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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지도/북 왕국의 멸망

by 【고동엽】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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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집권하고 예루살렘 중심의 통치를 하는 데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다윗 왕국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증대됨을 따라 실로와 기브아 및 헤브른 같은 옛 제의 중심지와 다른 도시들의 영향력과 위엄은 상대적으로 상실되었다. 그것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세력들 편에 소외감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사울 가문에 충성하는 무리들은 다윗을 강탈자로 간주했다. 또한 북부 세력은 왕권을 한 남부 인에게 이양하지 않고 자신들이 계속 고수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다윗의 직업 군대제도, 과세정책, 수도건설계획 등그들이 갖고 있던 옛 부족동맹체의 이상들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 솔로몬은 요새건설과 예루살렘 미화를 위해 전개한 중과세 정책과 강제노동의 부과로 민중을 분노케 했으며, 그의 도시국가 체제는 과거 이스라엘의 사회조직과 완전히 상반됨으로써 백성의 원성과 불만을 야기했다. 솔로몬의 통치 말기에 북부 지역 감독관들 중의 한 사람인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고, 실로의 예언자 아히야가 동조한 것은 다윗 왕조에 대한 북 이스라엘의 불만과 저항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북부 이스라엘의 성향은 르호보암의 즉위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예루살렘인들은 르호보암을 주저없이 솔로몬의 후계자로 추대했으며, 북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대표를 파송하지 않았으므로, 르호보암은 세검에 와서 협상을 해야 했다. 북이스라엘이 르흐보암에게 세금과 부역의 감소를 요청했는데, 그것은 왕권에 대한 침해였다. 르호보암은 그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정면으로 맞서자 북부의 열 부족은 솔로몬의 억압정책을 지속하는 르호보암과 결별할 수 밖에 없었고, 이전에 다윗에게 외쳤던 주장을 다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왕상12:16) 결국 북 이스라엘은 실로의 다윗이 집권하고 예루살렘 중심의 통치를 하는 데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다윗 왕국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증대됨을 따라 실로와 기브아 및 헤브른 같은 옛 제의 중심지와 다른 도시들의 영향력과 위엄은 상대적으로 상실되었다. 그것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세력들 편에 소외감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사울 가문에 충성하는 무리들은 다윗을 강탈자로 간주했다. 또한 북부 세력은 왕권을 한 남부 인에게 이양하지 않고 자신들이 계속 고수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다윗의 직업 군대제도, 과세정책, 수도건설계획 등은 예언자 아히야의 예언대로(왕상11:29-39) 에브라임 사람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함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남유대 왕국과 병존하기에 이르렀다.

 

 

  남왕국 유대는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하고 지도권의 “왕조 원칙”을 고수한 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1세, 바아사 치하 그리고 예후 왕조 이후에 고대 이스라엘의 “카리스마적 원칙”을 바탕으로 한, 지도권을 고수하려고 했다. 다라서 남왕국과 비교해서 북오아국의 정권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밀러에 다르면 북왕국의 정치적 불안정에 기여한 이유는 첫째, 북왕국의 구성원이 복잡 다양했으며, 둘째, 북왕국의 왕들이 예루살렘의 왕조신학과 유사한 것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신학을 분명히 거부했다. 셋째, 야웨주의 예언자들의 정치적 활동 즉, 왕을 배격하는 자들과 왕을 세우는 자들로 활동했다, 아히야가 북부 열 부족의 왕으로 여로보암을 선정한 것같이 엘리사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세운 것은 백성들을 억압하는 기존정권의 혁명적인 전복이었다.

