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른 이해편◑/종합 전체 모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장 41~42절, 49~56절)

by 고동엽 2026. 4. 26.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장 41~42절, 49~56절)

예수께서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저편에서 돌아오셨을 때, 무리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몰려왔습니다. 어떤 이는 병 때문에 왔고, 어떤 이는 호기심 때문에 왔고, 어떤 이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왔으며,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는 영혼의 허기를 안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였습니다. 그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단지 종교적 직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율법을 따라 예배의 질서를 돌보는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의 눈에 경건과 체면과 권위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는 쉽게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지위가 남아 있고, 체면이 남아 있고, 재산이 남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이 남아 있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에는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자기 의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문 앞에 서면, 인간이 그렇게도 정교하게 세워 놓은 모든 의자는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죽음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죽음은 문패를 보지 않습니다. 회당장의 집인지, 가난한 자의 움막인지, 학자의 서재인지, 왕의 침실인지 묻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구별과 자랑과 표식을 한순간에 무색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차가운 법입니다.

야이로에게는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 딸을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 곧 “외아들, 외딸, 하나뿐인 자녀”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아이는 단지 가족 구성원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야이로의 미래였고, 숨이었고, 그의 집에 켜진 등불이었고, 그의 기도 속에 늘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야이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불렀을 것입니다. 약을 구했을 것입니다. 밤새 아이의 이마를 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숨은 점점 가늘어졌고, 집 안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으며, 부모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때 야이로가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가장 깊은 자리를 봅니다. 믿음은 언제나 인간이 자기 높이에서 하나님을 해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이 자기 무력의 바닥에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는 사건입니다. 믿음은 내가 아직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은 오실 수 있다고 고백하는 은혜의 굴복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길에 일이 지체되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한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멈추어 세우셨습니다. 야이로에게 그 시간은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의 시간이었지만, 야이로에게는 초조함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회복의 순간이었지만, 야이로에게는 죽음이 자기 집으로 더 가까이 오는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주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데도 지체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능력의 주님이 왜 지금 즉시 움직이지 않으시는가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시간 안에 삽니다. 우리는 시계의 바늘 아래에서 울고 웃습니다. 약속 시간이 늦어지면 불안해지고, 응답이 지연되면 마음이 무너지고, 하루가 지나면 희망이 식어 버립니다. 우리는 시간을 소유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시간에게 끌려다닙니다. 우리의 삶은 어제라는 기억과 내일이라는 불안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영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시간의 외곽에서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친히 걸어 들어오셔서 지체의 고통, 기다림의 눈물, 죽음의 냄새, 무덤의 침묵을 자기 몸으로 통과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체는 무능이 아닙니다. 주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닙니다. 주님의 걸음은 우리가 재촉한다고 빨라지고, 우리가 낙심한다고 멈추는 걸음이 아닙니다. 그분의 걸음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고, 그분의 침묵에는 우리를 더 깊은 믿음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초청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사람이 회당장의 집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이 말은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얼마나 냉정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아이가 죽었으니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든 아이에게는 예수도 필요할 수 있지만, 죽은 아이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병과 죽음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숨이 끊어지면 끝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의학이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소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의학이 침묵하면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사람이 손댈 수 있을 때에는 기도하지만, 사람이 손을 떼면 기도도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죽음의 통보 한가운데 떨어진 하늘의 음성입니다. 헬라어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μὴ φοβοῦ(메 포부)입니다. 계속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은 μόνον πίστευσον(모논 피스튜손)입니다. 오직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상황을 부정하는 심리적 주문이 아닙니다. 믿음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 눈먼 낙관이 아닙니다. 믿음은 죽음보다 먼저 현장에 와 계시는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죽음이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죽음 앞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더 크게 듣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병원 복도를 달려갈 때, 죽음은 이미 침상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상실의 소식을 들을 때, 죽음은 이미 우리의 심장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 때, 죽음은 더 이상 대답이 없다고 선언하는 최후의 법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죽음이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께서 먼저 계셨다고. 죽음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고. 죽음이 인간의 시간을 닫아 버리는 문이라면, 그리스도는 그 닫힌 문 앞에서 “아이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음성이십니다.

