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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불평 】예화 모음 25편

by 【고동엽】 2022. 6. 10.
[처음 목차 돌아가기]
 
 

1.원망,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할 때, 그들은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하는 말은 요사이 말로 “예수 안믿을 때가 더 좋았다. 천당이구 뭣이구 다 귀찮다. “에이, 교회 그만두자”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귀의 종노릇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때가 더 좋았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실 말입니까.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말, 불평의 말을 다 들으시는 분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찼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쇠고랑이 풀려져 나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옥사장과 그 가정을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하면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더 큰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밖에 있는 자유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더구나 저주받고 지옥에나 가야 마땅한 사람이 구원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으로 감사는 하지 않고 불평이나 하고 원망하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해하시고 괘씸히 여기시겠습니까? 불평, 원망은 축복을 도망가게 하고, 마귀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2.원망과 불평은 모든 행복과 건강을 빼앗아 간다

불평마귀에 잡힌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의복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끌어들이는데 행복합니까? N.V.Peale 박사의 글에 보면 어떤 여자가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반지를 끼고 기차를 탓는데,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는 음식 맛이 없다느니 종업원이 불친절하다느니 기차는 왜 이렇게 더럽냐느니 등등 계속불평만 늘어놓더랍니다. N.Peale 박사는 그 여자를 “불평 만드는 공장”이라고 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평 원망하는 사람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자신도 결국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거나 죽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신경쇠약이나 노이로제나 위장병, 불면증 등에 걸려 건강한 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했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10장 13절)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장 6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 불평 대신에 기도에 힘씁시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네가 불평거리를 광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상품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나는 구두가 없는 것을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사람들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5:9)
원망 불평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





3.불평에 관한 금언

0 불평은 습관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악습이며 감사를 모르는 자의 넉두리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감사 외에는 다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0 불평은 불평을 낳고, 그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낳는다. 불평으로 가득한 가정이나 사업장에 축복이 내린 것을 보지 못했다.(김경선)
0 우리가 불평을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커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제레미 테일러)





4.불평입니까? 찬양입니까?

불평거리가 없으면 아주 실망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문제점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큰복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병에 대해 불평하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진찰결과 전혀 이상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애처로운 소리로 울며 불평합니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쑤시다. 안 아픈 곳이 없다......"
의사 소견으로는 모두 상상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만일 그들이 받은 복을 세어보기 시작하면 곧 그들의 병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연세가 드셨고 가진 것이 없으며 몸이 약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건강이 어떠세요?"
"아, 나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아요. 나는 이가 두 개만 남아 있지만 다행히도 그 둘이 아래 위로 마주 보고 있거든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5.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온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원망과 불평은 사탄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에게 불평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하면서 소 떼, 양 떼 모두 다 도적맞고 불타 죽고, 자녀 10남매가 대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입으로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1장 22절)고 했습니다. 마귀는 욥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게 하려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갖다 주었지만 실패하고 도망갔습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고 구더기가 버글버글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결코 그 입술로 범죄 치 않았습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평이 자꾸 나올 때는 내가 기도가 부족하고 은혜가 떨어져서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구나 하고 빨리 회개하고 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한태완 목사





6.네탓이오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 보면 한결같이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 작은 도둑은 감옥에 있고 큰 도둑은 다 밖에 있다. 누구누구 때문에 감옥에 왔으니 나가면 가만 안 둔다' 하며 남에 대한 원망(怨望)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도 누군가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면서 자기의 불행이 남(他人)때문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너 때문에'를 청산하지 않는 한, 남에 대한 원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뀌는 게 아니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빛이요 생명이신 하나님, 그분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 계십니다. 내 속에 계신 분을 발견하는 순간이 바로 '네탓이오'가 사라지는 순이 될 것입니다. ⓒ최용우





7.불평과 원망

구약성경 가운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민수기이다.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불평과 원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목이 마르다고, 길이 나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다베라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줘서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4∼5절)이라 하며 불평과 원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불평과 원망의 속성은 점점 심해진다는 점이다. 즉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낳고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는다. 마침내 불평은 습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불평의 내용을 살펴보면 문제가 커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불평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비신자들의 형통은 비교하는 데서 오기도 하고 별로 믿음이 없는 다른 신자들이 잘사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재판장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 불만 바이러스가 독감보다 더 강하게 역사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불만 바이러스는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불평과 원망이 감사로 변한다. 필자도 지금까지 내가 원한 것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했으나 지난뒤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뤘고 더 많이 받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불평과 원망은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평과 원망의 병을 치유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다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감사의 조건을 삼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내게 가장 좋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기준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신성종 목사<대전 월평동산교회>





8..미련한 사람

다마스라는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갚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계속 망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계획에서부터 결재를 받는 것까지 모두 주님께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은 주님께 맡기고 전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러자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망하고 있는 사업을 돌보지 않으니 더 망할 것이라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일어나기 시작했고, 날로 번창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빗나간 행동을 하고서 나중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이중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자기 길을 굽게 하여 죄를 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원망함으로써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 주시므로 잘못된 일도, 원망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
* 묵상: 당신은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있습니까?





