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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과 그 주변 나라들

by 【고동엽】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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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m.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56 

에돔과 그 주변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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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의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사 34:6, 64:1; 렘 48:24)로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암 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 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경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창 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0)
'에돔'(Edom, ???)은 ‘붉다’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붉고 붉은 것(???? ???)'으로 나온다. 에서가 팥죽의 붉은 색깔에 자극받은 식욕 때문에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한다. 본래의 붉은 피부에다 이 붉은 팥죽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후 사람들은 그를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이라 불렀다.
장자권을 팔고 대신하여 받은 '붉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얻게 된 에서의 별명으로(창 25:30), 에돔 족속은 바로 이 에서의 후손이다. 유다 지파는 에돔 경계에 닿는 영토를 분배받았지만 에돔 영토를 결코 침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에돔 지역은 모압, 암몬 등과 더불어 정복 대상에서 제외된 곳이었기 때문이다(신 2:4-23). 따라서 가나안 정복과 분배시기에 이스라엘과 에돔이 서로 접촉하거나 충돌한 기록은 없다. 약 2세기 후에 사울이 에돔인들과 싸운 적이 있고(삼상 21:7),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에돔은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된다.
한편, 장자는 짐승의 '초태생'과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외적 특권으로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1-45; 대하 21:3)과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진다.
둘째는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된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형 에서와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 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 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사전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본 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 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창 21:10),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창 48:22; 대상 26:10),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창 49:3,4; 대상 5:1)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후회하는 에서를 답습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6).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창 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민 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경에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신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1. 사막의 유목민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민 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두-무(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는 ‘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경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벽 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일 산지
세일 산의 원주민은 "호리 족속"이다. '호리'란 '구멍'을 의미한다. 이는 '호리족속'이 혈거인(穴居人)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세일산 주변의 석회암 동굴을 거처로 삼았던 것 같다. 세일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 의해 1차 정복당하였고(창 14:5,6), 훗날 에서의 자손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남은 자들은 에돔 족속에게 예속되어 동화되고 말았다(신 2:12,22). 한편 에서의 아내가 된 ‘오홀리바마’ 역시 이 호리 족속이었다.
세일 산은 사해와 아카바 만(gulf) 사이의 아라바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에서는 일찍 부터 이삭을 떠나 세일에서 생활했었다(창 32:3; 33:16). 야곱과 완전히 분리하여 세일에 거주하고 됨으로써 언약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땅(창 12:7)에 대한 주권은 별다른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 야곱의 후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에서가 야곱과 갈리게 된 표면적 이유는 소유의 풍부로 인한 목초지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이삭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창 27:39,40). 즉 이미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창 28:13)을, 에서에게는 세일 산지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작정 하셨었다(신 2:5; 수 24:4; 32:3).
한편 가나안의 시온산이 언약의 땅을 상징한다면(시 87:1-5), 세일 산은 에돔을 대표하는 산으로서 이방인의 요새를 의미한다(겔 35:2,15).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무함을 인하여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로 황무케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무하리니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5:15).

 

 