야이로는 그 순간 두 음성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집에서 온 사람의 음성이었습니다. “죽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지 마십시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신앙생활은 때로 이 두 음성 사이에서 어느 음성을 믿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음성은 언제나 계산이 빠릅니다. 이미 늦었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네 기도는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네 가정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네 인생은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네 죄는 너무 깊다고 말합니다. 네 상처는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계산 너머에서 들려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너의 끝이 나의 끝은 아니다. 너의 절망이 나의 절망은 아니다. 너의 무덤이 나의 무덤은 아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죽음도 잠시 빌려 온 침묵일 뿐이다.

예수께서 집에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울고 있었습니다. 장례의 분위기가 집을 덮고 있었습니다. 통곡하는 자들이 있었고, 슬피 우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죽음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함께 울었습니다. 죽음은 한 가정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 앞에서는 믿음의 말씀이 순진하게 들리고, 너무나 확실한 절망 앞에서는 복음의 약속이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현실을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죽음을 죽음의 자리에서만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빛 안에서 보셨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끊어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깨어남으로 바뀝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무덤의 차가운 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잠입니다. 물론 이것은 죽음이 아프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의 슬픔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복음은 눈물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눈물 가운데서도 죽음이 최종 승자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은 애통하는 성도의 손을 붙들고 말합니다. 울어도 된다. 그러나 절망처럼 울지는 말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 무덤은 닫힌 결론이 아니라 부활의 전주곡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때로 소란을 물리치시고, 믿음의 침묵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사람들의 말이 많고, 판단이 많고, 조롱이 많고, 절망의 해석이 많은 자리에서는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영혼의 방 안에서 통곡의 소음, 불신의 조롱, 체념의 습관을 내보내십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가장 깊은 죽음의 자리로 들어오십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장면입니다. 율법의 관점에서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은 부정의 영역이었고, 산 자는 죽은 자와 접촉함으로 부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분은 부정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는 부정에 오염되는 생명이 아니라, 부정을 삼키는 거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죽음에 감염되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이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분을 만지면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 때문에 그분이 더럽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말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에게 손을 대실 때, 죄인이 깨끗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실 때, 나병환자가 정결해집니다. 예수께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실 때, 죽음이 물러납니다.