9.똑같은 돌부리에

어떤 사람이 집 앞 골목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다음날 또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신경을 곤두세웠는데도 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돌부리를 비켜간다고 했는데도 또 넘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또 넘어져 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돌부리를 방치한 행정당국을 욕했습니다.
그 다음 날 또 넘어져 이번에는 길 가운데 돌부리를 보고도 지나치는 무심한 국민의식을 한바탕 실랄하게 욕했습니다.
그 다음날 또 넘어져 대통령은 뭐하냐고 한바탕 대통령을 씹었습니다.(대통령이 할 일이 없어서 너희 동네 골목길의 돌부리를 뽑냐?)
그 다음날 또 넘어져 '말세야 말세...'라며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오늘도 또 넘어질 것입니다.
넘어져서 온갖 핑계와 변명거리를 다 찾아내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아, 그냥 자기가 뽑아 버리면 다시는 안 넘어질 것을 /최용우





10.소 잃고 외양간 고치랴

가난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낡고 좁은 자신의 집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청년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식자인 노인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충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청년에게 수탉 한 마리를 사서 집안에 풀어놓으라고 충고했습니다. 노인의 방법을 듣고 청년은 시키는 대로했지만 사방에 날리는 닭 깃털과 흩어져 있는 닭모이와 똥 때문에 집안은 전보다 더 좁고 더러워지고 냄새까지 났습니다. 다시 청년이 노인을 찾아가자 이번엔 염소 한 마리를 수탉과 함께 집안에서 키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이젠 염소가 닭을 쫓아다니며 집은 더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노인은 이제 암소까지 키우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만 청년의 집은 온통 아수라장이 돼버렸고 그 집안에서는 자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잠조차 자지 못한 청년이 다시 노인에게 오자 노인은 집안의 동물들을 이제는 다 밖으로 끄집어내라고 시켰습니다. 노인이 시킨 대로하자 청년의 집안은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렇게 좁게만 느껴졌던 그 집이 한없이 넓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셨고 그들의 죄악을 부단히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범죄하였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시 78:17).‘원망’이란 단어가 모세오경에만 무려 21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은 사실 절대적 빈곤이나 궁핍에서라기보다는 상대적 비교에 의한 박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나로 하여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도록 더 나쁜 조건을 주시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의 고마움을 경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이 더욱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극적인 만족과 목표에 대한 대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 삶에 원망이 움트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미리 감사합시다.
* 기도: 오늘 하루도 내 앞에 펼쳐질 삶의 그림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준비하시는 새로운 그림들을 목도하게 하시고 감사로 시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중 목사





11.불평만 하는 사람

감옥에서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사람은 불평과 남을 탓하는 것이 체질화 돼, 한 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오랜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옥하게 되었을 때, 수도원으로 찾아가 수도원장에게 '나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사람에게 "좋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단, 5년 후에 한마디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년이 흘렀습니다. 이 사람의 첫마디는 "잠자리가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5년이 흘렀습니다. 두 번째 말은 "음식이 나빠 못 먹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5년이 흘렀는데, 그 때는 "더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여기 있는 동안 불평뿐이었으니, 나가 주기 바랍니다."
하루 동안 무슨 말을 많이 하며 살고 있나요? 거기에 감사가 빠져 있다면, 몹시 불행한 인생일 것입니다.





12.천국가면 불평이 사라질까요?

두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늘 불만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하였고 또 자식들도 다 속을 썩이고 남편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이였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불만 많은 사람은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러냐며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계속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집은 이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차고 벌레들이 기어다녔으며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벽은 금이 갔다. 그 사람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차라리 세상이 더 좋았다며 한탄만 거듭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심판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난 너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줘 보았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조건으로 천국을 건설했고 또 한 사람은 그 조건을 갖고서도 지옥을 만들었구나.” 그러자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져 들었다. 천국은 무위도식하는 곳이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끝을 맺으셨다.
“천국을 오해하지 말아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심는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땅의 논리가 아니고 애초 천국의 논리였다. 천국의 논리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건설하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을 거저 주어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그와 같은 자이기에 결코 천국의 땅 한평이라도 내줄 수 없다. 네가 만든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아라.”