에서의 자손
에서의 아내는 ‘아다’, ‘바스맛’, ‘오홀리바마’ 이렇게 셋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와 5명의 아들 및 11명의 손자가 있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데만 : 문자적인 뜻은 '오른 쪽에 있는 자'로서 이 이름은 훗날 에돔의 한 부족이자 북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렘 49:20;겔 25:13).
* 아말렉(에서가 아다에게서 낳은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낳았다) : 아내들을 제쳐두고 이례적으로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괴롭힌 ‘아말렉 족속(출 17:8;민 14:45)’이 바로 그녀의 소생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들이 에돔 족으로부터 이탈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 동기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 도엑, 사악한 자
에서의 후손 중에는 사울 왕 때에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사악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무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7)
'도엑'(Doeg)은 '불안'이란 뜻이다. 그리고 '에돔 사람'은 야곱의 쌍동이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틴 지방과 인접한 남부에 살고 있었다(창 36장). 바로 이같은 혈연적, 지역적 사정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에돔 사람들 중에는 개종(改宗)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牧者長)이란 요직을 맡을 정도가 된 '도엑'은 이미 개종하여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엑의 과거 국적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로 인하여 머지않아서 결코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의도한 때문인 듯하다(창 25:25, 30; 민 20:14-21; 삼하 8:13, 14; 왕상 11:14-22).
"사울의 목자장"-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과는 달리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울의 노새를 관리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근거는 희박하다.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기 '목자'를 '로임'이 아닌 '라침' ,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의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가리키는데(8:11), 따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 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도엑'(Doeg)은 다윗과 아히멜렉 간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무고한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과 가축을 몰살케 만들었다(삼상 22:9-22 / 아히멜렉은 놉 땅의 제사장으로 허기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성막의 떡을 주었고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다). 이처럼 도엑은 간악하고 아부 근성이 농후한 인물로서, 후일 다윗은 그의 시편 52편을 통해 도엑의 잔인성을 질타하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진입 루트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에돔 땅을 지나가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에돔에 속한 것은 풀 한포기도 건들지 않고 혹 피해를 입히면 배상하겠다고 모세가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민 20.14-2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에돔의 세일산( 페트라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페트라 외곽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의 샘은 모세가 바위를 치자 물이 터져 나온 곳(민수기 20:10-11)이라고 한다.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하룬’이라 불리는 페트라의 ‘호르산(아론산)’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은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아한다(왕상 11:1). 그로인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겔 25:12-13).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경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돔의 키르벳 엔-나하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경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장 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 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6만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에돔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지역이며, 농업과 목축업에 부적합한 광야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성경시대 에돔 사람들의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해 내는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에돔 땅에 욕심을 냈던 것은 언급했던 구리광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king’s way)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중해변에 적당한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유다가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대하 8:17; 왕상 9:26)’을 항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윗이 차지했던 에돔 땅 덕분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을 통해 오빌의 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부국강병의 시대를 누렸던 유다의 임금 여호사밧 역시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오빌로 보내고자 하였다(왕상 22: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22:48, 49)
결국 에돔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과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왕하3장).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고 섭정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 8:20) 물론 여호람의 반격도 있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유다의 속국이 아니었다(왕하 8:22). 후에 유다 왕 ‘아마샤’는 다시 한번 에돔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에돔 사람 1만 명을 죽이고 에돔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4:7; 대하 25장).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왕하 8:20-22)
에돔의 여신 '코스'
앞에서 언급한 전쟁 과정 속에서 유다 왕 ‘아마샤’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 범죄는 그를 망하게 만들었다. 아마샤는 에돔에서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경배하며 분향하도록 하였다(대하 25:14) 성경은 이 에돔의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aws / Qos)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돔 역시 성경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에돔의 신화나 종교적 자료 역시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단지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는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주전 745-727)과 산헤립(주전 705-681) 시대에 에돔 왕의 이름은 ’코스 신은 임금)’ 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주전 680-669년)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다.
또한 에돔의 요새가 있었던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들이 섬기는 주요 신의 이름을 넣어 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들에 들어가는 ‘코스’가 어떤 신이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에돔 땅에서 신약 시대 전후에 거주했던 나바테안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섬겼던 ‘두슈라(Dushura)’라 불리는 신이 산을 다스리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코스’도 유사한 역할의 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코스 신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에돔의 요새가 발견된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는 뿔 단린 진흙으로 만든 여인의 두상이 발견되어 여신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 여신상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서 발견된 어떤 신상과도 다름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의 양쪽에 뿔이 달렸고 다시 이마 한 가운데 뿔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두상의 정수리에 돋아 있는 기둥은 마치 전쟁용 투구를 연상케 해 전쟁의 여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엔 하체바’ 유적지에서는 작은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함께 모두 750여개의 점토 형상들과 향을 피우는 제대 그리고 제사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를 볼 때 에돔의 것들이었으며 특별히 제대 중 세 개는 받침대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호르밧 키트밋의 북쪽에 위치한 호르바 우자에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다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영토는 확장되었고 유다를 위협할 만큼 강력해 졌다. 호르밧 우자에서는 주전 7-6세기경 기록된 37개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콘들과 판독하기 힘든 에돔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콘 하나가 발견됐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호르밧 우자보다 북쪽에 있는 아랏 요새로 보내지는 문헌으로 에돔이 쳐들어 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에돔의 위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돔 사람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유다 사람들을 학살했다. 선지자들은 에돔이 이 전쟁에 가담하였기에 저주가 있으리라 예언했다(시 137:7; 사 34:9; 겔 25:12-1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5:12-14)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벨론의 나보니두스는 주전 553년 에돔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에돔 땅은 아라비아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유다의 영역 안으로 이동하였다.
4. 이두메아 사람들, 분봉 왕 헤롯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주전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유다의 땅이었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고 마레사와 벧술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을 경멸했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않았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는 ‘마레사’가 있다.
마레사는 ‘갈렙’에게 주어진 성이었으며(수 15:44) 르호보암의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의 46개 도시를 파괴했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목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면서 도시는 산산이 부서졌고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마레사에 정착하고 이두메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레사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은퇴한 그리스 군사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면서 헬라문명과 이두메아, 시돈 그리고 나바테아 같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이두메아인 헤롯이 유대인이 되다