여기 십자가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결국 우리의 죽음에 손을 대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부정에 손을 대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자기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무덤에 들어오시는 정도가 아니라, 친히 무덤에 누우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문 앞에서 말씀만 하신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분은 죽음의 중심으로 들어가신 구속자이십니다.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신 주님은 언젠가 골고다에서 아무도 일으켜 주지 않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아이야 일어나라” 말씀하신 입술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고, 그분 자신은 무덤의 침묵 속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 아침,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부활 안에서 모든 죽음의 권세는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아이가 다시 살아난 감동적인 기적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장차 드러날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를 미리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누가는 이때 아이의 영이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예수의 말씀 앞에서 돌아옵니다. 여기서 “일어나다”와 관련된 말은 부활의 언어와 깊이 닿아 있습니다. ἐγείρω(에게이로)는 “일으키다, 깨우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신약성경은 이 말을 예수의 부활을 말할 때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은 단지 한 소녀의 회복이 아니라, 부활의 빛이 죽음의 방 안으로 스며든 사건입니다. 그 방은 더 이상 죽음의 방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작은 성소가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통곡의 집이었던 곳이 주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따뜻합니까. 주님은 거대한 기적을 행하신 뒤에도 아이의 배고픔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공중에 떠 있는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은 인간의 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영혼을 살리실 뿐 아니라, 배고픈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따뜻함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전 존재를 향합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죽음, 우리의 눈물, 우리의 몸, 우리의 밥상, 우리의 가정, 우리의 내일을 향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하늘 높은 곳에서 빛나는 개념이 아니라, 죽음에서 막 일어난 아이의 입술에 닿는 한 숟가락의 음식처럼 구체적이고 다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야이로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죽어 가는 무엇인가를 안고 주님께 나아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정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쁨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도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전 하나님 앞에서 품었던 순전한 사랑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자녀를 향한 소망이 죽어 가고, 어떤 이에게는 몸의 건강이, 어떤 이에게는 사람을 신뢰하는 마음이, 어떤 이에게는 자기 자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려 보려고 애씁니다. 지식으로 붙들고, 돈으로 붙들고, 관계로 붙들고, 경험으로 붙들고, 의지로 붙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죽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의 어두운 방에서 그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제 끝났다고. 더 이상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하나님도 늦으셨다고.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죽음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 위에 서 계신 주님의 선언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보다 크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믿음은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슬픔 속에서도 주님의 손이 내 손을 놓지 않으심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시 해결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길에서도 주님이 선하시고, 주님이 생명의 주이시며,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죽음의 권세를 꺾으셨다는 사실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병으로 떠나보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장례가 끝난 뒤 한동안 예배당 맨 뒤에 앉아 아무 찬송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어떤 말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조차 칼처럼 아팠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 중에 부활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어머니는 처음에는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찬송의 한 구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작게 움직였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그 순간 어머니는 깨달았습니다. 내 아이의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아이가 누운 죽음의 자리보다 먼저 예수께서 무덤에 누우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덤에서 예수께서 일어나셨다는 것을. 그날 어머니는 크게 찬송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눈물 속에서 아주 작게 입술을 열었습니다. 그 작은 찬송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었지만, 절망에게 빼앗기지 않은 믿음의 첫 숨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 아니라, 죽음보다 크신 주님의 손을 다시 붙든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때로 그렇습니다. 큰 믿음이란 언제나 흔들림 없는 마음이 아닙니다. 큰 믿음은 무너진 자리에서 예수의 말씀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답을 다 얻지 못했는데도 십자가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믿음은 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너진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성령은 죽음의 통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생명의 복음을 울리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붙잡을 힘이 없을 때, 우리를 붙잡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집에도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회당장이라는 직함을 보시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절박한 아버지의 눈물을 보셨고,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탄식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화려한 말보다 진실한 탄식을 들으십니다. 정돈된 기도보다 부서진 마음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바로 그때가 은혜의 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시간은 저물어도 주님의 영원은 저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은 놓쳐도 주님의 손은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려도 주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비웃음은 부활을 막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은 생명의 말씀을 무효화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복음을 비웃습니다.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부활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약자의 위안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현실도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복음을 비웃어도, 십자가는 여전히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활을 조롱해도, 빈 무덤은 여전히 역사의 어둠을 가르는 하나님의 새벽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작게 보아도, 주님의 말씀 앞에 한 영혼이 살아나고, 한 가정이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죄에서 돌아서고, 한 성도가 눈물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그 현장이 하나님 나라의 실제입니다.

우리는 자주 큰 기적만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오늘 하루 더 믿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워하던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의 침대에서 일어나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은 것 같던 마음이 다시 말씀 앞에서 떨리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 아직도 제가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한마디가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듯이, 주님은 오늘 우리 영혼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내 딸아, 일어나라.” “내 아들아, 일어나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의 죽음보다 크다. 내가 너의 죄보다 크다. 내가 너의 절망보다 크다.”

