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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강 이스라엘의 군사적 교만과 심판의 성격(6:12-14)

by 【고동엽】 2022. 4. 16.

제39강 이스라엘의 군사적 교만과 심판의 성격(6:12-14)

 

6:12-14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은 아모스 6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씀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우선 6장의 마지막 부분을 내용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네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12절 상반부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느냐?"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대답은 "예"를 유도하겠습니까? 아니면 "아니오"를 유도하겠습니까? "아니오"를 유도합니다. 말들은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평지를 달립니다. 소가 밭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지 밭을 가는 것입니다.
2) 12절 하반부입니다. "그런데"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미물인 짐승을 들어서 인간을 책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짓,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13절입니다. 여기서는 사마리아의 교만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말을 인용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4) 14절입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부분을 내용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말하는 주체, 즉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말하는 주체가 셋이 나옵니다. 첫째로, 12절은 선지자 아모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13절은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하는 말을 아모스가 인용을 했습니다. 셋째로 14절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로 개요를 살펴보고 한 절씩 좀더 자세히 읽어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긍정이 아닌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무엇인가 일정한 대답을 유도하고 있는 질문을 수사학적인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모스서에는 수사학적인 질문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암3:3∼6)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암6:2)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말은 땅 위를 달려야 합니다.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바위 위를 달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발굽이 다 상하고, 발목이 삐고,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좀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모스 당시에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들처럼 말을 타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대에 나타난 것입니다. 아모스 당시의 벽화나 고고학적인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는 말을 타는 것이 지금처럼 승마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병거를 만들어서 그것을 말에 매고 달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 위에 사람이 직접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병거를 매고 달린 것입니다. 병거에는 보통 두 사람이 탑니다. 한 사람은 말을 모는 마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활이나 다른 병기를 들고 탑니다. 그렇게 해서 둘이 한 조가 됩니다. 참고로 암2:15을 읽어봅니다.
(암2: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병거를 타고 있는 궁수, 즉 활을 가진 사람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또 말 타는 자, 즉 마부도 역시 그 지진을 피할 재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볼 때 아모스 시대의 상황으로는 말 병거가 바위 위에서 달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습니까? 아무리 어리석은 바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우선 여기서 말하는 "거기"는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말 성경대로 하면 바위 위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소로 하여금 바위 위를 갈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무지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뜻은 맞지만 번역 자체는 조금 달리 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제가 아래에 히브리어 원문을 적어보겠습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소들로 밭을 가느냐"는 뜻입니다. 여러분, 소들로 밭을 갑니까? 밭을 갈지 않습니까? 갑니다. 문맥상 이 질문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본래 없는 말인 "거기"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없는 말을 하나 더 집어넣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띄어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위와 같이 히브리어 원문을 배열하면 뜻이 명확해집니다. "소로 어찌 바다를 밭 갈겠느냐?"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 바위 위를 달리지 않는 것이나, 소가 바다를 밭 갈지 않는 것이나 다 비슷한 종류의 표현입니다. 병거가 바위를 달릴 수 없듯이 소가 바다 위를 밭 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어에서는 소라는 단어가 주로 단수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러분,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기에서 아모스는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어리석은 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미물인 짐승을 들어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렘8: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그러면 아모스 본문에서 과연 이스라엘이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인진이라는 것은 쓴 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식 이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법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악으로, 달콤한 열매를 쓴 독으로 말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죄악이 얼마나 엄청나냐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너희 생각에 말 병거가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을 어떻다고 보느냐? 또 소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가는 것은 어떻다고 보느냐?" 이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은 물론 미친 짓거리지"하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무엇입니까?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너희가 지금 그와 같이 멍청하고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게 한 것이 바로 미친 짓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나 소나 다 제 갈 길만큼은 알고 있다. 그래서 말은 바위 위를 달리지 않고 땅 위를 달리며 소도 바다 위를 밭 갈지 않고 평지를 밭 갈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의 갈 길을 바로 알지 못하고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가고 있지 않느냐? 이 어리석은 백성들아!" 이렇게 지금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공법을 쓸개로 변하게 했으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게 했는지 그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겠습니다.
(암5:10∼15)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암5:21∼24)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마치 병거가 박살날지도 모르는데 바위 위로 달리는 것이나, 소가 바다 위에서 빠져죽을 지도 모르는데 밭 가는 모습과 같은 한심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절로 넘어갑니다.