헤롯의 관할 영지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Ptoelemaic Dynasty)’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2∼195년 사이 있었던 시리아 전쟁에서 ‘셀루시드 왕조(Seleucid Dynasty)’ 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셀루시드 왕조의 이두메아 통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셀루시드의 통치를 저지한 사람은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존 히르카누스’와 유대인들이었다(마카베오 1서 5:3). 마카베오서는 외경의 하나로 구약과 신약의 유대 중간사 중 망치라는 뜻을 유대 독립군 마카비가 어떻게 셀루시드 왕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주전 167∼164, 마카베오 1서 4:36∼61).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약 백년간(주전 164∼63년) 과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유대교를 팽창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이들은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이두메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두메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유명한 사람은 ‘헤롯’이다. 헤롯은 이두메아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헤롯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두메아를 유대 통치지역으로 함께 보았고,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 되어갔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참혹한 파괴의 현장만을 남겼고 이 전쟁과 함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를 이두메아라 부를 뿐이었다.
5. 나바테아 사람들
아람문화를 계승한 나바테아
나바테아 사람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던 이들로 신약시대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랍계통 사람들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 즉 유프라테스 강부터 홍해까지 지역에 거주했다. 주전 586년 바빌론이 유다를 파괴하자 황폐한 유다 땅에 에돔 사람들이 목초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에돔 사람들을 서쪽 유다 땅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에돔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주전 312년께 셀루시드 장군 ‘히에로니무스’의 나바테아와의 전쟁 기록 이후 헬라 문헌들에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바테아 사람들이 남긴 그들만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단지 사해 주변을 비롯한 요르단 남쪽의 주요 거주지 내에 남겨져 있는 벽화들과 비문들이 있을 뿐이다.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람어에서 발전된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2세기부터 오랫동안 근동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주전 330년경 헬라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헬라어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알파벳은 아람어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주후 4세기경 이 지역에서 사용된 아랍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동전과 비문은 주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아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후대에 아랍 사람들은 아람 사람을 ‘나바테아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나바테아의 언어와 문화가 아람에 기초하고 있지만 에돔이 차지하고 있었던 항구 엘롯과 아카바만을 지나는 무역상들 때문에 이 지역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는 사해에서 나오는 역청을 판매했고, 항구를 통해 들여오는 향료들을 동쪽 지역과 거래했다. 또한 사막의 기후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한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나바테아 사람들의 관개시설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나바테아 사람들의 거주지는 매우 건조하여 거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이 조건은 과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비는 우기에 겨우 1∼2번 크게 내릴 뿐 자주 내리지도 않고 물이 고이지도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냈다. 우선 땅을 깔때기 모양으로 파 들어간 후 가운데에 과일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무 주변 지역의 흙을 무너뜨려 부드럽게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빗물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들어가 나무 아래 고이게 되고 이 물을 덮어 물이 고여 있도록 하였다.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은 이 시설을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바테아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때 해적으로 불린 적도 있다.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가 셀루시드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야네우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와 나바테아 사이는 나빠졌고, 주전 90년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I세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주전 62년 로마의 침략에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버텼던 장소가 페트라이다.
주전 32년 유다 왕 헤롯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손을 잡고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Ⅱ세를 공격했다. 헤롯의 군사와 병거는 몇 번의 접전 끝에 나바테아를 함락할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아라비아와 홍해를 잇는 무역으로 인해 나바테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며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나바테아의 수도 페트라