복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대단해서 아이가 산 것이 아닙니다. 야이로의 간절함이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방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아이가 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손입니다. 믿음은 자랑이 아니라 빈 그릇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가난한 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시는 분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국 나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기 의는 무너집니다. 회당장의 경건도, 종교적 지위도, 사람들의 존경도 죽음 앞에서는 딸을 살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끊임없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나는 이만큼 살았고, 이만큼 섬겼고, 이만큼 참았고, 이만큼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기념비는 그림자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의 이력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체면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얼마나 넓고 깊습니까.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에게 가시는 길에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한 사람은 회당장이고, 한 사람은 부정하다고 여겨져 사람들 틈에서도 숨어야 했던 여인입니다. 한 사람은 사회의 중심에 있던 남자이고, 한 사람은 변두리로 밀려난 여자입니다. 한 사람은 집에 많은 사람이 모여 울어 줄 만큼 알려진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오랜 세월 혼자 아픔을 숨기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향해 가셨습니다. 복음은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존귀한 자와 초라한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회당장의 딸도 귀하고, 혈루증 여인도 귀합니다. 주님은 높은 자의 집에도 들어가시고, 낮은 자의 손끝에도 응답하십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같은 자리로 부릅니다. 죄인이라는 자리, 은혜가 필요한 자리, 오직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는 자리로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장면의 주어는 예수이십니다. 신앙은 결국 주어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내가 살린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리신다. 내가 해결한다가 아니라 주님이 붙드신다. 내가 의롭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신다. 내가 강하다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나의 약함 가운데 온전해진다. 우리의 인생 문장이 은혜 안에서 새로 써질 때, 그 문장의 주어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가벼운 위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무게를 통과한 부활의 명령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현실을 크게 만들고 하나님을 작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죽음의 통보를 절대화하고 주님의 말씀을 상대화합니다. 두려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을 오늘의 감옥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합니다. 믿음은 나의 시간 안에 갇힌 절망을 하나님의 영원 앞에 세웁니다. 믿음은 내 귀에 들리는 사망의 통보를 주님의 음성 아래 굴복시킵니다. 믿음은 말합니다. 나는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이 나의 주인은 아니다. 나는 운다. 그러나 눈물이 나의 마지막 언어는 아니다. 나는 약하다. 그러나 약함이 나의 결론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나를 붙드신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단지 문제 해결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이십니다.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면, 문제보다 조금 큰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문제보다 크신 정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시간은 영원을 만나고, 죽음은 생명 앞에 무릎 꿇고, 죄는 은혜 앞에서 권세를 잃고, 절망은 소망의 새벽 앞에서 물러납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는 무가치해 보이는 우리의 눈물도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됩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는 끝났다고 여겨진 인생도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는 죽음의 방도 부활의 예배당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의 소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의 소식보다 더 깊은 복음의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보다 더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예수께서 그 집으로 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사실들이 있습니다. 병이 있다는 사실, 실패했다는 사실, 관계가 무너졌다는 사실,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상처가 깊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실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도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사실보다 더 깊은 진리 앞에 나아갑니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장차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한 성도여, 아직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너진 부모여, 아직 주님이 당신의 집으로 가고 계십니다. 죄책감에 눌린 영혼이여, 아직 십자가의 피는 마르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체되어 지친 사람이여, 주님의 지체는 버림이 아닙니다. 죽음의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너진 이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믿음은 당신이 억지로 만들어 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당신 안에 일으키시는 새 숨입니다. 그러니 오늘 아주 작은 믿음으로라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야이로처럼 발 아래 엎드리십시오. “주님, 내 집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 내 마음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 내 죽은 소망의 방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오십니다. 그리고 손을 잡으십니다. 그 손은 못 박힌 손입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신 그 손은 훗날 십자가에서 찢기신 손입니다. 그러므로 그 손에는 값싼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대속의 사랑이 흐릅니다. 그 손은 죄인을 정죄하기보다 대신 찢기신 손입니다. 그 손은 무너진 자를 밀어내기보다 붙드시는 손입니다. 그 손은 죽음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우리를 빼내시는 부활의 손입니다. 우리가 그 손을 붙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해도 그 손은 강합니다. 우리의 손은 떨려도 그 손은 신실합니다. 우리의 손은 놓칠 때가 있어도 그 손은 한 번 붙든 자를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모든 성도에게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날에는 병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한 아이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모든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부모의 눈물만 닦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눈물이 닦일 것입니다. 그날에는 죽음이 잠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영원히 삼켜질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질문들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침묵하고, 우리의 상처들이 영광의 빛 안에서 새 의미를 얻고, 우리의 눈물들이 어린양의 손에 의해 닦일 것입니다. 그날을 향해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그래서 성도는 절망 가운데서도 끝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무덤 앞에서도 부활을 기다립니다. 성도는 눈물 속에서도 찬송의 씨앗을 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은 우리의 현실을 작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크게 보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죽음이 없다고 말하는 거짓 위로가 아니라, 죽음이 있어도 그리스도께서 더 크시다고 고백하는 참된 소망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우회하여 영광으로 가려는 욕망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죄와 죽음의 실체를 직면하고 부활의 주님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상처와 두려움과 죽은 소망을 주님께 가져갑시다. 주님 앞에 엎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읍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아이야, 일어나라.”