13.감사와 불평

영국 크랜취 감독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덩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게딱지만 한 오막집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14. 불평 속에 담긴 불신앙

투덜댐은 어려운 상황이나 곤란한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비판적 불평이다. 그것은 자신 앞에서 느리게 진행하는 운전자에 대한 불평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신 일들에 대한 불평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평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기도 하다. 내가 만났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업이나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 또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불평이 하나님의 가치기준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영이라는 것을 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어떤 아이가 그들 부모의 끊임없는 불평의 대상인 조직체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싶겠는가? 현명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원리와 우리 주위의 불완전한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가르친다. 불평은 항상 믿음 없는 가운데 행해지는 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불평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이라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최상의 일을 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부정적 환경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 기도: 사랑의 주님, 내게 보내신 사람들과 공동체 때문에 내 맘이 상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하는 때도 있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내게 허락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살게 하소서.





15.감사를 불평으로 바꾸는 사람들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고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와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죠” 그러자 안내원은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 비누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운물과 찬물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사람의 마음 역시 감사와 불평이 솟아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면 감사하는 일이 많아지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돌아와 감사했던 사마리아 한사람처럼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16.일 못하는 사람이 불평은 많다

한 불평이 많은 청년이 왕을 찾아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왕은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어 청년에게 주면서 말했다.
“포도주 잔을 들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오면 성공비결을 가르쳐 주겠다. 단, 포도주를 엎지르면 네 목을 베리라”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내를 한 바퀴 돌아왔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시내를 돌며 무엇을 보았느냐? 거리의 거지와 장사꾼들을 보았느냐? 혹시 술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래소리를 들었느냐?”
청년이 대답했다.
“포도주 잔에 신경을 쓰느라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인생의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일에 집중하면 주위의 유혹과 비난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일 못하는 사람은 불평이 많다. 분명한 인생관을 갖고 일에 몰입하는 사람은 불평할 틈이 없다.





17.불평

어느 왕의 이야기이다. 왕은 크나큰 돌을 길 한가운데 굴려다 놓고서 누가 이것을 옮기나 보려고 숨어 있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모두 불평만 할 뿐 그냥 지나쳤다. 얼마 후 한 농부가 수레에 채소를 싣고 시장에 팔러 가다가 돌을 보고서 말없이 치워놓았다.
그런데 돌을 치운 자리에 돈주머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돈주머니에는 많은 황금과 함께 '이 돈은 누구든지 이 돌을 치우는 자의 것'이라는 왕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어떤 일이 생길 때 긍정적인 자세로 그러한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들보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일을 도와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늘 어떤 일로 불평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메말라가지만 긍정적인 입장에서 문제해결을 돕는 자들은 영적 성숙과 함께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모두 위에서 말하는 농부와 같은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8.여우의 불평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탐스러운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포도원을 보고는 군침을 흘렸습니다.
울타리의 틈을 찾다가 작은 구멍을 발견하고 들어가기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궁리 끝에 여우는 사흘 동안 굶어서 몸을 여위게 한 다음에 간신히 울타리 구멍을 통과했습니다.
여우는 배불리 포도를 따먹었습니다.
포만감을 느낀 여우는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고 울타리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여우는 굶어서 배를 홀쭉하게 만들고서야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배고프기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마찬가지구나"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





19.불평을 그치라

외적인 고난과 긴급한 상황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불평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불신앙으로 인내치 못하여 일어난다. 사람이 불만족으로 인하여, 그리고 인내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불평한다는 것은 감사치 못하는 죄인데, 왜냐하면 실상 우리는 고난보다는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려 깊지 못한 죄인데,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에게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평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또 하나의 죄다. 불평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기 십상이다. 마귀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평하도록 만든 후에 불을 지핀다.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분노의 독심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라! 만일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돈이 잔뜩 들어있는 돈 가방을 던졌는데, 그 던지는 과정에서 머리를 살짝 스치는 바람에 찰과상을 입었다 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가 돈 가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의 상처를 입히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더욱 부요해진다. 이러한 고난들은 우리의 영광을 더욱 부요하게 해주는데 어떻게 우리가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룩한 열정 -토마스 왓슨





20.불평과 감사는 한 그릇에 담겨있다

“어제는 내가 몰던 덤프 트럭이 뒤집혔다오. 몸은 괜찮은데 트럭이 좀 망가졌지요. 나의 과실이라서 변상해줘야 되니 두 달 동안은 송금할 수 없을 것 같소. 본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많고 해외에 나와서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 신세가 원망스럽구려.”
중동붐이 한창인 시절에 한 부인이 해외에서 취업중인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마음 착한 아내가 답장을 썼습니다. “여보, 자동차가 전복되었는데도 몸을 상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해외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건강하게 취업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막일이라도 하겠다고 가셨는데 운전경력을 인정받아 중장비를 끌게 되어 좋아하셨지요. 신세를 한탄하며 불평할 일이 아니라 모두 감사할 일들 뿐이네요.”
같은 사건이 불평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감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불평과 감사는 바로 한 그릇 속에 담겨있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편에 서십시오. / 임종수 목사(큰나무교회)