 

 이상의 이유들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은 북왕국이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전통 즉 왕권은 조건적이며 기름부음 또는 백성의 선택에 의존했고 또 혁명적이었다는 전통을 보존했음을 의미하며, 모세의 계약전승에 보다 충실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여로보암 고대 이스라엘의 성소였던 베델 그리고 단에 야웨를 위한 성소를 세운 것은 고대 이스라엘을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그가 야웨의 황소 상을 세웠다고 공격을 받았지만(왕상12:32-36) 그것 역시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과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오므리 왕조가 종교의 세계개방주의를 촉진했을 때“이스라엘 전통을 고수하여 야웨신앙을 강조하는 무리의 반대”에 부딛쳤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 목적은 전적인 야웨신앙을 회복하고 사회,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과거의 관습들과 제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엘리사가 예후의 대 오므리 왕조 봉기를 지적한 것은 예후가 야웨신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야웨신앙의 근원적인 회복과 고대 이스라엘의 평등주의적 사회 재편을 위한 예언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특히 평화 시대와 경제적 부흥 시대의 예언자들은 빈부격차의 사회 부조리를 직시하고 비판했다. 경제적 번영의 결실은 특권층이 향유하고, 대다수 농민들은 극도로 가난했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놀라운 성공은 농민 대중의 재산과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한 특권증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살인적인 억압을 체험하고 그것이 야웨의 뜻에 완전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다. 갓월드는 아모스가 이러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평등주의적 사회와 관련시켜 언급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고대 부족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당시에는 서로 도와주는 관습과 지방 법정에서 정의를 실행하는 관습속에 보존되어 온 설화와 율법전승들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그러나 아모스가 처한 사회는 모세의 계약이 파기된 상황이었다. 평등주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강자들은 집요하게 가나한 자와 약자를 착취했다(암2:6-7).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는 왕과 왕국에 대한 야웨의 심판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암7:7,11,16-17).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들은 농민들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유용한 계약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정책을 주장했다. 농민들이 착취당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계약적 질서를 준수하지 못한 지배계급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예언자적 경고들을 억압과 박해로 응수했다(암2:10-12,호9:7-8).그러므로 참 예언을 분별하는 표준은 사회, 경제적 관계들과 정치적 사건들을 계약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궁정 예언자가 아니라 민중 예언자들이 참예언자로 기억되는 것은 “그들이 계약적 정의에 대한 야웨의 관심을 표명하고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논의 한 대로 북왕국의 왕조가 남왕조의 왕조 이념과 같은 통치이념을 추구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북 이스라엘이 고대 부족동맹 전통에 따라 왕권을 수용하려했고, 특히 모세에 전통에 따른 야웨신앙과 평등주의적 사회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왕국 유대의 예언자들도 집권층과 부유층이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강령으로 하는 야웨신앙을 포기한 것을 고발했다. 예루살렘제의와 왕과 밀착된 이사야 마저도 통치자들의 불의와 권력남용으로 인한 평등사회의 와해를 경고했고(사1:21-23; 7:10-17), 미가는 옛 부족 질서를 파괴한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통렬히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완전 폐허를 선포했다(미3:12), 사실상 지배자들과 부유층이 자행한 불의와 억압은 때때로 야웨가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해서 심판을 고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남왕국의 멸망을 지켜 본 예레미야도 오랫동안 사회정의가 짓밟혀 온 것이 유대 멸망의 원인임을 간파했다. 갓월드에 의하면 예레미야에게는 “사회정의가 실천되지 않으면 계약전승들과 예루살렘 제의가 안정의 근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성전과 권력층들을 향한 야웨 심판을 예리하게 선포했다.

 

  북왕국과 남왕국의 예언자들은 그들이 궁정예언자들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동맹이 구가했던 사회정의와 평등에 입각해서 그리고 모세의 해방전통에 서서, 집권층과 부유층의 불의를 고발하고 야웨으 심판을 선언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의 그 성전에 대한 야웨의 자유를 제한한 성전을 지배 이데올로기한 왕정신학 내지 이념을 전면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왕국의 멸망(북왕국 주전 722, 남왕국 주전586)은 고대 이스라엘 부족동맹의 평등주의적 사회체제의 와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두 왕국이 멸망했다고 할지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야웨신앙과 사회적 평등사상에 관한 전승 보유자가 살아 남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과 북이스라엘의 민중들은 모세의 해방전통을 전승한 모체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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