 

페트라는 주전 312년경부터 나바테아의 수도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사해에서부터 시작돼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와디 아라바의 동쪽 호르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계곡 덕분에 주변이 온통 높게 탑처럼 솟은 바위산들로 둘려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를 갖춘 곳이다. 로마가 왜 이곳을 함락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6∼13세기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학자들 중에는 페트라가 에돔 땅 중 ‘셀라(왕하 14:7)’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셀라의 뜻은 단순히 ‘바위’일 뿐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페트라는 바위 계곡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었던 도시다. 이 계곡의 이름은 ‘와디 무사’ 즉, 와디 모세라 불리는데 아랍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아 물이 나오게 한 장소가 페트라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페트라에서 발견된 로마식 건축 구조물, 무덤
페트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극장 등 도시의 모습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을 이룬 것은 무덤 군이다. 페트라의 무덤은 바위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덤 입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전 6세기께 사용된 초기 무덤은 단순한 기둥들이 있는 형태로 아취 형태의 입구가 연결되어 집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 무덤의 형태는 점차 화려한 양식을 더하게 되는데 이집트의 장식들과 그리스의 기둥들이 혼합되어 웅장한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주전 2세기께 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신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발전했다.
현재 페트라의 무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Ⅲ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성배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지명 및 국가

                    에서의 후손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참고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신구약 중간사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경과 고대 전쟁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바이블웨이 」 이영재 지음, 한국컴퓨터선교회.
- 「 바이블웨이 - 신구약 중간사 」 이영재 지음, 한국컴퓨터선교회.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구약편) 」 류모세 지음, 두란노.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신구약 중간사 」 베르너 푀르스터 지음, 문희석 옮김, 컨콜디아사.
- 「 신구약 중간사 」 찰스 F. 파이퍼 지음, 조병수 옮김,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 「 타키투스의 연대기 」 타키투스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 「 역사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 「 유대 전쟁사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지음, 김지찬 옮김, 생명의 말씀사.
- 「 고대 근동의 역사 」 S. 쉬반테스 지음, 이종근 옮김, 삼영출판사.
- 「 고대 근동의 역사 」 마르크 반 드 미에룹 지음, 김구원 옮김, CLC.
- 「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임미영 지음, CLC.
- 「 고대 근동의 역사와 종교 」 노세영, 박종수 지음, 한국기독교서회.
- 「 구약성경 주변세계탐구, 고대 근동 사람들과 장소들 」 빌 T. 아놀드, 브랜트 A 스트런 편집, 임요한 옮김, CLC.
- 그외

 

https://blog.naver.com/samhoung/222392711427

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출처 : https://dongtanms.kr/73612

 

 

송수현 : https://cafe.daum.net/kmc4755/AT6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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