21.불평 제조업자

노만 필 박사는 항상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한 사람으로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주변환경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좌석이 불편하고 시트가 지저분하고 청소도 제대로 안돼 있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는 등 불평을 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필 박사는 “그럼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제 아내는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입니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부인처럼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가 아니라 감사를 만드는 제조업자가 돼야 한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면서 모든 것을 참아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어렵다고 불평해서야 되겠는가. 감사하는 자세는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만든다. 감사의 제조업자는 시련을 축복으로 변화시킨다./ 고수철 목사(흑석제일감리교회)





22.흑암 나라의 언어는 불평

찬양이란 주일 아침에 베풀어지는 말 잔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찬양은 우리의 모든 언어이다. 찬양은 천국의 언어이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스페인어를 쓰고, 미국과 영국 사람이 영어를 쓰며, 브라질 사람이 포루투갈어를 쓰듯이,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찬양이다. 한 나라의 국민은 자기 나라 말을 쓴다. 우리는 서로 그 말로 그를 알아본다.
다윗은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했다(시 34:1). 그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주님을 찬양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언어, 즉 하나님 나라의 언어와 흑암 나라의 언어만이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찬양이고 흑암 나라의 언어는 불평이다. 찬양은 아름다운 일을 기리지만, 불평은 그것을 깎아 내린다. 모든 사람은 천국의 언어든지 흑암 나라의 언어든지 둘 중 하나만 말하게 되어 있다.
아침에 자명종이 울리면 흑암 나라의 백성들은 ‘아, 누가 저런 몹쓸 기계를 고안했담?’이라고 생각하고, 커피를 마시면서는 “커피가 너무 뜨겁군”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날씨, 정부 관리, 교통 등 모든 것을 불평한다. 불평이 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매사에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교회에 가서 “할렐루야” 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다음 밖으로 나와서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어! 비가 오잖아. 날씨 한번 더럽네.” 누가 날씨를 주관하시는가? 바로 주님이시다.
/「제자입니까」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23.게으름과 불평

늦가을에 가장 분주한 동물은 다람쥐다. 다람쥐는 겨울에 대비해 한 구멍에 한 개씩 도토리를 저장한다. 커다란 구멍에 수십개의 도토리를 묻어두는 법이 없다. 그것은 먹이가 한꺼번에 도난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다람쥐는 앞발로 땅 속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 도토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흙을 덮은 다음, 나뭇잎을 뿌려 위장한다. 다람쥐 한 마리가 파놓은 구멍은 평균 2000개정도. 다람쥐는 구멍에 월동식량을 준비해 놓고 즐겁게 겨울을 맞는다.
인생도 마찬가지. 인생의 겨울을 부지런히 준비한 사람은 걱정이 없다.
하나님은 산 속에 아름드리 나무를 무진장 준비해두셨지만, 그것으로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땅속에 양질의 대리석을 묻어놓으셨지만, 그것으로 궁전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페달 밟기를 멈추어보라. 자전거는 곧 쓰러진다. 인간을 쓰러뜨리는 두 개의 무기는 게으름과 불평이다. /임한창





24. 구도자는 입에 불평을 담지 않는다

모기가 임금님에게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임금님, 이 세상이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되었습니다. 약한 우리를 못살게 구는 이들이있으니 못살겠습니다. 물리쳐 주십시오.”
“그래 누가 너희를 못살게 굴더냐?”
“예, 북풍이라는 바람 놈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아, 그런가? 한쪽 이야기만을 들어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으니 그쪽 이야기도 내가 들어보아야겠다.”
임금님은 명령했습니다.
“즉각 북풍을 오게 하라!”
그러자 차가운 북풍이 몰려왔습니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모기는 찬바람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구도자의 길에서 흔히 나타는 현상입니다.
구도의 길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은 불평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구도자가 불평을 하는 순간 구도자로서의 그의 존재의 가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구도자는 바로 자신의 삶의 고난을 관통함으로써 구도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도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입을 닫았을 때에 믿음의 완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불평 없이 즉각 이행함으로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고난이 끝나는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요구하자, 아무런 이의 없이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금까지 무덤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도자와 불평은 모기와 북풍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주연 목사>





25.불평의 해악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여정 가운데 종종 불거져 나왔던 문제가 바로 불평이었다. 그들이 터뜨린 악한 것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것들, 공동체의 뒷문을 열어 주고 악이 들어오도록 했던 죄의 원인은 단 한 가지 곧 원망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했던 것이다.
불평은 악한 것이다.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불평은 악하다.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순간에 더 이상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않게 된다.
불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길을 보는 것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불평이 시작되는 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불평과 원망이 그쳐야 하나님의 길이 보이고 그분의 임재도 느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불평이 멈춰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길이 보여야 원망이 그치는 것이다. 따라서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봐야 불평을 멈출 수 있다. 「하나님의 자신감」 유진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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