/ 신경직

23. 아프리카 선교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설교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라비아 교파 출신인 조지 스미스라고 하는 청년이 아주 신앙이 좋아서 자기는 아프리카에 가서 한 평생을 바치고 그 땅에서 죽으리라 생각을 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후원자를 얻어서 아프리카로 갔는데 몇 달 되지 않아서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합니 다. 그는 몇 달 동안에 딱 한 사람 전도했습니다. 한 사람밖에 전도를 못 했는데 추방을 당해서 그는 아프리카를 향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몇 달 후에 죽었습니다. 몇 년 후에 조사해 보니 이 조지 스미스가 전도한 바로 그 사람이 거기서 전도인이 되어서 훌륭한 역할을 해서 정확하게 만삼천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심어서 많은 사람이 거둔 것입니다.

24. 한 알의 밀알

미국 매사츄셋츠주 살렘 태버나클 회중 교회에서 버어마 랑군에 아도니람 젇슨 목사 부부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곳엔 크리스천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보스톤의 대교회 목사로 초빙하는 것도 마다하고 버마로 가서 십 여년을 수고했으나 한 사람의 영혼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낙망하지 않고 버어마 말을 배워 기독교 교리를 번역하였다. 어떤 날 한 사람이 찾아와 교리에 대해 묻고는 가버렸다. 한 해가 또 지났다. 여전히 공백상태였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그로인해 건강이 나빠졌다. 그후 2년이 지나 몽나우라는 사람이 주께로 나왔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큰 시련이 뒤따랐다. 버마 왕은 그를 투옥시켜 버렸다. 아내와 아이들이 죽어갔고, 그의 재혼한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드디어 1829년 미국 선교본부에 "먼동이 터오고 많은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가 왔다. 여기에 감동받은 사무엘 프랜시스 스미쓰 박사는 "예수의 전한 복음"(264)의 찬송을 썼다. 그는 버마 영어사전도 펴냈다. 1850년 그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으나 100년 후 그 땅에는 20만 명이 넘는 많은 알곡의 결실을 보았다.

25. 선교의 사명

중국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가 어느 날 고국에 돌아와 선교사 후보생들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특별히 중국 선교의 사명을 갖고 준비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테일러는 질문했다.“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선교사로 중국에 가려고 하십니까?” 그중 한 사람이 자신있게 대답했다.“예,중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그것이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그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선교지에서 예상치 못한 역경과 어려움에 부닥치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듣자 한 사람이 그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선교사님은 무슨 동기로 중국에 가셨습니까?” 그러자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 있어서는 오직 하나의 동기밖에 없습니다.그들을 사랑해서입니다”




성경은 오직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아가페 사랑만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고린도전서 13:7).
/김의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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