이 음성이 오늘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리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통보보다 더 크게, 세상의 조롱보다 더 맑게, 우리의 불안보다 더 깊게,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음성으로 울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물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손을 붙들고,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교회로,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보다 먼저 계셨고, 우리의 무덤보다 깊이 내려가셨으며, 우리의 미래보다 앞서 부활의 새벽으로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여,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은혜를 붙드십시오. 소망을 붙드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설교 준비와 묵상 자료

묵상 포인트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한 아버지였습니다. 신앙은 직분과 체면을 넘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지체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의 시간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소식이 들릴 때, 성도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되 그 현실보다 크신 주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강해
누가복음 8장의 흐름은 예수께서 자연, 귀신, 질병, 죽음 위에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거라사 광인을 회복시키시며,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생명의 주이심을 드러냅니다.

주석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종교적·사회적 위치가 있었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의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끝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아이의 손을 잡으신 장면은 예수께서 부정과 죽음의 영역을 피하지 않고 친히 들어가 생명으로 이기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원어 주석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 “하나뿐인, 독생의”라는 뜻으로 야이로의 딸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었는지를 강조합니다.
μὴ φοβοῦ(메 포부):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두려움에 계속 사로잡히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μόνον πίστευσον(모논 피스튜손): “오직 믿으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현실 부정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현실보다 더 최종적인 진리로 붙드는 것입니다.
ἐγείρω(에게이로): “일으키다, 깨우다”라는 뜻으로, 예수의 부활을 말할 때도 사용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금언
죽음의 소식이 먼저 도착한 것처럼 보여도, 생명의 주님은 이미 그곳으로 가고 계십니다.
믿음은 눈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잡으시면 죽음의 방도 부활의 성소가 됩니다.

신학적 정리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주권,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소망을 함께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잠으로 부르실 만큼 죽음 위에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십자가를 통과한 권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멀리서 명령만으로 처리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죽음 안으로 들어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주제별 정리
두려움: 죽음의 통보 앞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흔들림입니다.
믿음: 예수의 말씀을 절망의 소식보다 더 크게 듣는 은혜입니다.
죽음: 인간에게는 끝처럼 보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활 앞에 무릎 꿇는 원수입니다.
은혜: 예수께서 우리의 죽음과 부정에 손을 대시고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목회적 정리
성도들은 각자 죽어 가는 소망과 무너진 기도의 제목을 안고 살아갑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단순한 긍정의 말을 주기보다,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참된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상실과 질병과 가정의 아픔을 겪는 성도들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두려움의 소식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로 결단하십시오.
주님이 지체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십시오.
죽은 것 같은 마음과 가정과 기도의 제목을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안에서 오늘 다시 일어나십시오.

𝔉𝔲𝔩𝔩𝔖𝔬𝔲𝔯𝔠𝔢 : 𝔄𝔯𝔱𝔦𝔣𝔦𝔠𝔦𝔞𝔩 ℑ𝔫𝔱𝔢𝔩𝔩𝔦𝔤𝔢𝔫𝔠𝔢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