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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 (행11:19-26)

by 【고동엽】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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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   (행11:19-26)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하실까 생각하시면서 쓸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하실까 생각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다가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이방인 고넬료를 발견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넬료가 하나님 경외의 사람이었고 구제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통해서 그리고 베드로를 사용해서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 성령을 보내시고 그곳에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셨다고 지난 주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어떻게 하면 좀 더 먼 이방의 땅에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다가 안디옥을 내려다 보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은 그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수리아의 수도였는데 로마 제국의 매우 중요한 3대 도시들 중의 하나였고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기지가 될 수 있는 전략적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떻게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어떻게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피난민들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11:19,2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시기 위해서 전쟁과 환난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피난민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영락교회가 그렇게 해서 세워졌고 충현교회가 그렇게 해서 세워졌고 경상도와 제주도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해서 세워졌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나 신현균 목사님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오랜 옛날 아이랜드의 교회들은 해적들에게 잡혀 갔던 패트릭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환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과 봉사와 전도에 있어서 보다 진지하게 만들고 보다 간절하게 만들고 보다 뜨겁게 만듭니다. 안일은 타락의 길이고 환난은 성화의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 군사적 환난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주 업무인 주님을 바로 믿고 복음을 바로 전하고 봉사를 바로 하는 일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박해와 환난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 성도들이 흩어져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도 했겠지요.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들이 한 일은 복음을 전한 일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한동안 민족주의적 정서와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른 유대인 피난민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런데 그곳으로 피난 온 성도들 중에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용기를 내어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11:20). 여기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방인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기질과 이방인의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이방인 전도를 하게 됩니다. 자기 기질과 자기 정서와 자기 주장이 강한 배타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안디옥에 가서 안디옥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 18절 에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고 했고, 여기 20절에서는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방인 출신 피난민들에 의해서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방인 출신 전도자들에게 주님의 손이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의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 안디옥에 이방인 교회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마련되었습니까? 피난민들에 의해서 마련되었습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부흥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다한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에게로 돌아왔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고 돕기 위해서 한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사도를 파송하는 대신 바나바라는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바나바는 여러모로 살펴볼 때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인 교회를 격려하고 돕는데 가장 적합한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우선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행4:36).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구브로 출신 신자들의 전도에 의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상황을 깊이 고려하여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나바의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그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권위자, 위로자 또는 격려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남을 잘 권면하고 남을 잘 위로하고 남을 잘 격려하는 관대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밭이 있었는데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행4:36,37). 즉 바나바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물질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편협하고 돈 관계가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나바를 가리켜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행11:24). 이방인 전도는 착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웃 사람 전도도 착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도 믿음도 충만하여야 하지만 기본은 착함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바나바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했습니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주님 말씀을 많이 하면서 주님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했습니다. 자기에게 붙어있으라고 하지 않았고 주님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부흥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붙는 신도가 아닌 주님께 붙는 성도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유능한 사람 사울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5,26). 바나바는 점점 부흥 발전하는 안디옥 교회를 바라보면서 거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기지가 될 안디옥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보다 유능한 사울의 도움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다소에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을 설득해서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일년 동안 안디옥에서 협력 목회를 했습니다.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되는 것도 귀하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더욱 더 귀합니다. 제자는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아 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살도록 훈현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살기로 작정한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로부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찾아서 자기와 함께 설교하고 자기와 함께 가르치고 자기와 함께 목회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목회자들은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자기 교회에 데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통 목회자들은 자기보다 설교를 더 잘하고 자기보다 가르치기를 더 잘하는 사람을 자기 교회에 데려오기를 꺼려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안디옥 교회는 점점 더 튼튼한 교회로 세워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점점 더 튼튼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로 세워져 갔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교회로 세워져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구제였고 그 다음은 선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힘껏 구제 헌금을 했습니다. 구제 헌금을 모아서 흉년이 든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안디옥 교회가 두 번째로 한 일은 선교였습니다. 선교를 받은 안디옥 교회가 선교를 하게 되었고 이방인 선교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행13:2,3을 읽습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선교란 말의 뜻은 '보낸다'인데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참으로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구제와 선교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했습니다. 앉디옥 교회는 나중에 소 아시아 전도와 순교의 제물이 된 이그나시우스라는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시우스는 소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복음 전파의 편지들을 써서 보낸 다음 자기는 로마에 가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그나시우스 감독은 로마로 끌려가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불이여 오라! 십자가여 오라! 야수들과 싸워 뼈들이 비틀어지고 팔 다리가 잘라지고 나의 온 몸이 부서지리. 잔인한 마귀의 고문이여 오라! 다만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라 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을 모방하게 하라."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를 닮은 교회가 전주에 하나 있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는 너무 인색할 정도로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면서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인 이동휘 목사는 자기 자녀들까지 전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바쳤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처럼 나중에는 담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저도 중국이나 북한으로 선교사로 파송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과 뜻은 우리들의 마음과 눈과 뜻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눈과 뜻은 우리 자신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자녀들과 우리 직업들과 우리 교회들과 우리 나라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뜻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시지 않았고 그 대신 이방의 땅들인 가이사랴와 수리아 지방의 인디옥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당시 악의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뜻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계실 것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악의 중심부라고 말할 수 있는 북한 땅과 모슬렘 땅을 바라보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서 사랑과 복음을 전할 쓸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옛날 성부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여기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과 고통이 가득한 저 북한 땅에 그리고 저 멀리 모슬렘 땅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다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나 같이 부족한 죄인일지라도 주님께서 분명한 싸인을 주신다면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저 어두움의 땅 북한으로 다려갈 수 있기를 소원하고 바랄 뿐입니다. 피난민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못난 우리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사랑의 도구들로, 우리들을 전도의 도구들로, 우리들을 부흥의 도구들로 그리고 원하시면우리들을 순교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남북한 민족에세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제 우리 젊은 성가대원들 나와서 '순교자의 노래'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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