(암6:13)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멍청하고 한심한 짓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허무한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또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로 두고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쉬운 것을 어렵게 번역해놓았습니다. "허무한 것"이란 "로데발"이라는 지명을 번역한 것인데 지명의 뜻을 풀어서 그대로 쓴 것입니다. 예컨대 베들레헴이라는 말이 있으면 지명 그대로 베들레헴이라고 번역을 해야지, 이것을 떡집으로 번역해서는 오해를 살 소지가 많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나는 오늘 대구(大邱)에 갔었다"는 말을 외국인이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나는 오늘 큰 언덕에 갔었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허무한 것을 기뻐한다"는 말은 "로데발을 취하여 기뻐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데발은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지명입니다.
(수13:26) 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경까지와
(삼하9:4∼5)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삼하17:27)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그 다음에 또 아모스 분문에 나오는 뿔이라는 단어도 본시는 지명입니다. 가르나임이라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은 "우리의 가르나임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뜻이 됩니다.
(창14:5)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가르나임이라는 곳은 구약의 외경인 마카비1서 5:26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아모스가 예언할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왕이 누구였습니까?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이때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대단히 강성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된 배후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본시 요단 강 동편인 길르앗 지역은 아람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당시 아람은 북쪽의 앗수르에 의해서 상당히 힘이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암1:3∼5을 찾아봅니다.
(암1: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다메섹이 곧 아람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더 북쪽에 있는 우라르투에 의해서 약화되었습니다. 우라르투를 성경에는 아라랏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문 산의 이름이 아라랏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 아라랏이라는 나라에 의해서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당시에 이스라엘은 힘을 많이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여로보암은 요단 강 동편 길르앗 지역에 있는 로데발과 가르나임 지역을 점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데발을 탈취했다고 기뻐하며 가르나임을 점령했다고 우쭐대고 있지만 로데발은 뜻 그대로 허무한 것,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것이 대단하다고 뽐내고 있지만 그 말 그대로 허무한 것, 즉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뿔은, 다시 말해서 가르나임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취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해서 자기들의 힘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지 않으면 전쟁에서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 만무합니다. 13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군사적인 강성함을 교만스럽게 뽐내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마지막 14절을 봅니다.
(암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는 심판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것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위엄 있는 표현을 써서 더욱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많은 군사, 구름떼와 같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한 나라를 친히 일으키셔서 그 나라에 이미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는 그 어떠한 희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5:27이 여기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암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메섹 밖으로"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될 것 같으면 "다메섹 밖으로"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다메섹으로"라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람의 수도가 다메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메섹 밖으로"라고 했으니까 아람보다 더 북쪽, 그리고 더 위쪽에 있는 나라에 의해서 멸망될 것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였습니까? 앗수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친다는 말은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만히 앉아서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싸우다가 패하는 것이 아니라, 침입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침입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여기에서도 메리스무스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양쪽 끝에 있는 두 가지를 들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다 포함해서 전체를 말할 때 그것을 메리스무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하맛은 어디에 있고 아라바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왕하 14:25을 찾아봅니다.
(왕하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결국 하맛 아귀나 아라바 시내는 여로보암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를 지칭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맛은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 제일 꼭대기이고, 반면 아라바 시내는 제일 남쪽 국경입니다. 우리 나라 식으로 따지면 하맛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진에 해당하겠고, 아라바 시내는 제주도 남단에 있는 가파도, 마라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일으키신 한 나라가 치러 와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남김없이 다 학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8을 한번 봅니다.
(암6: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성읍 사마리아와 거기에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6:14에서는 심판의 범위가 이스라엘 전역에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대적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 전역을 모조리 학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교만함이 꺾이게 되고 군사적 안정감과 사마리아의 물질적 부유함이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까지 공부하고 한 가지만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인간의 힘을 의지할 경우에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자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신28: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시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33:16∼17)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경험에서(출3:8, 6:6, 14:13∼14), 가나안 정복의 체험에서(신7:1∼2, 수3:10), 또 기드온이 300 용사로 미디안을 무찌른 일에서(삿7:22), 또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일(삼상17:45) 등을 통해서 싸움에서의 승리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얼마든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현실적 만족과 부유와 강성으로 인해서 그 귀한 사실을 망각하고 모든 것을 자기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교만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 시간에도 생각해보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해나가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내 힘, 내 재주, 내 지식, 내 재물 등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더 힘 있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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